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대구시

[스크랩] [대구 매일신문]자녀와 떠나는 답사여행(5)...영남제일관

임병기(선과) 2008. 6. 6.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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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와 떠나는 답사여행> 대구읍성·영남제일관
대구의 옛 이름 달구벌은 넓고(달구) 평탄한 땅(벌)이라고 한다. 하지만 달구벌 지명은 물론 대구시 중심에 위치한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지명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 하다. 분명 성의 중심에서 동서남북으로 난 도로를 의미할 것인데 성벽은 어디로 갔을까?

◇ "일본인, 상권 빼앗으려 읍성 철거"
대구읍성은 선조 24년 부사 윤현이 선산 군위 안동 읍민을 징집하여 대구부민과 더불어 토성으로 축조하였으며 임진왜란에 붕괴되어 오랫동안 복원되지 않고 있다가 영조12년(1736)에 석성으로 축성되었다.

대구읍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 문이 있었는데 약전골목 길 남성로에 정문인 남문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동성로의 동문 진동문(鎭東門), 북성로에 북문 공북문(拱北門), 서성로에 서문 달서문(達西門)을 냈다. 따라서 지금의 대구중심 거리는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사대문으로 향하는 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구읍성은 민족정기 말살과, 성밖 상권을 장악한 일본 상인들이 성안의 조선인 상권을 빼앗기 위한 계략으로 경상도관찰사 서리 친일파 박중양에 의하여 1906년 철거되었다.

도시의 발달과 팽창으로 4대문 표시석만 남아있을 뿐 성의 흔적은 찾을 길 없어도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망우당 공원에 위치한 대구성의 남문인 영남제일관, 영영축성비, 대구부 수성비다. 현재 위치에는 대구 동쪽 관문임을 고려 동문인 진동문을 복원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 추녀마루 잡상, 나쁜 기운 막아
영남제일관은 1906년 읍성 철거 때 철거되었으나 1980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대구의 관문역할을 하는 홍예형 성문위로 2층 누각이며 추녀마루에는 잡상이 설치되어 있다.

잡상은 주로 궁궐, 궁궐 건물과 관련 있는 건물 추녀마루에 조성되며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벽사와 목조 건물의 화재 예방을 위한 주술적 의미로 여러 가지 형상의 흙으로 구워 만든 인형, 즉 장식용 기와를 말한다. 중국 송나라에서 전래되어 조선시대에 성행했는데 3마리에서부터 11마리까지 3, 5, 7, 11의 홀수로 앉혀져 있으며, 여러 이론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맨앞 인물은 서유기의 ‘삼장법사’로 사람의 얼굴 모습으로 삿갓을 쓰고 있으며, 뒤이어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이귀박은 뿔이 난 짐승의 형상이며, 입과 귀가 두개인 이구룡, 말의 형상인 마화상,재앙을 막아주는 삼살보살은 막아주는 잡상이며, 천산갑은 인도 중국 등지에 분포된 포유동물의 일종으로 머리 뒤통수에 뿔이 돋아있고 등이 다른 잡상보다 울퉁불퉁 튀어 나왔으며, 나토두는 짐승같이 생긴 귀신으로 용 또는 검붉은 곰의 모습이다.

대구부수성비는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김세호가 경상감영의 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뒤, 그 사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에는 1870년 봄에 수리를 시작하여 11월에 마쳤는데, 원래 보다 높이와 크기를 키워서 동서남북의 성벽 위에 새로이 4개의 누각을 세웠다고 한다.
본디 남문 밖에 세워진 것이었으나, 1932년 대구향교로 옮겨졌다. 그런 뒤 1980년 영남제일관을 복원하면서 비석도 이 자리로 옮겨졌다.

◇ 대구읍성 규모`공사과정 기록
영남제일관 앞에 위치한 영영축성비는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였던 민응수가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대구읍성을 쌓은 뒤, 규모와 공사과정을 기록하여 1737년(영조 13)에 세운 것이다.

비문에 따르면, 공사기간은 1736년 1월에 시작하여 6개월 정도 걸렸으며, 동원된 인원은 7만 8천 534명에 이른다고 한다. 둘레는 총 2천124보(步) 성 위에서 몸을 숨기고 적에게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한 여장은 819첩, 높이는 서남 18척, 남북 17척, 뒤 축대 넓이가 7보, 높이가 3급(級)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읍성의 네 모퉁이에는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와 한양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망경루라는 4개 망루가 있었다. 원래 남문 밖에 세웠는데 1980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일본의 침략 야욕을 견제하기 위해 축성한 대구읍성은 임진왜란으로 붕괴된 후, 근세에 상권 확장을 위해 일본인 주도로 사라져버렸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만, 영남제일관을 제자리에 옮기는 사업과 더불어 동서북문을 복원하여 옛 모습을 되찾을 날을 기대해본다.

임병기(답사카페 cafe.daum.net/moonhawje 운영)


작성일: 2006년 08월 17일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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