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영양군

[스크랩] 영양 / 현리 당간지주,석탑,모전석탑

임병기(선과) 2008. 6. 6.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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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과 섬진강이 어우르지는 19번 도로의 풍광이 생각나는, 반변천과 나란히 달리

는 31번 도로에서 저멀리 들녘에 보이는 현1리 3층탑을 향해 방향을 잡는다.

 

 현1리 삼층석탑/사진...문화재청

 

3층 지붕돌은 파손이 심하며, 신라 전형에서 많이 략화되고, 선종 도입 이후로 주로 보이

는 이른바 이형의 석탑으로 하기단의 12신상, 상기단의 팔부신상, 1층 몸돌에 생령좌의

사천왕상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잡초, 콩,논에 절터를 내어 주었더라도 반변천 물소리를 벗 삼으며 옛영화를 되새김질 할

텐데, 석탑보다 높게 세워진 고가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에 하루라도 어디 편할 날

있겠는가?

어찌 도로를 이렇게 개설했는지? 안동 신세동 전탑이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맥을 단절하려

는 의도로,경주의 철길이 서라벌의 지기를 말살할려는 목적이라고 그렇게 소리 높이던 사

람들은 뭘 했는지?

 

3층 석탑과 너무 근접해 있는 한쪽만 남은 당간지주는 별장식 없이 둔중해 보이며,현재의

위치로 보아서는 절의 규모가 판단이 서질 않는다.

나중에 본 현2동 모전석탑과 어울리는 당간지주로 판단할려고 해도 모전석탑의 감실의 방

향으로 보아 타당하지를 않고...

 

현2동 오층 모전석탑 / 사진...문화재청

 

강건너 언더 위에 서있는 모전석탑은 봉감 모전탑을 모델로 후대에 조성되었으리라 보이나

기교는 뒤지는 듯 하지만 감실 벽선에는 덩굴문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덩굴문은 반복되는

문양의 모양으로 부귀 영화가 세세 이어짐을 상징한다.

새로히 기단을 축조한 것은 고마운 일이나 늘부러진 석조부재를 용도에 맞게 사용했으면 좋

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상식에 벗어난 것은 탑의 정면으로 감실의 위치로 보아서는 등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혹 어느시대에 보수를 하면서 잘못 중수하지는 않았을까?

풍수지리의 영향일까?

 

마지막으로, 모전석탑이 경북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널리 분포된 까닭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

은 없으나 대표적인 가설을 옮겨오니 참고하길 바란다.



"첫째, 안동을 비롯한 경북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불교의 한 종파가 이곳에 전탑을 집중해서

유행시켰으리라는 것이다. 부석사, 봉정사를 비롯한 화엄 종찰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 유

학했던 의상이 이곳에 화엄 사찰을 세우고 신진 유학승들이 모여들어 화엄종을 열게되면서

당시 중국에서 유행했던 전탑 형식을 함께 도입하여 집중적으로 탑을 조성했으리라는 가설

이다.

 

둘째, 소재성에 근거하여 볼 때, 우리 나라의 전반적인 사정과 달리 이 지역은 훌륭한 화강암

석재는 커녕 벽돌이외의 탑 재료를 구하기조차 어려워 전탑을 세웠으리라는 추측이다. 안동은

두 개의 단층선 이 지나가는 지질학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백악기를 전후한 이 대규모 변형작

용을 거치면서 암석에 많은 균열이 생겨 보통 화강암에 비해 안동의 그것은 파쇄 현상이 훨씬

심하다. 이런 소재로는 석조물을 조성하기 곤란하였으므로 낙동강을 낀 퇴적암 지대의 양질 점

토와 강모래를 이용한 벽돌을 사용했을 가능 성이 높다.

셋째, 풍수비보설(風水裨補說)에 영향을 입어 강안(江岸)에 전탑을 집중해서 세웠으리라는 가

설이다. 안동에 현존하는 전탑은 공교롭게도 모두 사찰이 폐사되고 없는 강안에 집중해있고,

이 지역 지방지인 『영가지』문헌기록에도 수구비보(水口裨補)와 본부비보(本府裨補)로 언급

되면서 전탑이 소개되고 있어, 풍수지리설에 따라 한 시기에 동일한 재료로 만든 전탑이 집중

해서 축조되었으리라는 것이다.

넷째, 충분한 재력을 갖춘 토착세력과 중국을 비롯한 전조문화권 (塼造文化圈)과의 갖은 교류

에 따라 벽돌공을 비롯한 장인들의 솜씨로 세워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

 

2005.05.28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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