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대구시

[스크랩] 대구 / 팔공산 동봉, 염불암

임병기(선과) 2008. 6. 6.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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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하나의 추억은 간직하고 있는 곳이 팔공산일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오악중 중악이었으며, 후삼국 전쟁의 한가운데 위치한 곳도 팔공산 이었다. 그래서인지 경주 남산에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의 불교유적이 팔공산 순환도로를 따라 골골이 터를 잡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아직 채 익지 않은 가을 동봉 산행과 염불암 마애불, 청석탑 이야기만 하고자 한다.

전국의 수험생 부모가 가장 많이 찾는(특히 부산 경남) 약사여래불이 있는 관봉과 더불어 주된 등반 코스인 주봉 비로봉 동쪽의 동봉으로 가는 코스는 동화사 경내를 통하는 길, 한티고개에서 올라가는 길,수태골 경유 길 등이 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는 산중턱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가는 것이다. 너무도 인간적인 판단 아닌가?


                                            팔공산 동봉 약사 마애불 / 문화재청

 

케이블카에서 내려 아침부터 동동주에 파전 안주 삼아 한주발 들이킨 후의 산행은 마냥 즐겁기만한데, 일행보다 뒤쳐진 내 눈 앞에 보이는 급경사를 우회하여 아무리 올라가도 동료들이 보이지 않는다. 미안한 맘에 쉬지 않고 정상에 올랐더니 동료들은  느긋하게 뒤따라 온다.

 

동봉 마애불은 풍화되어 소발과 육계가 뚜렷하지 않다. 큰 바위를 광배삼아 약간 기운 불상은 왼손의 지물로 인해 약사 여래불로 알려져 있으며, 갓바위 약사불과 더불어 동화사가 오늘날 약사여래 신앙의 메카로 추앙받는데 일조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기실 동화사는 미륵신앙 사찰이었다. 견훤이 경주를 침입하여 경애왕을 참살한다는 소식에 왕건이 신라를 도우려 오다가 바로 팔공산 동수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신숭겸, 김락의 기지로 죽음을 면하게 된 까닭도 동화사는 백제 미륵신앙의 법상종 전초기지어서 동화사 승려들이 견훤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동화사 염불암 마애여래좌상/문화재청

 

내려오는 길에 염불암으로 방향을 잡았다. 티비 사극 태조왕건에서 왕건이 견훤에게 패하여 홀로 도망하다 도인를 만나는 장면이 바로 염불암이다.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에서 염불소리가 들렸다는 전설을 품은 염불암은 내게도 잊지못할 추억이 있는 암자다.

 

바위 서쪽에 선각의 마애불은 동화사 입구의 마애미륵좌상처럼 구름을 타고 앙련대좌에서 사바세계의 중생을 굽어 보고 계신다. 소발에 얕은 살상투, 우견편단의 형식으로 미루어  고려초 거대 불상 형식의 서방극락의 아미타불로 보여진다. 



동화사 염불암 보살좌상/문화재청

 

같은 바위의 남면에는 역시 선각의 보살상이 상현좌에  머리에 보관을 쓰고 오른손으로 연꽃(?)을 든 채 앉아 계신다.  빗물 흐름을 차단하기위한 홈 흔적, 일반적인 보살상과 달리 우견편단의 법의를 하였으며 아마타불의 협시불인 관음보살로 추정된다.

 

1978년 가을 속으로 빠져보지만 27년의 흐름은 염불암 마애불에 대한 어떤 기억도 반추할 수 없다.

하지만,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죄과를 속죄하기 위해 극락전에 삼배를 올리고 원금에 이자를 보태어 보시를 하였지만 마음은 맑지 않더라. 

 

                                                대구 팔공산 동화사 염불암 /문화재청

 

극락전 앞마당에는 고려시대에 유행하였던 점판암 다층석탑이 화강암 기단 위에 지난 풍상을 간직한 채 자리하고 있다. 몸돌은 멸실되고 지붕돌만 올려져 있으나 훼손이 심하여 안타까운 맘 지울 수 없다. "지붕돌은 밑면에 2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윗면에 느린 경사가 흐른다. 또한 두께가 얇고, 네 귀퉁이에서 곡선을 그리듯 한껏 들려 있어 경쾌한 멋을 이끌어낸다. 지붕돌의 비례는 그리 아름답지 않으나, 넓다란 바닥돌 위에 세워 놓은 작은 규모의 탑으로서 안정감이 느껴진다. 청석탑이 널리 유행하던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문화재청)

 

염불암 입구에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1978년 가을로 시계추를 돌려 보면...

 

누구에게나 잘 나가다던 시절이 있을 것이다. 나역시 그 때가 학창시절의 황금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남대구 경찰서의 요주의 관찰대상 리스트에 포함되었으니...

유신말이라 캠퍼스에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지만 . 모단체의 사무장을 맡고 있던 나는 동화사 서운(?) 주지 스님의 발원문을 들고 팔공산 주변의 사찰,암자를 방문하여 십시일반으로 행사후원금을 모금하느라 수업도 팽개치고 동분서주 했었다.

 

그러던 10월 초 어느날(경북대 학생 시위대가 대구역을 점거한 날이었다) 섭외부장과 염불암에 들려 후원금을 받아 내려오면서 액수를 확인하니 봉투속 금액에 비해 겉봉투에 표기된 금액이 정확히 1만원이 적었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횡재가 아닌가? 둘이는 잠시도 머뭇거림이 없이 의견 통일하여 사하촌 아래 막걸리 집에서 거하게 마시고 정확하게(?) 대불련에 입금 하였으나, 모든 학생회 행사 금지에 의하여 행사도 치루지 못하고 모금액은 고스란히 후배들에게 넘겨주었었다.

 

참 잘 나가던 시절이었는데.....쩝!!!

 

2005.10.15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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