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박물관의 '머나먼 진화의 여정 사람과 돌' 전시회 공지를 올렸건만 어느님도 호응이 없어 관람후 혼자서 가창으로 향했다.남지장사가 목적이었지만 초입의 우록 녹동서원도 놓칠 수 없는 이야기 거리가 있기에 우리님들에게 소개하겠다.
작년인가? 안양 축구단의 러시아 출신 골기퍼 사리체프가 귀화를 하면서 '신의손'으로 작명을 하였으며 안양 神씨의 시조가 되었고, 방송에서 활약하고 있는 미국 출신 국제 변호사인 '하일'씨도 영도 河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왜장으로 참전했다가, 조선으로 귀화한 '사야가'에 대해서 아는 분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임진왜란과 그 후의 공으로 김해 김씨(현재는 우록 김씨)로 사성을 받은 김충선을 배향하는 녹동서원은, 신사참배,과거사 문제,독도분쟁 등 한일 간의 갈등이 미묘하게 일어나는 요즘도 일본인 관광객의 참배가 이어지고 있으니 양국간 민간고류의 좋은 선례가 될 수 있겠다.
물론, 포로로 끌려간 수많은 민간인, 도공,일본 주자학의 종조가 된 영광 사람 강황의 후손들도 비슷한 교류가 없지는 않을 것인데 도공 심수관이 남원을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아직 정기적인 교류가 진행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소의 굴레라는 의미의 牛勒이 모화당 김충선의 입향후 사슴과 벗하는 마을, 友鹿에 위치한 녹동서원은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와는 차이가 있지만 서원내의 은행나무,솟을 문 위의 창고(?), 정면 5칸 중, 우측 방 2칸, 가운데 마루 2칸,좌측에 방1칸과, 툇마루, 대청에 접한 창문에는 민가의 집처럼 불발기 창을 두었으며, 오래된 기와에는 와송이 가득하다.대원군 시절 서원 철폐후 다시 세우면서 원위치에 복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동, 대나무가 보여 혹 절터는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출처 :다음
" 김충선(金忠善,1571~1642, 자는 선지, 호는 모하당)은 본래 일본인으로 성은 사(沙)씨이며 이름은 야가(也可)이다. 그가 임진왜란때 21세의 나이로 일본군 가등청정(加藤淸正, 가또오 기요마사)의 좌선봉장(左先鋒將)으로 삼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4월 13일 부산 동래에 상륙 했다.조선의 문물과 인정, 풍속에 감탄하여 상륙한지 1주일만인 4월 20일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晋)과 김응서(金應瑞)에게 "내가 못난것도 아니요, 나의 군대가 약한 것도 아니나 조선의 문물이 일본에 앞서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를 짓밟을 수 없어 귀순하고싶다."라는 편지를 보내 귀순의 뜻을 밝힌 후 귀순하였다.
귀순 후 조선의 장수로 울산과 경주, 영천 등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그는 조선에 화포와 조총을 만드는 법과 사용술을 보급하였고, 18개 지역의 왜적의 성을 탈환하는 등 눈부신 업적과 전공을 세우자 권율장군과 어사 한준겸(韓浚謙)이 왕에게 간청하여 정이품 자헌대부에 올랐으며 선조가 그를 친히 불러 이름을 김충선으로 하사 하였다.
1603년(선조 36년) 북방에서 여진족이 국경을 어지럽히자 국경방어를 자청하여 10년간 국경을 지키다 물러났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다시 출정해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의 목을베어 평정에 공을 세웠다.1627년(인조 5년)의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모아 경기도 광주의 쌍령(雙嶺)에서 매복작전으로 대승을 거두어 무훈을 떨쳤다.
그는 서른살이 되던 해 진주 목사(晋州牧使) 장춘점(張春點)의 딸을 아내로 맞아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友鹿洞)에 뿌리를 내리고 충효의열(忠孝義烈)의 가풍(家風)으로 살다가 1642년(인조 20년) 72세로 세상을 마쳐 가창골에 세워진 녹동서원(鹿洞書院)에 배향되었고, 정헌대부 지중추부사(正憲大夫 知中樞府事), 병조참판(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지금 그의 후손들은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 많이 살고 있으며 우록동에 살았기 때문에 우록김씨라고도 불리운다."
지금 대학 1학년인 딸아이가 초딩 재학시절 방학 과제물을 위해서 이곳에 들렸으니 10년도 더지난 시간이었지만 녹동서원과 함께 임진왜란 때 귀화한 중국 장군 두사충의 모명재를 찾기위해 남부정류장 근처를 헤매다 동사무소 직원의 도움으로 들렸던 모명재는 두사충을 배향하며, 그는 대구에서 가장 큰 동인 대명동의 유래 및 여러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출처:네이버
"대구시내에서 경산으로 통하는 대로변 오른쪽 형제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모명재(募明齋)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의 후손이 선조를 위해 세운 것이다. 두사충은 중국 두릉(杜陵) 사람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과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나왔다. 그가 맡은 일은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라는,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임무였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참모로서 항상 군진을 펴는데 조언해야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당시 우리나라 수군을 통괄하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아주 친했다. 임란이 평정되자 두사충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의 매부인 진린(陳璘) 도독과 함께 우리나라로 다시 나왔다. 이때 두사충은 충무공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충무공은 우리나라 장수도 아닌 외국사람이 수만리 길을 멀다 않고 두 번씩이나 나와 도와주자 감격하여 두사충에게 한시를 지어 마음을 표했다. 시의 내용은 충무공이 두사충을 아낀 마음이 잘 드러난다.
이후 정유재란도 평정되자 두사충은 압록강까지 매부 진린을 배웅한 후 자기는 조선에 귀화했다.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은 두사충에게 대구시내 중앙공원 일대를 주고 거기서 살도록 했다.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옮겨오게 되자 두사충은 그 땅을 내어놓고 계산동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계산동 일대는 두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는데 두씨들은 계산동으로 옮기자마자 주위에 많은 뽕나무를 심었고 그 때문에 이 일대를 뽕나무 골목이라 부르게 됐다.
그러나 사람이 늙으면 누구나 고향이 그리운 법, 수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는 두사충이었지만 고국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두사충은 최정산(最頂山=현재의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고국의 천자쪽을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나이가 더 많아지자 어느 날 자기가 젊었을 때 대구 근교를 샅샅이 뒤져 잡아 둔 묘터를 아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가마를 타고 묘터가 있는 고산(孤山)으로 향했다. 그러나 워낙 쇠약한 몸이라 도저히 고산까지 가지 못하고 담티재에서 되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사충은 아들에게 오른쪽의 형제봉을 가리키면서 저 산아래 계좌정향으로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 예언했다. 따라서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이 잡아둔 명당까지 가지 못하고 묘소를 형제봉 기슭에 쓰게 되었고 두사충이 잡아둔 묘터에는 나중에 고산서원이 들어섰다."
2005.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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