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대구시

[스크랩] 대구 / 망우공원의 대구읍성 문화유산

임병기(선과) 2008. 6. 6.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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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옛이름 달구벌은 넓고(달구) 평탄한 땅(벌)이라고 한다.하지만 지금은 대구시 중심에 위치한 동성로,서성로, 남성로,북성로 지명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 하다. 분명 성의 중심에서 동서남북으로 난 도로를 의미할 것인데 성벽은 어디로 갔을까?

 

여느 도시가 그러하듯 대구도 시의 발달과 팽창으로  성의 흔적은 찾을 길 없어도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망우당 공원에 위치한 영남제일관, 영영축성비, 대구부 수성비다.

 

                                                     영남제일관/대구수성구청

 

오래전 사진인 듯 하다. 영남제일관은 대구성의 남문이었고 안내문에는 "대구읍성은 1590년 토성으로 축성하였으나, 임진왜란시 붕괴되어 1736년 토성으로 다시 쌓았으며, 성에는 동문인 진동문, 서문인 달서문, 남문인 영남제일관,북문인 공북문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대구중심의 거리는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4대문으로 향하는 길임을 알 수 있겠다. 영남제일관은 1906년 읍성 철거시 철거되었으나 1980년 이곳으로 옮겨 대구의 관문역활을 하는 홍예형 성문위로 2층 누각이며 지붕에는 잡상이 설치되어 있다.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문화재청

영남제일관 앞에 위치한 영영축성비는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민응수(閔應洙)가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대구읍성을 쌓은 뒤, 그 규모와 공사과정을 기록하여 1737년(영조 13)에 세운 것이다.
비문에 따르면, 공사기간은 1736년 1월부터 시작하여 6개월 정도 걸렸으며, 동원된 인원은 78,534명에 이른다고 한다. 성의 둘레는 총 2,124보(步) 성 위에서 몸을 숨기고 적에게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한 담인 여첩(女堞)이 819첩, 성높이는 서남이 18척, 남북이 17척, 뒤 축대의 넓이가 7보, 높이가 3급(級)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구읍성은 원래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이 때 비로소 돌로 쌓아 석성(石城)으로 만들었다 한다.
이 비는 원래 남문(嶺南第一關)밖에 세웠는데 1906년(광무 10) 당시 대구군수인 박중양(朴重陽)이 성을 헐어 버렸고, 이 비는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다 1980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비문은 민응수가 짓고, 글씨는 백상휘(白常輝)가 썼다."



대구부수성비(大邱府修城碑)/문화재청

대구부축성비도 영영축성비와 나란히 서 있으며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김세호(金世鎬)가 경상감영의 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뒤, 그 사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1870년(고종 7) 봄에 수리를 시작하여 그 해 11월에 마쳤는데, 원래 보다 높이와 크기를 키워서 동서남북의 성벽(城壁) 위에 새로이 4개의 누각(樓閣)을 세웠다는 것이다.

 

누각의 이름은 동을 정해루(定海樓), 서를 주승루(籌勝樓), 남을 선은루(宣恩樓), 북을 망경루(望京樓)라 하였다고 한다. 이 비는 본디 남문 밖에 세워진 것이었으나, 1906년(광무 10) 대구부성이 헐리면서 한곳에 자리잡지 못하다가 1932년 대구향교로 옮겼다. 그런 뒤 1980년 남문[嶺南第一關]을 다시 세우면서 비석도 이 자리로 옮겼다."

 

봄날에 유치원생들의 조잘거림, 여름날 아베크족의 데이트 코스인 동촌유원지와 나란히 인접해 있지만찾는이 드물었을 영남제일관 앞 광장에는  낙엽만 딩굴고 있었다.

 

혹여 가실 기회가 있다면 파크호텔 뒤로 해서 팔현고개를 넘어 고모역 까지 다녀오길 바란다. 1946년 가수 현인이 불러 인기를 누렸던 고모령 노래비가 그곳에 있다.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비 / 수성구청

2005.11.20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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