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안동시

[스크랩] 풍수지리 답사 / 안동 고산서원

임병기(선과) 2008. 6. 6. 08:40
300x250
300x250
이제는 외곽도로 개통으로 오가는 발길이 줄어 들었지만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를 알고있는 영남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행정구역은 모르더라도 구안국도에 위치한 암산, 즉 바위터널을 모르는 사람은 한명도 없을 것이다.

암산 건너에 위치해 있는 "서원은 1768년(영조 44) 대산 이상정 선생이 고산정사를 창건하여 학문과 후진 양성을 한 터전에 선생이 돌아가신 후 1789년(정조 13)에 사림의 공의로 대산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여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서원배치에서 외삼문,누대는 없지만 향도문을 들어서면(개방은 향사에만 하는 것 같다) 사람을 압도하는 강당인 호인당을 중심으로 동서재가 있으며 앞쪽으로 개방하여 암산과 미천의 경관을 음미하도록 마루를 둔 가닭이 혹 루의 기능을 염두에 둔것은 아닐까? 사당은 일반적인 형태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며, 내부에는 대산 이상정선생의 위패가 왼쪽, 오른쪽에 소산 이광정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서원 강당인 호인당으로 영남학파 서원 강당의 전형인 정면 5칸 측면 2칸의 구조에서 양쪽 칸에 방을 두고 가운데 3칸을 마루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써 10칸 집으로 구성되었고, 동쪽에 명성재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는 2칸짜리 방이 하나 있고 나머지 8칸은 마루이다. 양반집에서도 6칸 대청이 기본인데 놀라울 뿐이다.

뿐만아니라 동서재는 전형인 3칸의 대칭건물을 비웃기나 하듯 무려 6칸 건물이다. 물론 호인당과의 위계를 상징하기 위해 원주인 호인당과는 달리 방주이나 동재는 工자형 지붕,서재는 팔작지붕이다.고건축에서 工자는 空과 음이 같다는 이유로 잘 채택되지 않으나 도산서원의 농운정사가 工자인 까닭이 工夫를 상징한 것과 같은 의미이리라.

오늘의 주제는 풍수지리라서 서원 이야기는 그만하겠다. 누가 보아도 고산서원은 명당의 자리는 아니지만 풍수이상의 진면목을 깨닫게 해주는 집이 바로 서원 아래의 작은 고산정사라고 이교수님은 말씀하신다,

택리지에 "기름진 들을 끼고 있는 집으로부터 한나절 걸을 수 있는 거리에 산수경치가 아름다운 터를 사두어 매양 생각날 때마다 그 곳에 가서 시름을 잊고,혹은 유숙한 다음 돌아올수 있다면, 그것은 자손대대로 이어나갈 방법이다"했으니 고산의 집인 일직 소호리와 이곳과의 거리가 여기에 부합된다는 것이다.

대산이라는 아호를 생가인 만수재가 기대어 앉아있는 大石山에서 따오고,더구나 암산마을 사람들이 흔히 얘기해 온 高巖과 암산이라는 두지명을 시경에 나오는 高山仰止(높은산은 우러러 보아야 한다)와 결부시켜 고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창출해낸 것으로 보아도 그의 자연에대한 일면을 보여준다는 것이라고 교수님의 말씀은 이어지신다.

절에서 공부하여 고시 패스한 판사와,고시촌 골방에서 공부한 판사의 판결문은 다르다며 돌과 물이라는 자연지물에서 체득될 수 있었던 불변과 청정함의 그런 선비정신이 아니라,대산이 고산정사 주변의 자연을 마음속에 품은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하며,그것은 분명 고산정사터 자체의 좋고 나쁨을 논하는 차원을 능가하는 것이며,땅을 사랑하고, 주변 자연과 교감하는 그 같은 물아일체의 경지가 곧 터잡는 술법으로서의 풍수가 아닌 철학으로서의 풍수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라는 것이다.

2005.07.24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메모 :
300x250
30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