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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시절 부터 친구놈의 고향이기에, 문화유산에 눈을 떠고도 숱하게 다녔지만 아직 답사기는 고사하고 흔한 여행기 한 줄 없는 대가야 땅 고령, 그 고령을 답사하기 위해 아침부터 아들놈을 구슬렸다. 이제 고령은 나에게는 타향이 아닌 어쩌면 고향같이 정겨운 것이 마누라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 때문이겠지? 그런 유쾌한(?) 생각을 자식놈에게 설을 풀면서 처가동네와,처외가를 지나 개진면 개포리에 다다른다. 개진(開津),개포(開浦)란 이정표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 낙동강과 깊은 내력이 있을 것이며, 예전 어느 시절엔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선단들의 중간 기착지로 화려한 영화를 누렸겠지만, 아마 답사 매니아들, 특히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 쯤 귀에 익은 지명이지 않은가? 그렇다! 전란을 피하여 강화도 전등사의 대장경판을 바다를 거쳐 낙동강 하구 김해를 통하여 해인사로 운반하기 위해 이곳 개포까지 수운한 후 해인사까지 머리에 이고지고 공력을 지었던 곳이다. 그로인하여 지명도 본래의 개산포((開山浦)에서 대장경판을 이송 후 개경포(開經浦)로 바뀌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쪽바리 놈들이 민족정기 말살의 일환으로 경(經)을 빼고 개포라 불렀다 하니 이래저래 역사의 한페이지에 아픔과 애환을 간직한 개포 땅이다. 무지하게 큰(?) 안내이정표를 보고 길을 접어들었지만 도무지 찿을 길이 없다. 겨울이라 들에서 일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아, 마을을 들락날락,산길 임도를 한없이 오르고, 기어코 아들놈이 한 소리 한다. ' 도데체 0.8km 기준이 뭐야!!!' 몇차례 시행착오도 답사의 맛이라고 떠드는 나도 짜증이 날 무렵 거름을 나르는 촌부의 설명으로 맨처음 들렸던 그 마을 뒤에 있는 관음보살을 친견하였다.
화려한 보관을 쓴 일반적인 관음보살을 상상한 사람들은 눈이 뒤집혀 질 형상의 좌상은 뒷면의명문에
의해 고려 성종 4년 985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나,장방형의 바위를 다듬은 후 얕게 눈사람처럼 두광,
신광배를 두르고 보관대신, 화불인 아미타불을 새긴 정자관을 쓰고 눈 코 입이 다소 작으며,예의 코에는
아들을 바라는 사람들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안내문에 의하면 토속화된 지방장인의 작품이라하지만 985년이면 고려초기이며 불교가 가장 꽃피던
시절이었을텐데 어찌 보살의 머리에 정자관일까?
혹?
사찰이 아니라 무당집에 모셔 놓았던 석조관음 보살은 아닐까?
요즘도 산신각의 산신 머리에 정자관을 쓴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 무속인의 집 벽화에도 정자관을
쉽게 찿을 수 있으니 그럴듯한 추리가 아닌가?
2004.02.28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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