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주시

[스크랩] 서라벌...중생사. 능지탑

임병기(선과) 2008. 6. 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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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아쉬움이 남는다.

더구나 좋은 사람과 동행, 감정에 젖게하는 색조가 깔린 절터에서는 넘어가는 해를 붙잡고 싶다.

이심전심 모두들 말을 아낀다. 그건 군더더기 사족에 불과하기에...

삼국유사에 기록된 중생사 여부는 중요치 않다. 곡학아세 할 까닭도 없는데 그냥 믿고 싶다.

 

 

중생사 대웅전

 

원래의 중생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삼소관음조」에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나라의 한 화공이 신라로 건너와서 대비관음상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기도하여 복을 얻음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특히, 신라말의 최은함은 대비상 앞에서 기도하여 아들을 얻었는데, 후백제의 견훤이 서라벌을 침범하여 부득이 아이를 대비상 앞에 놓고 난을 피하였다가 보름만에 찾아오니 아이는 더욱 생기가 짙고 입에서는 젖냄새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아이가 곧 최승로이다. 또 922년(성종 11년) 3월 이 절의 주지 성태가 시주가 없어 절을 유지할 수 없음을 걱정할 때 대비상이 금주 사람들의 시주를 얻어 주었고 절에 불이 났을 때 대비상이 스스로 절마당으로 옮겨와 화재로부터의 재난을 면했다고 한다."

 

경주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모셔진 낭산관음보살입상이 기록속 관음보살이라고 알려져 있다.

 

마애불

 

중생사에는 강도가 여린 넓은 바위에  마애삼존불상이 있다. 마모가 심한 불상은 얼핏보면 독립불상처럼 보이지만 마애불로는 흔치 않은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협시는 신장상이라 한다.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모신 까닭이 문무대왕 화장지로 추정되는 능지탑과 연결하면 명쾌한 결론에 닿지만 능지탑마져 이설이 난무한 현실에서 자유로움은  나같은 무지랭이 범부들의 특권이다.

 

석조부재

 

스님도 마실간 듯 텅빈 절집은 졸고 있고,  마당 모퉁이에 흩으진 석탑 옥개, 석등 하대석, 금당자리 부재와, 중생사를 나서는 우리는 말이 없다.

 

능지탑


아직도 확실히 문무대왕 화장지로 정립되지 않았지만 황수영 전 동국대총장은 대왕의 화장지를 「고문외정(庫門外庭)」이라 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화장지라고 주장한다.

 

복원된 능지탑은 지대석 위에 삼단 장대석으로 몸돌을 쌓고 낙수면은 잔디로 마감하였다. 1.2층 옥개에는 복연이 보이고 일층 몸돌에는 각면에 3구의 십이지상을 배치하였다. 


 

현장에는 상당수에 달하는 연화문 석재들이 별도로 보존돼 있어 고개가 갸웃 거려진다. 우리눈에도 복원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은 전문가의 몫이다.

 


옥개의 복련, 몸돌의 십이지신상이 보인다.

"십이지 부조상은 대체로 문복과 무복, 그리고 조각 수법에도 차이가 있어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들 십이지신상 가운데 북쪽면 중앙의 자상(子像)은 유일하게 문복을 입었고 다른 상에 비하여 크고 측면관을 유지한 채 앞가슴을 내민 의젓한 모습이 다른 제상과 완전히 다르므로 혹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되기도 하는 상이다." ...신라 문화원

2006.10.03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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