경상북도/경주시

[스크랩] 서라벌...무열왕릉비, 서악리 비석

임병기(선과) 2008. 6. 6.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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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산 구릉아래 능중 가장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별다른 장식이 없다.

답사객도 여행객도 보이지 않아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흐른다.

 


 

"신라 제29대 무열왕(재위 654∼661)의 무덤으로,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5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무열왕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본명은 김춘추이다.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지 8년만인 661년 6월에 죽어, 죽은 왕에게 태종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아직 발굴조사를 하지 않았으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무덤에 비해 봉분장식이 소박한 편으로, 무덤 주위에 자연석으로 둘레돌을 돌렸다.

무덤 앞 동북쪽에는 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가 있다. 무열왕릉은 신라의 왕릉 가운데 무덤 주인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가치가 있으며, 1972∼1973년에 주변을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문화재청


이수에  6마리 용이 3마리씩 엉켜서 여의주를 받들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 '太宗武烈大王之碑’ 새겨 놓았다. 통일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건립되었으며, 명필가로 유명했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글씨라고 알려져 있다.


 

진흥왕 순수비처럼 자연석 이거나 방형 대석 받침이었던 양식이 통일후 당나라 영향을 거북 받침과 이수가 출현하며 무열왕릉비는 최초의 예가 되고 있다. 


현재 비신이 멸실된 채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한반도 변방에서 삼국을 통일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이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또한 거북은 목을 힘차게 빼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등에는 구름문 덩굴문, 목주름 가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뒷발가락이 4개로 조각된 까닭? 거북이 힘차게 앞으로 나갈 때는 엄지발가락을 귀갑안으로 밀어 넣는 것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지만 능묘비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타나는 예이며 능 좌측에 조성되는 능묘의 시원이다고 하겠다.


 

마치 어머니 젖가슴을 닮았다. 뒷산 봉우리와도 일란성 쌍둥이 처럼 보인다.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 문무왕의 친동생 김인문의 묘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책을 많이 읽었고 특히 글씨를 잘써 태종 무열왕의 비문을 썼고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능하였다. 또한 넓은 식견과 훌륭한 재주와 솜씨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20대에 당나라에 들어가 좌령군위장군이 되었고 신라에 들어와서는 군주가 되어 장산성을 쌓는데 감독을 맡았다. 외교술에 능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당나라에게 신라측 협조사항을 받아내는데 큰 공을 세워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당나라에서 관직을 지내다가 효소왕 3년(694)에 죽었다. 당 고종은 그의 시신을 호송하여 신라로 보냈으며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의 벼슬을 내렸고 서악에서 장례를 치르게 했다. 특별한 시설이 없이 높이 6.5m의 흙으로 높이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이다."...문화재청 
 


김인문의 묘비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서악동 귀부로 칭해진다.

 

내눈에는 무열왕비석과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앞뒷발의 발가락이 모두 5개인 것이 다를 뿐, 길게 뻗은 목, 5개의 목주름 등 힘이 넘친다.



2006.11.16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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