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부여군

[스크랩] 부여 / 무량사...백제계 가람의 흔적

임병기(선과) 2008. 6. 6.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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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산에 무량사...
만수산(萬壽山)이 있기에 무량사(無量寺)를 창건했을까?
아니면 무량사를 창건 후 만수산으로 불려졌을까?
의미를 가져봐야 공허한 메아리만 뇌리를 울릴즈음 참한 객을 반기는 당간지주를 거쳐 천왕문을 
지났건만 사찰의 일반적 전형인 루가 보이지 않고 무량사의 중정이 전개된다.
산지 가람이면서도 진입로가 짧고, 신라계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석축으로 이루어진 축대가 없어
평지가람의 형식을 따른 백제계의 가람임을 알 수 있지만, 잡생각에 구속된 나를 광명의 세계로 인도
하려는 듯이, 석등의 시원으로 회자되는 팔각원당형의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과 흡사한 석등이,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집착하는 나를 질책하고 있다는 죄의식에 빠져 화창에 불하나 밝히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사찰에서는 일반적으로 석탑을 조성하지 않는 것이 전형이나 교리의 해석은
차치하고 참하고, 아름다운 백제(단층기단,목탑의 흔적), 신라(낙수면의 홈)의 양식이 혼재한 
익산 왕궁리의 탑과 닮은 오층탑 네모서리의 풍경소리와 탑신에 흔적이 남은 장식물의 흔들림을 
좇아 보지만 언감생심 듣고, 볼 능력이  내게 있을 턱이 있을소냐!
2층의 극락전 앞에서 잡생각을 해본다.
삼국시대,고려,조선초 까지도  "불전을 장엄하게 하고, 불탑을 만드는 것이 최대 공덕이라고 여겨
경제력만 허용한다면 불전을 크고 화려하게 건축하는 것이 모두의 염원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큰 사찰에서는 불전을 2층으로 하였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중창을 하는 과정에서 호남과 충청에만 2,3층
불전을 중수하게 된 까닭은 뭘까?
물론 불전에 모신 부처가 크다는 이유도 있지만 조정의 재정적 지원이야 미미했을테니, 많은 
전답을 가진 지주들의 보시가 주요 재원으로 보면 호남과,충청 지역의 백성들이 신심이 더 강했다고 
여기면 난 역사소설가 일까?
다소 산만하게 보이는 가람 배치지만 2층 통층의 극락전은 소조불로 알려진 거대한 아미타불을 
주불로 관음,대세지 보살이 협시불로 모셔져 있으며,덤벙주초에 배흘림 기둥,내부의 고주의 배열과 
들보의 조화 등 고건축의 맛을 진하게 우려낼 수 있는 전각인데,난 진한 맛은 고사하고 차려진 
밥을 먹지도 못하고 왔으니...
(다녀온 후 어떤분의 답사기를 보았더니 기둥의 하나는 칡뿌리 기둥이라 한다)
개울건너에 위치한 산신각을 거쳐, 아무런 장식도,현판도 없는 전각에 덩그러히 걸린
매월당의 영정 앞에서 역사속으로 타임캡슐을 타고 싶지만,저녁놀 무렵의 폐사지를 보고 싶어 
산문을 나왔다.
2004.04.19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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