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화순군

[스크랩] 기묘사화 / 화순 능주 조광조 적려유허지

임병기(선과) 2008. 6. 6.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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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 적려유허지 문을 들어서며 약 500년 전의 기묘사화를 되돌아 본다.

"1519년(중종 14) 11월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재상에 의해서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김식(金湜) 등 신진사류가 화를 입은 사건.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유교적 정치질서의 회복과 성리학의 장려에 힘썼다.

점차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신진사류 중 조광조는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 유숭조(柳崇祖)의 도학정치론에 감화된 신예학자였다. 중종의 신임을 받은 조광조는 성리학으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고대 중국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이른바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과거제의 폐단을 혁신하기 위해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여 미신타파에 힘쓰며, 향약을 실시하는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의 이상주의적인 왕도정치는 그 구현과정에서 급진적인 면이 적지 않아 훈구세력과 대립하게 되었다.
성리학을 지나치게 숭상한 나머지 사장(詞章)을 배척하여 남곤·이행(李荇) 등의 사장파와 반목하였고, 청렴결백과 원리원칙에 입각한 도학적인 그들의 태도는 기성세력을 소인시함으로써 훈구재상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조광조일파에 대한 훈구세력의 불만은 1519년에 있었던 반정공신 위훈삭제사건(僞勳削除事件)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중종반정공신 가운데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공신호를 삭탈하고 토지와 노비를 환수한 사건이었다.
이때 소인배로 지목된 남곤과 훈적에서 삭제당한 심정 등은 조광조의 탄핵을 받은 바 있는 희빈홍씨(熙嬪洪氏)의 아버지 홍경주와 손잡고 조광조일파를 몰아낼 계략을 꾸며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19년 11월 조광조일파가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그 죄를 밝혀주도록 상계를 올렸다.

그 결과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가서 곧 사사되었고 김정·기준(奇遵)·한충(韓忠)·김식 등은 귀양가서 사형 또는 자결하였다. 그 밖에 김구(金絿)·박세희(朴世熹)·박훈(朴薰) 등 수십명이 귀양가게 되고 이들을 두둔한 안당과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형제 등은 파직되었다.
이 사화에 희생된 조신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한다. 기묘사화는 무오사화와 같이 훈구파와 신진사류간의 반목·배격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정치적 음모가 유효하였던 정쟁이었다는 점과 갑자사화와 같이 정치적 투쟁목적과 이념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 특이성을 찾아볼 수 있다."..empas blog에서 발췌


중종의 사림파 기용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왕위에 오른 중종(1506-1544)이 추구한 정책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왕도정치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연산군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이 약화됨에 따라서 그 주위에 외척과 훈구파를 중심으로 한 문벌세가들이 왕실을 좌지우지하여 국가 기강이 문란해졌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가 훈구파를 이용하여 왕위에 오른 것은 시대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당시 개혁파라 할 수 있는 사림파는 중앙에서 완전히 배제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의탁하여 반정을 일으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중종은 일단 훈구파의 세력을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중종은 일단 왕위에 오르자 유교적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 당시 사림파의 거두인 조광조를 과감하게 중앙 관직에 등용시켰다. 중종은 성종이 보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당시 사림들을 대거 기용한 것을 본받아 반정을 주도하여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훈구파를 약화시키기 위해 사림파 인물들을 등용했던 것이다."..daum에서


기묘사화의 정점인 정암은 어떤 인물인가?

"조광조는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던 인물이다. 그는 벌써 20대 초반에 사림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 때문에 조광조는 갑자사화 때 이배되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그는 정권이 바뀐 뒤 1510년 29세의 나이로 진사 회시에 장원으로합격하여 정계에 진출한 뒤 뛰어난 학문과 인격으로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515년, 조광조는 성균관 유생 200인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랐다. 이를 계기로 중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게된 조광조는 마침내 주요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막강한 실력 행사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언로의 활성화, 향촌의 상호부조 장려로 서민들의 복리 증진, 미신 타파 등을 건의하면서 특히 현량과를 설치하여 세로운 인재들을 과감히 기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인물'은 당연히 사림파의 청년들이었다. 이에 따라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내려 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으며 여기서 훈구파와 사림파가 다시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현량과라는 제도를 신설함으로써 사림파 인물들이 대거 중앙에 등용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현량과는 한마디로 말해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물을 특채 형식으로 판단하여 뽑는 제도이다.

즉, 기존의 사장 중심으로 뽑아 부조리가 많던 과거제도를 과감히 개혁하여 인재를 임금이 필요한 인물 중심으로 뽑았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조광조의 천거가 크게 작용했다. 현량과로 등용된 인물들은 대체로 30대 소장들이거나 20대 청년들이었다. 이들이 왕도정치를 주장하며 현량과를 통하여 중앙 관직에 계속 오르자 훈구파는 상대적으로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현량과 폐지문제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 세력간의 대립과 반목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며 사림파의 혁신정치에 반감을 가진 훈구파들이 이들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일어난 것이 기묘사화이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갈 것은, 양대 세력의 싸움은 단순한 정파 다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고려 이래로 장려된 사장을 중시하는 것이 훈구파(그래서 사장파라고도 부른다.)이고 청렴결백과 원리원칙에 입각한 도학을 추구하는 것이 사림파라는 점에서 사상적인 대립이라고도 볼 수있다. 즉 이때 벌어진 양 세력의 알력은 이념적 차이를 바탕으로 하여 정권 장악을 놓고 일대 격돌이 벌어진 면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daum에서

사림과 훈구파의 사상적 차이는?

"훈구파(관학파)...사장중심(시와 문장능력),성리학 이외도 포용,부국강병,실리추구,중앙집권추구, 민족자주적 사관, 법치주의,혁명파 사대부의 후예/15세기 주역,인재양성( 관학, 성균관)

사림파(사학파)...경학중시(유학의 깊이),성리학 중심,명분과 도덕 의리 숭상,향촌자치 추구,사대주의적 사관,왕도정치,온건파 사대부의 후예/16세기 이후의 주역,인재양성(사학,서원)"...naver에서


한시대 조선사상계, 정권의 실세였던 정암이 유배온 후 40일 만에 사약을 받고 생을 마친 유허지는 영정각과 "적중거가"현판이 걸린 초가,사후 100여 년 뒤에 세워진, 마치 자연석 같은 귀부에 "정암 조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가 내방객에게 기묘사화의 교훈을 시사하며 서있는 적소에는, 사약을 받으면서도 중종을 향한 마지막 유언이 적소를 맴돌고 있는 듯하다.


愛君如愛父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憂國如憂家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 걱정하듯 하였네
白日臨下土 하늘이 이땅을 굽어보시니
昭昭照丹衷 내 일편단심 충성을 밝게밝게 비추리

2005.03.22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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