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평창군

평창...월정사 낭원군 마애각자(회사거리 암각문)

임병기(선과) 2024. 10. 31.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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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원군 마애각자
월정사 승탑원을 지나 상원사로 향하는 첫 다리 건너기 전 우측 바위면에 있습니다.
낭원군 각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바위 향우측에 세로로 새겼습니다.

봉안사 낭원군(奉安使 朗原君)
계유 중동(癸酉 仲冬)
봉안사 낭원군이 계유년 한겨울에 새겼다는 글입니다.
 
봉안사는 실록 등을 사고에 봉안하기 위해서 임명된 사람을 일컽습니다.
낭원군(1640~1699)은 선조의 손자인 인흥군 영(瑛)의 아들입니다. 낭원군이 계유년(1693년)이 오대산사고와 태백산 사고에 선원록(선원보략)을 봉안하기 위해 이곳을 지나갔다는 기록입니다.
 
선원보략은 낭원군이 1679년 지어 숙종에게 받쳤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숙종실록 8권, 숙종 5년 2월 15일 경진 2번째 기사 1679년 청 강희(康熙) 18년
宗臣朗原君 , 彙集列聖世系、內外子孫, 目以《璿源譜略》, 具疏以進。 上覽而嘉之, 命刊出廣布, 特加資。
종신(宗臣) 낭원군(朗原君) 이간(李偘)이 역대 임금들의 세계(世系)와 내외 자손(內外子孫)을 모아 편집하여 《선원보략(璿源譜略)》이라 이름하고 상소를 갖추어 바치니, 임금이 보고 가상히 여겨 간행해서 널리 반포하라 명하고, 간(偘)의 자급을 특별히 가자(加資)하였다
 
선원보략(璿源譜略)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의 약칭. 조선 시대 구황실(舊皇室)의 족보(族譜). 숙종(肅宗) 7년(1681)에 처음 간행된 것으로 역대의 임금이 새로 즉위할 때마다 중교(重校)•보간(補刊)되었던 것을 고종 34년(1897)에 합가 하였음. 그 체제는 범례(凡例:편찬 방법 및 전편의 변경 사항)와 선원선계(璿源先系:시조 이한(李翰)에서 목조(穆祖)까지의 약술) 열성계서도(列聖繼序圖 :목조에서 편찬 당시의 왕•세자•세손까지의 계승도) 선원세계(璿源世系:편찬 당시까지의 내외•소생에 관한 약술)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중종 이후 각파를 형성하는 자손록) 등으로 이루어졌음.(네이버 지식백과)
 
*선원보략은 조선왕조실록에는 1679년 낭원군이 숙종에게 받쳤다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내용을 보완하여 2 년후인 1681년에 처음으로 간행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낭원군(朗原君)
조선시대의 왕실작가. 본명은 이간(李侃), 자는 화숙(和叔), 호는 최락당(最樂堂). 선조의 손자인 인흥군(仁興君)의 아들이며, 효종의 당숙이다. 왕실작가 중 가장 많은 시조작품을 남겨 총 30수의 시조가 전한다. 청구영언 진본(珍本)에만 20수가 전하고 나머지 10수는 여러 시조집에 산재하며, 작품에 따라서는 10여 책에 널리 유포되고 있다. 그의 작품이 효종의 작으로 오기된 것도 있다. 내용은 작가가 산수의 자연미를 혼자 즐긴다고 자부하는 노래로, 금서생활(琴書生活)에 낙사무궁(樂事無窮)함을 자랑하며 취흥이 도도하면 유령(劉伶) · 이백(李白) 이래로 혼자만이 흥취를 안다고 자랑하는 노래들로 자신의 풍류를 담고 있다. 한편 교훈적 내용의 작품도 많아 오륜과 향당의 예법에 관한 노래와 자신의 수분(守分)과 자행자처(自行自處)의 생활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표현기법에서 정철(鄭澈)이나 황진이(黃眞伊)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인다. 형 낭선군(朗善君)과 함께 전서 · 예서를 잘 써 송광사사원사적비(松廣寺嗣院事蹟碑) · 백련사사적비(白蓮寺事蹟碑) 등을 남겼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명하게 보입니다(현장 촬영)
 
낭원군은 오대산을 거쳐 태백산 사고에도 선원록(선원보략)을 봉안하였으며, 장도에 부석사에 들려 글을 남겼습니다.
 

저의 부석사 답사기 2편에 그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https://12977705.tistory.com/8725940

부석(浮石)에 새겨진 선원록봉안사낭원군(璿源錄奉安使朗原君) 명문
 

선원록 봉안사 璿源錄奉安使
낭원군 朗原君
계유 동 癸酉 冬

 

더불어, 미디어붓다 기사 중 낭선군에 관한 내용을 발췌하였다.
"낭선군[1637(인조 15)~1693(숙종 19)]은 옛 명필들의 글씨를 모아 서첩을 만든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의 편찬자인 선조(宣祖)의 손자인 이우(李俁)이다. 낭선군이 부석사를 온 것은 다름 아닌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에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동행한 인물이 바로 그의 동생인 낭원군 이간[朗原君 李偘(인조 18년(1640)∼숙종 25년(1699)]이다.
 
낭선군은 그렇다 치더라도 낭원군이 부석사에 왔음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모든 문제의 답은 현장에 있다. 무량수전 서쪽 ‘부석(浮石)’ 정면에 ‘선원록봉안사낭원군(璿源錄奉安使朗原君)’이라는 명문이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1681년 완간된 <선원록>을 1690년 태백산사고에 봉안하기 위해 각화사로 향하던 낭선군, 낭원군 형제가 부석사에 들러 무량수전 현판을 보고 공민왕이 친필임을 고증하였던 것이다."
 
*미디어 붓다 기사에는 낭선군 낭원군 형제가 동행하였다고 기사화했습니다. 그러나 낭선군은 1693년 4월에 졸 했으며, 부석사 바위 글씨는 1693년 한겨울에 새겼으므로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즉 낭선군은 그 이전(1679~1683)에 태백산 사고를 가면서 부석사를 들린 것 같습니다. 
 
조선왕조 실록
숙종실록 25권, 숙종 19년 4월 27일 경자 1번째 기사 1693년 청 강희(康熙) 32년

庚子/朗善君 卒, 年五十七。 仁興君 子也。 工篆隷, 有名於世。 諡孝敏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가 졸(卒)하였는데, 나이 57이었다. 이우는 인흥군(仁興君)102) 이영(李瑛)의 아들이며, 전서(篆書)와 예서(隷書)에 능하여 세상에 명망이 있었다. 시호(諡號)는 효민(孝敏)이다.
 
낭선군 이우의 생애(네이버 지식백과)
이우의 생애 전반에 대해서는 작고하기 전에 저술한 『백년록(百年錄)』(1692)이라는 자서전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1637년 음력 11월 11일 태어나 15세에 낭선군(朗善君)으로 봉해졌다. 1663년, 1671년, 1686년 세 번에 걸쳐 사은사(謝恩使)로 차출되어 북경에 다녀왔고 1665년 현종의 온양 온천 행행(行幸)을 호종하였다. 1674년 효종 비 인선왕후 영릉(寧陵) 조성 후 수릉관(守陵官)을 지냈고 1679~1683년에 『선원록(璿源錄)』 편찬과 봉안(奉安) 업무를 맡았다. 1688년에는 선온(宣醞) 의식을 거행하며 숙종의 명으로 종친을 대표해 시문을 지었다. 자손이 없어 전평군(全坪君) 이곽(李漷)을 양자로 삼았다.
 
그리고 낭선군은 귀로에 단양 사인암에 들러 이름을 새겼습니다.
 
사인암
https://12977705.tistory.com/8724296

사인암 낭원군 글씨(동호회 조용민 님 사진)

 
낭원군 朗原君
계유 동 癸酉 冬
봉화 태백산 사고로 향하던 길인지, 한양으로 돌아오던 길에 새긴 글인지 어떻게 알았냐고요?
월정사 글씨는 깊게 새기지 않고 부석사 글씨는 시간에 쫓기는 듯 거의 선각에 가깝습니다. 즉 선원보략 봉안이 끝나지 않아 여유가 없었음을 알 수 있으며,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귀경 길에는 느긋하게 여유가 있기 때문에 글씨를 깊게 새긴 것으로 추정합니다.

희미한 바위 글씨
선원보략을 오대산 사고에 봉안하기 위해 월정사를 거쳐간 봉안사 낭선군의 각자를 통해 숙종 재위 시절로 과거 여행을 하였습니다. 월정사. 사인암. 부석사 답사 기회기 되면 마애 각자를 확인해 보기 바랍니다.
 
2024.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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