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고령군

[스크랩] 고령 / 점필재 김종직 종택

임병기(선과) 2008. 6. 6.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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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림 들판의 딸기 비닐 하우스 물결을 스쳐 지나가며 잠시 대가야를 생각해보지만 한나절의
여정으로 어찌 대가야를 순례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는 자책감에 맘이 편치 않다.
양전동 청동기 유적,지산동의 후기 가야왕국의 고분군,지산동 당간지주,반룡사 다층탑을
비롯한 신라의 유적,개포리 관음보살,고려벽화등 선사이래 수없이 명멸해간 이 땅의 민초의
삶은 열흘의 여정으로도 모자랄 것이나..., 이런저런 잡념은 쌍림면 합가리의 점필재
선생의 종택 솟을대문 홍살문 앞에 벗어두고, 우리 유교사 아니 사림의 큰 줄기인 선생를 
떠올려본다.
점필재 김종직
[본관은 선산(善山). 자 계온(季渟) ?효관(孝본). 호 점필재(粘畢齋). 시호 문충(文忠). 경남 밀양 
출생. 1431년 (세종 13년)에 아버지 숙자와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밀양 대동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선산 영봉리 사람으로, 동향인 길재의 성리학을 이어받아 아들 종직에게 전수하여 뒤에 
영남학파의 종주로까지 이르게 하였는데 숙자는 밀양의 박홍신의 무남독녀에게 장가 들었다가 
장인 박홍신이 대마도에 나아가 싸움터에서 전사하자 밀양 처가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종직을 낳았다. 
16세때 향시에 응시하였다가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크게 분발하여 21세에 금산 봉계의 현감 
조계문의 딸을 맞아 결혼함으로써 김천과 깊은 인연을 맺고 김맹성과 공부하고, 이듬해 2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여 주역등 경전을 탐독하였다. 
25세에는 세조 즉위를 축하하는 증강시에 중형 종석과 함께 응시하여 형제가 모두 합격하였으나 
이듬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밀양으로 내려가 장례를 치르고 복상여묘하였다. 
29세에 형 종석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로써 벼슬길이 열려 곧 근지영문원부정자에 제수되었는데 그 문명이 조정에 널리 알려져 형과 
함께 한직을 주어 금산 출신의 허종, 이숙감을 비롯하여 어세공, 이극균, 어세결, 민수, 정효상, 
이영근 등을 선발하여 사가독서케 하였다. 
이때부터 문명으로 유명하여 각종 책문을 임금께 올릴 정도이었다. 세조는 학문을 권장하는 
방책으로 대표적인 연소한 문신을 뽑아 한직에 제수시키고 예문관의 직까지 겸하게 하여 매일 
번갈아 토론 강습토록 하였는데 여기에서도 종직은 이파, 정간종, 이맹현, 김종연, 어세공, 
류문통, 정영통, 송춘림, 김순명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40세에는 성종이 즉위하여 재행이 겸비한 학자를 선발하여 예문관을 겸직케 하였는데 종직이 
이에 뽑혀 홍문관수찬 지제교에다 경연검촌관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얼마 안 되어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을 청하매 고향 가까운 함양군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군을 다스림에 있어서 성리학적 실천윤리를 실천하였고 춘추로 향음례와 양노례를 행하고 효제와 
주자가례대로 상제봉행을 권장하며 교육에 있어서는 길재, 김숙자의 교육방법 대로 소학을 기본으로 하였다. 
이러한 성리학의 윤리실천으로 학행일치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함양을 찾는 문하생이 
운집하였다. 수제자 김굉필, 정여창이 이때에 수학한 제자이다. 
공은 전라감사, 한성좌윤, 형조판서를거쳐 1489년 (성종 20년) 58세에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김천으로 돌아와 백천에 잇는 그의 집에 서당 경렴당을 짓고 학문과 후배양성에 전념하였다. 
1492년(성종 23년) 밀양 외가에 갔다가 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8월에 밀양에서 별세하니 향년 62세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을 사관인 김일손이 사초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이미 죽은 그는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며, 그의 문집이 모두 소각되고, 김일손 ·권오복 등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이 즉위하자 그 죄가 풀리고 숙종 때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 구미의 금오서원, 함양의 백연서원, 금산의 경렴서원, 개령의 덕림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畢齋集)》, 저서에 《유두유록(流頭遊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고, 편서에 《동문수(東文粹)》 《일선지(一善誌)》 《이준록(彛尊錄)》 
등이 남아 있다.]
종택이 있는 합가리는 전형적인 영남 반가의 모습으로 초가집이 거의 보이지 않고 거의 기왓집이며 
1800년경에 지은 종택은 현재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17대손인 김병식씨가 살고 있으며
사랑채 안채,중사랑채,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문충세가'(문충은 점필재 선생의 시호)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바깥 사랑채가  
한일자(-)로 막돌 헛튼층 기단위에 우측의 2칸 대청,좌측에 툇마루가 딸린 2칸의 방이 있으며 
초석위 기둥이 원주와 방주가 병존한 것과,큼직한 눈꼽채기 창이 달려 있어 영남의 일반적 사랑 
형태인 누마루가 없어 이채롭다.
사랑채를 돌아가면 튼 ㅁ자 형태의 전형적인 남부지방의 가옥형태를 한 눈에 볼 수 있으니
즉, 안마당을 마주한 정침 의 좌우에 고방채와 중사랑채를 두었고, 익숙치 않는 기단위에 
(마당 끝에 정원이 조성되었으며,마당보다 한뼘 높게 기단을 둔 후, 하기단 끝에서부터 다시
상기단을 쌓았다)
앞쪽이 개방된 2칸 대청의 좌측에는 전면에 쪽마루를 둔 큰방과 부엌을, 우측에는 전면에 
툇마루가 있는 작은방과 골방을 두었다. 
빈집을 허락없이 머무는 것이 죄스러워 소리죽여 가며 둘러본 집 뒤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집주인의 의도와 다른 잡념을 떠올리다 말고 불천위를 모신 사묘를 멀리서 살펴본 후 
잰걸음으로 종택을 빠져 나온 까닭은?
2004.02.29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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