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화순군

[스크랩] 최경회와 논개 / 화순 충의사당

임병기(선과) 2008. 6. 6.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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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읍내에 이를 무렵 도로가에 화려한 치장을 한 사당이 보인다. 박정희 정권시 무신 우위의 부산물
임을 쉽게 알 수 있는 화순에서 태어나 진주성 전투에서 산화한 충의공 최경회를 배향한 충의사다.
"최경회는 부친과 송천 양응정, 고봉 기대승에게서 수학하여 진사와 문과에 장원하였다. 성균관전
적을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을 거쳐 옥구, 장수현감, 영해부사, 영암군수, 담양부사를 역임
하였다. 선생의 높은 인덕 은 부임지마다 선정을 베푸니 주민들이 선정비와 생사당(초상화를 모신집
)을 지어 기념 할 정도였다." 
선생의 이력을 살피다가  선생의 모친이 평택 임씨였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 것은, 대부분의 족보가
여자의 이름은 등재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내가 몰랐던 우리 평택임씨 가문의 자랑스런 할머니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선생의 이력을 화순군청 홈에서 옮기면 "1590년 모친 평택임씨의 임종으로 화순에서 있을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이에 큰형 경운, 둘째형 경장과 더불어 고사정이 있는 화순 삼천리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했다. 
5백여명의 의병으로 하여금 조카 홍재에게 인솔케 하여 고경명 장군의 휘하에서 싸우게 했다. 금산전
투에서 고경명 장군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자신도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전투와 무주대첩에서 
혁혁한 전승을 거두웠다. 
진주성이 왜적에게 포위되었다는 경상우순찰사 김성일의 구원요청을 받은 최경회 의병장 은 진주성 
구원의 결정을 내렸는데 이때 일부가 '호남을 버리고 머나먼 영남을 구하러 가는 일이 옳지 못하다'고 
하자'호남도 우리땅이오 영남도 우리땅인데 의로써 뭉친 우리들이 어찌 멀고 가까움을 가리겠는가'하
며 진주성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경상우병사에 임명된 후 첫번째 진주성 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하였으나 두번째 전투 에서는 물밀듯 
밀려오는 왜적에 대항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그러면 최경회와 논개는 어떤 사이였을까?
여기서 논개의 출신이 진주, 또는 생가 성역화가 끝난 장수이냐는 별개로 하고,아직도 논란이 끝없이 
지속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가장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주논개와 최경회의 관계를 보면...
"장수땅 대곡리 주촌마을이 그녀의 고향이고 성은 주(朱)씨이다. 
태어나기를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 곧 개해 개달 개날 개시에 태어나서 논개라는 이름을 붙였
다고 한다. 논개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외삼촌 집에서 자랐는데 건달인 외삼촌이 
그를 지방 토호에게 첩으로 팔려고 했다. 
이에 논개가 어머니와 함께 장수 현감인 최경회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논개 모녀로부터 전말을 
들은 최경회는 이들을 무죄방면하였다. 이후 논개는 관아에 머물며 병약한 최씨 부인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논개의 재색에 감탄한 현감 부인이 최경회에게 논개를 소실로 맞이할 것을 권유한 뒤 지병으
로 숨을 거둔다. 
이렇게 해서 논개가 18세 되던 해 1591년 봄, 최경회와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회는 진주 병사로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였다가 패하게 되자 강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국내에서 주논개가 진주 또는 장수 출신라고 서로 이전투구를 벌이고, 최경회와 부부의 연을
맺었니, 안맺었니로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사이 주논개가와 함께 남강에서 죽은 왜장의 소첩,영혼을
달래는 신으로 일본땅에서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이, 일전에 KBS보도로 세상에 알려졌으니 역사 왜곡
은 어제 오늘일 아니지 않은가?
화가 치밀지만 그와 관련된 경남일보의 기사를 보자!
"임진왜란 때 기생신분으로 위장해 적장을 껴안고 순국한 충의공 최경회의 부실 주논개의 영혼을 
그녀에 의해 살해된 왜장의 아내로 둔갑시키는 파렴치한 진혼제가 23년 전 일본 후쿠오카 현 다카와 
군의 보수원이라는 작은 사당에서 열렸다. 이 행사에는 경남 진주시 문화원장 등 진주 지역 인사와 
당시 후쿠오카 한국 총영사와 일본의 지역 인사들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행사를 주관한 일본인 우에쓰카 하쿠유 씨는 겉으로는 논개를 추모하는 듯 했지만, 실제로는 왜장 
게야무라와 논개를 영혼 결혼시킨 뒤 보수원 사당에 나란히 봉임함으로써, 자신이 흠모해 온 사무라
이 게야무라의 원혼을 달래는 파렴치한 행각을 벌였다.  논개는 일본인에 의해 왜장과 영혼식을 하여 
부부가 됐을뿐 아니라 일본인들에게 부부금슬을 좋게하는 잡신으로 전락하는 어이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82년 논개의 영정이 보수원에 왜장과 나란히 놓여 있다는 사실이 국내에 처음 알려지자 최홍진 ‘해주
최씨 광주·전남 종회’ 대표와 최경진·최길주· 최재양 씨 등  ‘해주최씨 화순 종회’ 대표단 4명은 
지난해 8월 일본 후쿠오카 보수원 현장을 방문해, 이같은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 우에즈카 씨를 면담
했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논개 부인 영정과 초혼해 간 논개 부인 영혼 반환, 장수와 진주에서 가져간 
묘비석과 모래·흙 반환, 한·일 합동 위령제 폐지 등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보수원의 우에쓰카 씨는 논개의 영정은 돌려줄 수 있지만 논개의 영혼은 돌려줄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텼다. 외교통상부와 후쿠오카 총영사관과 진주시와 장수군은 민간단체간의 사안이기 때문
에 관여할 뜻이 없다고 밝혔고, 특히 작년 장수군은 보수원에 최경회 장군의 영정까지 모시면 되지 
않느냐”라고 실언해 한동안 구설수에 올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논개가 왜장의 아내로 둔갑한 것은 피가 거꾸로 솟을 만큼 한국의 얼에 손상을 입은 것이지만, 그녀
의 영정과 가묘가 일본인에 의해 관리되어 왔다는 사실은 더욱 놀랄만한 일이다. 
일본은 많은 사원들을 보유하고 영웅적 인물들을 후세에도 오래토록 추앙받도록 일련의 노력들을 
끊임없이 펼치고 있다.  그에 반해 국내의 실정은 어떤가?  오래도록 기려야할 훌륭한 선조들이 너무 
쉽게 잊혀지는 것은 아닐지..." 
기가 막히지 않은가?
최경회 선생을 배향하는 충의사에는 주논개가 어떤 모습으로 모셔져 있는 지 모르지만, 논개 사당이 
있는 진주성 밖에 세워진  수주 변영로의 시 한편으로 그녀의 원혼을 조금이나마 달래야겠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2005.03.22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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