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달성군

[스크랩] 달성, 하빈 / 묘골, 육신사(六臣祠)

임병기(선과) 2008. 6. 5.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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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의 연휴지만 아들놈의 중간고사를 앞둔 시점이라 특별히 시험에 도움을
줄 방법도 없건만 늘 그러하듯 스탠바이다.
학원으로, 독서실로 향하는 놈에게 용돈 집어 주면서 맛난 것 사 먹어라는 상투적
말을 던지고는 보람찬(?) 가사노동에 시달린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중전의 명을 거역하겠는가?
여름내 덮었던 이부자리를 욕조에 넣어 발로 밟으며 짜증은 커녕 휘파람 불면서
속으로 타들어가는 맘을 달랜다.
가사노동의 댓가는 슬며시 사라지는 나에게 목적지도, 귀가시간도 묻지 않고 용인
하는 하늘같은 마누라의 성은이라는 것을 알기에...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후손 순천 박씨의 집성촌인 묘골 마을은 사육신의
여섯 가문 가운데 유일하게 대를 이은 박팽년의 손자 박일신이 입향 시조가 되며
육신사에 비치된 대구시의 안내 팜프렛의 내용을 옮겨보면(답사기의 다른 인용문도
대구시 팜프렛 내용임)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중에 탄로가 나서 투옥된 박팽년은
모의사실을 부인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회유했으나 거절하여 8일 만에 순절하였고
멸문의 화를 당했으나 다행히 둘째 아들의 아내도 관비가 되어 친정동네로 내려
왔으나 그 부인은 임신 중이었는데 아들을 낳으면 죽음을 당하고 딸이면 관비로
삼게 되어 있었다“
“해산을 하니 아들이었고 그 무렵 딸을 낳은 여종의 아들과 바꾸어 목숨을 보존하여
훗날 자수하여 후손이 없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종택을 짓고 묘골에 정착했다“


이런 내용의 안내문을 읽고 배롱나무가 길 옆에 도열한 마을 가장 안쪽의 육신사에
도착하여 외삼문을 보는 순간 외삼문을 지붕부터 기둥까지 온통 시멘트로 복원하여
돌아가고픈 마음이 앞서며, 외삼문 안의 절의묘 현판이 양장을 한 아가씨가 고무신을
신은 듯 어색하기 그지없다.


“후손들이 절의묘 라는 사당을 세우고 할아버지 박팽년의 제사를 지냈는데 어느 제사
날 후손의 꿈에 여섯분 선생들이 사당 밖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다섯분의 제물도
함께 차려 제사를 지냈고 하빈사를 세워 사육신을 함께 배향했는데...“
숭정사라 불리는 지금의 사당도 홍살문, 외삼문처럼 박정희 대통령의 “충효위인유적
정비사업“ 일환으로 거창(?)하게 시멘트로 복원되어 있다.


여섯 마리의 거북 귀부위에 무지하게 높은 6면의 탑신, 6면의 이수, 짐작이 가시나요?
숭정당 사당 앞의 사육신의 행적을 명기한 추모탑의 모양에 눈 쌀 찌푸리며 전시행정의
본보기, 5.16 혁명을 미화하기 위하여 역성혁명과 무신 우대 유적 복원을 우선시한
군사정권의 문화정책의 일단을 엿볼 수도 있지만 육신사 복원은 이현령비현령 아전
인수의 산물일까?


“태고정은 일명 일시루(안평대군의 글씨로 추정)라고도 불려져 정자의 정면에 태고정
일시루 두개의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는 이 건물은 1479년에 세워졌고,,,“


태고정은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특이하게 정면이 두칸의 마루, 한칸의 방, 부엌(?)이며
지붕이 한쪽은 팔작지붕, 다른 한쪽은 맞배지붕에 부섭지붕(눈썹 처마)으로 마감하였고
헛튼돌 막쌓기의 계단위에 3단의 장대석으로 바른 쌓기를 한 태고정의 아래에는 제사를
준비한 숭절당이 좌우에 동,서재(조금 이해되지 않지만...안내문에 숭절당, 동서재라는
설명이지만 제향공간이 아니라 강학공간은 아닐지?)가 좌우 대칭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도곡재는 문이 닫혀있어 툇마루 위의 공간 개흘래를 볼 수 없어 안타깝지만 외삼문으로
돌아오자 계시는 문화유산 해설사와 긴 의미 있는 이야기 속에 묻혀 육신사의 의미를
가슴속에 새기며 삼가헌으로 발길 옮겼다.

2003.10.03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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