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주시

[스크랩] 서라벌...최부잣집

임병기(선과) 2008. 6. 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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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명문가를 거론할 때마다 어김없이 회자되는 경주 교동 최부잣집이지만, 답사 매니아들 조차 발걸음이 싶지 않다. 신라천년 고도에 산재하는 불교문화유산 그늘에 가린 측면도 간과할 수 없겠지만 서라벌의 분위기,시각적, 감각적 즐거움과 주어진 동선에서 일탈할 여유로움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택, 전통가옥 답사는 뚜렷한 주제가 있어야한다. 예를 들어 양동마을에서는 월성 손씨 여강 이씨의 상생과 경쟁, 하회마을은 동족부락의 구성, 탈춤의 사회성, 풍수지리, 마을숲 조성 배경을 공부해야 한다.

안동,경북 북부지방의 고택, 종택은 양반문화, 유교, 소속 당파, 주요 출신 인물, 낙향 배경 등 흥미진진한 답사거리가 많고, 둘러볼 권문세가 종택이 산재해 있어 동선 수립시 필수적 코스에 포함된다.

 

경주 교동 최부잣집. 9대에 걸친 진사 배출과 12대 만석군 집안, 독특한 재테크 철학과 원칙은 내가 좋아하는 조용헌 교수 글을 답사기 후반에 옮겨 올 것이며, 여기서는 현재 최부잣집 레이아웃만 살펴보겠다. 

 

사랑채

 

높지 않은 솟을문과 이어진 행랑채는 방, 부엌, 헛간으로 6칸 건물이다. 마주보이는 최근에 복원한 사랑채는 정면 측면 5*2칸 'ㄱ'字 건물로 오른쪽은 누마루다. 원효스님과 사랑을 나눈 요석공주가 머물었던 궁터로 알려진 사랑채에는 스웨덴 국왕을 비롯 국내외 명사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사랑마당에 자리한 본래부터 있었다는 설, 좋은 용도에 사용되었다고 해도 눈에 거슬리는 석조, 일반 민가에 유례가 없는 석등부재가 분명한 정료대는 경주지역에는 흔하다는 어느님의 말조차 울화통이 터진다. 사랑채는 복원했지만 기단 높이로 작은 사랑채터임을 알 수있는 자리의 주초와 석조부재도 사찰, 궁궐 부재는 아니었는지?  긴 한숨을 짓게 했다.

안채

 

사랑마당을 돌아서면 만석군 집안 곳간채가 당당하게 위치한다. 곳간채를 거느린 행랑이 달린 중문을 들으서면 안채를 직접 볼 수 없도록 헛벽을 조성 여성의 공간임을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경북 북부지방의 다소곳한 모습의 안채와 달리 'ㄷ'字, 7칸으로 당당해 보인다. 은밀한 여성공간 구조를 강조한 측면보다는 수많은 식솔 내방객 소작농을 진두지휘하는 소설 토지속 최참판댁의 윤씨부인이 문을 열고 나올 듯한 분위기다.

 

또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굴뚝이다. 굴뚝 높이는 일반적으로 온도가 높은 남부지방, 습한 지방은 낮고, 추운 지방은 빠르게 연기를 배출 온도상승을 위해 높다. 경주는 그렇게 추운지방이 아니건만 건물 보호를 위해서인지 장식용도인지 지나치게 높아 보인다.

 

고건축, 고택에서는 구조물의 상징, 장식의 이해에 앞서 기능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사당

 

사당은 정침 동쪽에 두는 것이 일반적 유형이다. 남향하고 있는 경우 정침 좌측인데 최부자집 사당은 서편에 모셔졌다. 사랑채와 사당사이에는 후원(?)을 조성한 사례도 처음 접하지만, 끝까지 심기가 편지 않은 것은 왜인지???

 

작은사랑채 터

 

 역사산책방에 있는 조용헌 교수 글을 옮겨온다. 님들의 서라벌 답사시 도움이 되길 바란다.

 

9대 진사, 12대 만석꾼
부불삼대(富不三代)란 말 즉 부자가 3대를 넘기 힘든다는 말이다.
100년은 유지될 줄 알았던 재벌들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부자가 3대를 넘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세간의 이치를 깨닫고 있다.

이루는 것도 빠르지만 망하는 것도 신속하다.
삼천리를 내려가는 백두대간의 유장한 산줄기처럼 3대를 넘어 오래가는 부자가 어디 없단 말인가! 그 유장한 부자를 보고 싶다.

경주의 최 부자집은 9대 동안 진사를 지내고 12대 동안 만석을 한 집안으로 조선 팔도에 널리 알려진 집안이다. 만석꾼이야 찾아보면 많지만 12대를 연이어 만석을 한 집안은 이 집 뿐 일 것이다.
앞의 글 여섯 가지 원칙이 최 부잣집의 제가(齊家) 철학에 해당된다면 육연(六然)이라고 하는 수신(修身)의 가훈도 있다.

자처초연(自處超然) :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대인애연(對人靄然) :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
무사징연(無事澄然) : 일이 없을 때에는 맑게 지내며
유사감연(有事敢然) :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고
득의담연(得意淡然) :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며
실의태연(失意泰然) :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하라.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철학이 있었던 것이었다. 최부자집 가훈을 음미하면서 나는 로마 천년의 철학이 생각난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의할 것 같으면 로마 천년을 지탱해준 철학은 바로"노블리스,오블리제"였다고 한다.
번역하면 혜택 받은 자들의 책임 또는 특권 계층의 솔선수범 이다.

시오노가 [로마인 이야기] 전체를 통하여 몇 번이나 반복 강조한 부분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제이다. 이것은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며, 그들의 삶의 질을 더 높이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는 게 시오노의 주장이다.

그렇다. 도덕적 의무를 통해 자신의 삶의 질을 높였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최 부잣집의 원칙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도덕적 실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와 보람을 찾던 방법이었던 것이다.

삶의 질은 의미와 보람에 달려있는 것 아닌가. 재산을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르침의 실천을 통해 최씨들은 주변도 살고 자신들도 행복하였다.

한국 사람들은 이를 "좋은 일을 많이 한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有必餘慶)라고 표현했다. 이는 요즘의 형법 민법보다도 훨씬 강력한 윤리적 기제였으며, 동시에 사람을 아름답게 이끄는 철학이었다.

조선의 이 정신은 노블레스 오블리제와 일맥 상통한다.

최 부잣집의 원칙들은 한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제다.

후원 석탑

 

3대도 어려운데 어떻게 12대를 이어갔단 말인가?
12대를 이어갈 수 있게 한 경륜과 철학이 반드시 있었을 텐데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최 부잣집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 내지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이는 한마디로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양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 요건이 진사 벼슬인 셈이다. 보통 사람은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벼슬의 기회가 있으면 당장하였지만 이 집에서는 벼슬이 높아질수록 타의에 의해 당쟁에 휘말려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을 우려한 듯하다.

둘째,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만석은 쌀 1만 가마에 해당하는 말인데 이 이상은 재산을 불리지 말라는 말이다.
돈이란 것은 처음 궤도에 오르기까지가 어렵지 그 궤도를 넘어서면 다음부터는 돈이 돈을 벌어들이는 상황에 돌입한다.
최 부잣집은 만석이상 불가 원칙에 따라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환원방식은 소작료를 낮추는 것이었다.

당시 소작료는 대체적으로 수확량의 7-8할 정도를 받는 것이 관례였는데, 최 부잣집은 5할이나 아니면 그 이하로 받았다. 그러니 주위의 소작인들은 앞을 다투어 최 부잣집의 논이 늘어나기를 원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최 부잣집의 논이 늘어날수록 자기들은 혜택을 보니까, 사촌 논 사면 배가 아프다는데 이 경우는 정반대이다.

상상해 보라, 저 집 재산이 늘어나야 나에게도 좋다고 여기는 상황을, 저 집이 죽어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저 집이 살아야 내가 잘 산다는 상생의 방정식을 생각해 보라.
이 어찌 아름답고 통쾌한 풍경이 아니겠는가!

둘째와 같은 맥락의 가훈이 넷째, 흉년에는 논을 사지 말라.
쌀을 많이 가진 부자에게는 흉년이야말로 없는 사람의 논을 헐값으로 사들여서 재산을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상극의 방정식이다. 그러나 최부자는 이러한 상극의 방정식을 금했다.

이는 양반이 할 처신이 아니요, 가진 사람이 해서는 안 될 행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흉년에 논을 사면 나중에 원한이 맺히게 될 것은 뻔한 이치이다.
최씨 가문의 도덕성과 아울러 고준한 지혜가 결합된 산물이 바로 둘째와 넷째 항목이다.

셋째가,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이다.
어느 정도 후하게 대접했는지 보자. 최 부잣집의 1년 소작 수입은 쌀 3천 석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1천 석은 가용으로 쓰고, 1천 석은 과객 접대하는데 사용하였고, 나머지 1천 석은 주변 지역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데 썼다고 한다.

여섯째,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조항도 같은 맥락이다.
주변에서 굶어 죽고 있는 상황에서 나 혼자 만석이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는 부자 양반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최 부잣집의 다섯째 원칙은,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이다. 이는 재산관리의 상당 권한을 여자가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푸른 역사/조용헌

 

2006.10.03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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