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강진군

[스크랩] 남도땅 답사 1번지 / 강진 다산 초당

임병기(선과) 2008. 6. 6.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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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 나루를 건너고 과천을 지나, 금강을 건너서 약용과 약전은 나주 율정점에 이르렀다. 이곳은 목포와
해남으로 길이 갈리는 삼거리였다.약용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고 약전은 이별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는 사람처럼 초연하기만 하였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보게 될는지 기약도 없었다.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할 만도 하건만 두 형제는 서로 약속이나 한듯 말이 없었다.]
1801년 황사영 사건으로 약전은 흑산도로, 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도중 나주에서 이별하는 장면이며 이것을 
마지막으로 살아 생전에 형제는 만나지 못했다.
[약용은 월출산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면서 누릿재를 넘는 중이었다."꼭 도봉산 같구나" 형리와 대화에 몰두
하느라 힘든 줄도 모르고 누릿재를 넘어 강진 땅에 도달했다. 동헌에 당도해 정배 보고를 끝낸 수행 형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죄인인 약용에게 따뜻한 처소가 마련되어 있을리 없었다. 약용은 어두운
길을 터벅거리며 주막을 기웃거렸으나 귀양 온 죄인이라 하여 박대를 받아야만 했다. 손님이 끊긴다는
이유에 서였다.]
강진읍내에서 처소를 구하지 못한 다산은 후에 1805년 혜장이 마련해준 보은산방으로 옮기기 까지 읍내의 
주막에서 4녀년을 단칸 오두막을 얻어 사의재라 이름짓고 공부에 열중하였으며 해남의 외가댁에 가서
수시로 책을 빌려 왔지만 유배초기의 약용의 외로움은 뼈속을 후비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시가 전해 온다.
북쪽 바람 눈 휘몰듯이
나를 몰아 붙여
머나먼 남쪽 강진의
주막에다 던졌구려
다행스럽게도 나지막한 산이 있어
바다 모습 가리웠고
우거진 대숲이 
가는 세월을 알려주는구려
옷이야 따듯한 곳이라서
겨울에도 덜 입지만
술은 근심 때문에
밤마다 양이 느는구려
나그네 근심 더는 일
한가지 있으니
동백나무가
설도 오기 전에 꽃을 피웠네.
남자가 어려울 때 찾는 것이 술과 여자 아닌가? 그런데 다산은 초인적인 능력만큼이나 남녀관계도 인내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초인의 면모가 아니라 성기능 장애일텐데, 하여 위의 소설에 등장하는 두여인을 살펴보자!
물론 픽션임을 전제로 "소설 목민심서-삼진기획-1992- 황인경 작가"의 글을 발췌해서 옮긴다.
[처음 뵙겠사옵니다.비안이라고 하옵니다.공손히 절하는 비안에게 약용은 고개를 약간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았다. 동백기름을 발라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곱게 벗어넘긴 비안의 머리가 호롱불에 유난히 
반짝였다. 눈이 부실 지경인 비안의 고른 이목구비를 바라보던 약용은 자신도모르게 마음의 동요가 이는 
것을 느끼고는 내심 당혹해 하였다]
주막에서 머물던 약용에게 해남에서 외사촌(?)인 윤서유가 찾아와 오랫만에 회포를 푸는 자리에서 약용은
비안이라는 기생을 알게되고 윤서유의 청과 약용에 매료된 비안과의 잠자리가 이루어 지는데...
[(방 밖에서)누구에게도 옷고름을 맡긴 적이 없다는 걸 내 익히 아네만, 따뜻한 온기로 약용을 감싸줄 
수 없겠는가? (윤서유의 청을 들은 비안은) 소리없이 방안으로 들어선 비안이 바람결처럼 살며시 약용 
곁에 와 앉았다."나으리 진작 뵙고 싶었사옵니다". "자네가 날 어찌 안단 말인가?" 비안의 볼에 보조개가 
패였다. 이윽고 약용은 비안의 부축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희고 정갈한 이부자리가 깔린 비안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온 방안에 그녀의 향긋한 체취가 가득 차 있었다]
그 이후 일은 우리 님들의 상상에 맡기고,여하튼 약용은 비안을 알게 되었지만 후일 비안 때문에 강진 
사또에게 혼이 나게 되며 출옥후 주막에서 다산과 함께 머물며 허드랫일을 하던 가실의 지극 정성으로 
몸을 가누게 되는데,가실과 다산의 운우지정을 나누는 장면으로 들어가보면...
[약용은 가실의 손을 덥석 쥐었다. 그녀의 무구한 눈을 들여다보면서 약용은 한없는 연민에 사로잡혔다. 
미세한 경련과 함께 되돌아 오는 슬픔이 가실의 가녀린 손목에서 전해져 왔다. "사내를 아느냐?" 가실은 
귀밑가지 빨개졌다. 한란처럼 청순하고 아름다운 그녀는 떨고 있었다. 그러나 부끄러움 이상으로 그
녀에게는 젊음이 고공치고 있었다. "아니어라......" 약용은 그녀에게서 생명 이상을 존귀한 영을 느끼고 
있었다. 약용은 가실을 안았다. 밖에는 개구리 우는 소리가 요란했고 보름달이 창문을 교교히 비치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가실은 사라졌고, 그녀는 종의 신분이었지만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환의 동생 홍인환의 
증손녀로 역적으로 몰려 가문은 풍지박산되고 가실은 관노로서 잡혔다가 도망간 신분이었으며, 나의 
오래된 기억으로는 다산과 그녀의 사이에서 태어난 여식이 있었다고 알고 있다.
세월은 흘러.......................
다산은 백련사의 기승 아암(혜장)이 마련해준 고성암 보은산방과, 제자 이학래의 집에서 학문에 정진하다 
외가쪽 사람인 윤단이 마련해준 산정, 즉 다산으로 옮겨와 유배생활 말기 11년을 이곳에서 지내며, 그의 
학문이 완성된 곳이 '다산초당'이다.
2005.03.21
뭇사내 세놈이 귤동 입구에 내려 한적한 마을에 커피향,니코틴 향을 품어 내며 다산으로 향한다.
그런 익숙치 않은 향기에 매화,동백도 고개를 돌리건만 그 향보다 더 지독한 저자거리의 썩은 냄새를
발산하다, 급기야 작년에 선운사에 들리고도 동백꽃도 못 본 나의 색약에 이르서는 완전히 고참도 모르는
하극상의 표현이 난무한다.
다산의 저서를 보고도 촬영용, 전시용이라 겁없이 떠들다가, 다산사상에 일가를 이룬 박석무 전 의원 이야기
에서는 겁을 상실하고 잘생긴 우리의 용모를 마음 껏 자화자찬하며, 다산이 수없이 아침저녁 왕래한 길을
오르며, 다산의 초인적인 능력을 안주 삼아 폄하하기에,  입속은 舌上加相, 舌往舌來, 분주하다. 그것은 
폄하가 아니라, 다산의 인간적인 면모를 찾는다는 허울좋은 사고의 하향평준화로 단장하고서...
제자들의 기숙,강학 공간인 서암, 다산의 방대한 저술의 산실 서암,인공섬인 석가산이 가운데에 있는
연지 위로는 인공적으로 폭포를 조성했으며, 초당 앞의 다조, 뒤의 정석 글씨...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다산초당의 모습이나 기와를 초가로 단장했으면 하는 바램은 지울 수 없다.
'다산초당' 글씨는 추사의 글을 집자했다고 하지만,추사가 정다산을 보배로 여긴다는 의미의 '보정산방' 
글씨는 유홍준 교수나 여타 책에서는 추사 중년의 맛이 나기 때문에 다산이 1818년 해배 이후의 글로 보는데, 
작가 황인경 씨는 1816년 추사가 초의와 함께 다산을 방문해서 남긴 작품이라 표현하고 있다. 혜장 입적 
후 제자인 초의가 추사와 교분이 있었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나 추사와 초의는 동갑이며 다산보다 24세 
년하여서 1816년 이면 추사의 나이가 31세임을 미루어 보면 서로 편년의 차이가 크지만 그건 나의 몫이 
아니기에 넘어가야겠다.
초당 마루에 헥헥거리는 숨결을 고르며 걸터 앉아서 
-.유현아! 니는 여기서 공부했겠냐?
-.공부밖에 할게 더 있겠슈?
(물어보는 내가 잘못이지)
한자 배우고 오솔길을 걸어 혜장선사와 내공을 겨루는 재미 쏠쏠 했을 겁니다. 이 촌구석에서 자기를 
알아주고 심지어 스승으로 까지 모셨으니...
-.글쎄? 나 같으면 무협지나 읽고,오늘날 옐로우 표지의 패관문학에 심취했을것 같은데...
-.어련하겠슈!
1811년
[백수(栢樹) 공부를 누가 힘써서 할 것인가
 연화세계는 이름만 있는 것인지
 광포한 노래들이 근심 속에서만 불려지고 있으니
 맑은 눈물이 술만 취하면 흘러 나오네
다산초당에 기거한지 몇년 후 1805년부터 그렇게 교분히 두터웠던 석학이자 고승이던 혜장이 주독(?)으로 인해 
세상사를 접자 다산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다산에게 차를 알게해주었던 혜장의 죽음 이후 다산의 저술활동은 더욱 왕서해져 목민심서를 비롯 대부분의 
책들이 이시기부터 1818년 해배될 때까지 완성된 것이 사상의 정립 못지 않게 혜장의 영향도 없다고 볼 
수 있겠는가?
[1818년,다시 세상은 흘러 다산이 해배되어 마현으로 갈즈음 예쁘장한 보따리를 든 처녀가 다산을 찾아왔다.
"누구냐"  설희라고 허는디요" "무슨일로 왔느냐" "네가 어째서 내게 관심을 두었느냐"기억을 더듬어
말을 마친 약용이 갑자기 처자에게로 바투 앉으며 물었다. "혹시,가실이라는 여자를 아느냐" 순간 눈물
가득한 처자는 "야,즈이 엄니여라우"]
.......
2005.03.21
흑산도에 유배간 형 약전이 그리울 때 마다 구강포를 바라보았던 기슭의 천일각이란 정자에서 사진을 
박으면서 옛님 카페의 목민관인 내가 우리의 백성을 위하여 예전의 맛을 느껴보라는 사려깊고, 하회와 
같은 넓은 마음으로, 성은을 베풀어서 넌지시 "야! 젊은 너희 둘은 이 오솔길을 걸어 백련사로 오거라!" 
했다가 동시다발, 스트레오로 욕을 먹었다. 
목민관의 뜻도 헤아릴 줄 모르는 아둔한 백성들이여!!! ㅋㅋ
2005.03.21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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