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그랬을 거야!!!
28년 전 동아리 회원들은 동산병원 뒤 동산동(?) 주차장에서 133(?)번 시내버스를 타고 가창 우록에 내려 구불구불한 농로와 비포장 산길을 만추의 서경에 젖어, 누렇게 익은 천수답의 황금물결을 바라보며 남지장사수련대회에 참석했었었다.
오늘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승용차에서 내려 아무리 두리번 거려도 작은 단서 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농로는 탄탄대로로,산길마져 포장되어 버렸고, 한적했던 동네는 음식점이 가득 자리잡아 시내를 방불케하고,나무아미타불을 새긴 입석은 흔적도 없다.
얼마만인가?
아~! 꿈 많고,세상 무서운 줄 몰랐던 프레쉬맨 시절이었는데, 지천명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난 뭐했지? 친구 선배들은 뭘하고 있을까? 텅빈 기억의 저편에서 추억의 편린들이 파노라마가 되어 파랑를 일으키지만, 퇴락한 대웅전 마냥 좀처럼 상이 잡히지 않는다.
팔공산 자락의 북지장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남지장사는 " 최정산(最頂山: 900m)줄기에
684년(신라 신문왕 4년) 양한(良漢)이라는 스님이 초창하여 개산(開山)하니 지금으로부터 1천3백20여년의 성상을 지켜왔다.
고려조에 들어와 서기 1263년(원종 4년)에 삼국유사를 쓴 대덕 일연선사(一然禪師 1206∼1289)께서 남지장사의 중요성을 인식하시고 중창·복원불사를 벌이니 승려로서 국가에서 내리는 최고 품계인 국사(國師)로 책봉되어 당시 원종임금으로부터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시호를 받았으니 남지장사는 창건에서부터 고려 당시 재창에 이르기까지 국지대찰(國之大刹)임을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면면히 사세가 유지되었으나 1592년(선조 29년) 임진왜란때 병화(兵火)로써 소실되고 말았다. 당시 국가가 난을 당하자 의승군(義僧軍)을 결성하여 왜적을 물리치는데 선봉에 섰던 사명 유정(泗溟 惟政: 1544∼1610) 스님이 남지장사를 승군 및 의병들의 훈련장으로 삼아 왜병들의 표적이 되어 불가피하게 전화를 입었으니 호국도량으로 국가와 민족을 구하고 부처님 정법을 빛냈던 역사적 고찰인 것이다.
그 이전의 사명(寺名)은 호국도량으로만 전해지다가 1767년(영조 43년) 중창을 하면서 오늘의 사찰명인 남지장사(南地藏寺)로 정하여 중생을 구제하니 팔공산 기슭에 있는 북지장사(北地藏寺)에 대칭되는 자리에 있다하여 남지장사라고 현액하니 오늘의 도량인 것이다"...동화사 홈
일주문도,천왕문도 없는 남지장사의 사문은 광명루와 범종각이 일자형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고, 문 옆에는 창고 같은 단칸의 요사가 있으며, 기둥 주련에는 삼귀의가 한글로 새겨진 흔치 않은 유형이지만 내게는, 쌍칠년도의 어떤 기억도 나질 않는다.
분명 늦가을 이었으며, 파란하늘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며 감 수확을 미루자고 하시던 '정숙'선배님의 얼굴은 기억나지만 감나무의 위치는 알 수가 없어 요사겸 불당인 염불당(내 기억이 맞다면 이방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것 같다)에 계시는 스님에게 여쭈었더니 삼성각 편의 감나무를 가리치시며,처사님 몇년만에 오셨냐고 물으시길래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겟더라.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대구 땅에 살면서도 내가 두번째 3000배를 했었던 남지장사를 잊고 지냈단 말인가? 문화유산 답사 매니아라며 전국을 헤매이면서도 진작 내주위의 답사처는 무시한 까닭이 건방진, 허울 좋은 겉치래만 중시하며, 유명 답사처만 순례한 것이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28년 전 밤새 땀흘리며 죽비소리에 맞춰 3000배를 하던 순수한 나의 모습을 대웅전의 부처님은 기억하시겠지?곧 무너질 듯한 대웅전에는 남지장사가 지장도량임을 암시하는 아미타불이 문수,보현 보살을 협시불로 모셔져 있어, 기왕이면 관음,지장 또는 세지 보살로 모셨으면 하는 기원을 하며. 나의 땀방울이 베여 있을 우물마루에 몸과 나의 마음을 눕혀본다.
김해 은하사 대웅전, 팔공산 자락의 북지장사 대웅전 처럼, 남지장사의 대웅전도 불사를 거부(?)한 퇴색된 단청,앙상하게 목리를 들어낸 허물어질 것 같은 기둥,괜히 불안해 보이는 덤벙 주추, 어느 사찰의 전각 기단에서도 볼 수 없는 우주와 탱주가 보이는 마치 탑의 기단 면석 같은 석축 기단의 모습이 28년전으로 나를 몰고 가는 듯하지만, 변화의 물결을 모두 피할 수는 없었는 듯 좁은 중정에 뽀얀 오층탑이 자리하고 있다.
옛 추억으로 여정의 즐거움 만큼이나, 스스로에 대한 깨우침도 한아름 가득 채우고 온 길 이었다.
2005.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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