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지는 석문 정영방(石門 鄭榮邦 : 1577-1650)이 광해군 5년(1613년)에 조성한 것으로, 광해군 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한적한 이곳에 들어와 은둔하면서 정원을 만든 것으로, 서석의 의미는 연못안에 있는 하얀돌을 말하며 각각의 돌에는 다양한 이름을 붙였고, 연못에서 솟아나는 물과 흘러드는 물로 수위조절을 했다고 한다.
석불좌상도,서석지도 연당리에 위치하고 있으니 마을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되었을까?
낮은 담장이 정겨운 동리 초입에는 입향조인 동래 정씨 정영방의 세거비처럼 보이는 비석이 마을 분위기와 비조화를 이루며 서있지만 애써 외면하고, 영양군의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를 바라본다.
정원에 은행나무?
찬찬히 의미를 탐구하기로 하고 이중으로 헛담(?)을 지나 대문 없는 정원으로 들어가니 敬亭이 길손을 맞이하지만 이놈의 화상은 고개만 갸웃거려진다. 경정이 서석지의 주건물이라면 주출입문도 현재의 위치가 아니어야 하고 좌향도 잘못된 것이 아닐까?
경정은 주인이 기거하는 주공간이 아니며 손님과 어울려 풍류를 즐기며 시문을 펼치는 열린공간이라,출입 위치가 현재처럼 된 것이며 나의 딴지가 틀리지 않다면, 들어오는 방향에서 마주보고 있는 방2칸,마루 1칸의 작은 주거공간 主日齋(주일재)가 서석지에서도 중심 건물이라 정면으로 트인 공간이 전개 되도록 했을 것이다.
마치 안채처럼 헛담으로도 모자라 주일재 앞에는 방형의 사우단을 조성하였다. 방형으로 돌출된 형태의 사우단은 梅,松,菊,竹를 심어 주인장의 기개,절개,고매,유유자적를 대변하고 있으며, 연못속에는 연꽃을 가꿔 낙향한 처사지만 주돈이의 애련설에서 유래된 군자의 도로 살아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일천한 안목의 내눈에도 서석지는 유교에 충실하며,절제되고 엄숙한 삶과,자연에 빠져 여유로운,세상살이에 초연한 마치 달관한 생활을 추구하며 살겠다는 어쩌면 이중적(?)인 주인의 면면이 엿보인다면 건방진 생각인가? 하긴 과거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연과 벗하며 학문과 인격도야로 단장해버리면 너무도 멋진(?)조화겠지만...
우선, 유교적 자세를 견지하겠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연못속의 연,사우단의 매,송,국,죽 외에도 향교,서원의 입구에서 서원목으로 많이 심는 은행나무의 상징성이 은행알처럼 많은 후학이 배출되기를 염원해서 조성되는 것이라서,정원수라기보다는 내눈에는 서원목으로 비쳐지더라!
하지만 무엇보다도 유교의 생활에 충실하겠다는 주인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것이 敬亭의 "敬"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유교의 시작과 끝이 敬이라 하지 않았는가? 산림처사 남명 선생의 남명학의 두줄기도 敬과義이며 퇴계에게서 仁을 배웠지만,남명 문하에서 수업한 한강 정구의 회연서원의 동서재도 明義齋, 持敬齋며 소수서원 입구 바위에도 敬이란 글자를 음각해 놓은 것이다.
"경이직내敬以直內 의이방외義以方外"
"경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
자연과 벗하며 유유자적, 안빈낙도의 삶을 지향함은 갖가지 이름의 서석---仙遊石, 祥雲石,魚狀石---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사우단 건너 꽃덤불 속에 묻혀 있는 詠歸가 새겨진 표지석을 발견하고는 주인장의 초자연주의 관점을 확신할 수 있었다.
詠歸는 공자의 제자 증점(?)이 기수(?)에서 목욕하고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는 것에서 따온 말로 晩歸,舞沂와 같은 의미로 유유자적한 삶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연잎에 빗물이 굴러가는 어느 여름날 다시 오리라 다짐하며...
2005.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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