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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안동시

안동...중대사지 승탑(부도)

by 임병기(선과) 2024.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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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산 중대사지(中臺寺址)

안동에 거주하는 이철숙 님이 중대사지에 승탑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탐문 끝에 위치를 파악하여 함께 동행하였습니다.

답사를 즐기는 사람들도 하회마을 충효당 앞 석탑이 중대사지에서 옮겨온 탑이라는 사실은 알고있겠지만 중대사지 답사 경험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중대사 창건과 폐사 시기는 정확히 전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회마을 충효당에 있는 삼층석탑이 고려시대에 세운 탑이며, 조선 시대 초기 학조대사가 출가한 절이라는 자료와  서애, 청음 선생이 중대사에 들렸던 글이 전합니다. 또한 대원사에 소장 중인 후불도를 비롯하여 불화 2점 화기에 1830년에 중대사에서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불교신문에는 1950년 한국 전쟁 때 전화를 이어 폐사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현재 중대바우(탕건 바우) 아래에 자리한 사지에는 3단 축대가 남아 있으며, 곳곳에 석물과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맨 뒤쪽 축대 뒤편 산죽

무너진 석축

사지에서 바라본 서미리

이 작은 산골에 서애 선생이 다녀가고 청음 선생이 머물고, 청음의 후손 김수증이 들렸습니다.

목석거 유허비

https://12977705.tistory.com/8728398

 

그리고

아래 불교신문 기사에 의하면 여기 어디쯤 중대사 절집 전각에는 선생들이 쓴 글씨가 걸려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신문( 이대형 동국대 불교학술원 부교수. 2024년 2월 1일) 발췌

 

1608년에 편찬된 안동의 읍지 <영가지(永嘉誌)>에는 다음과 같이 짤막한 언급이 있다.

“풍산현 북쪽 15리 오적산 남쪽에 있다. 옛날에는 상·중·하 3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중대사만 남았다.”

<영가지>에서 중대사의 위치를 오적산 남쪽이라고 하였고, 김상헌은 ‘학가산’으로 지칭하였는데, 현재 지도상으로는 보문산에 해당한다.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의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중대사’ 항목에는 유성룡(柳成龍)과 김상헌(金尙憲), 이유장(李惟樟)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유성룡은 오언율시로 ‘여름철 중대사에 머물며[夏日寓中臺寺]’(<서애집> 2)를 지어 중대사가 천 길 절벽 아래 자리 잡고 있어 여름철 더위를 쫓을 만하다고 읊었다.

문집인 <서애집>에는 누락되었지만 <선조필첩>(24면)에 남아 있는 유성룡의 편지에는, 중대사에 가서 여름철 더위를 피하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니, 김상헌이 자주 중대사에 가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유장은 ‘중대사 누각에서 삼가 서애 선생의 시에 차운하다 [中臺寺樓, 敬次西厓先生韻]’(<고산집> 2)라고 썼는데, 이로 보아 유성룡의 시가 중대사에 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상헌의 시도 중대사에 걸려 있었고, 이에 차운한 후손들의 차운시가 여러 편 남아 있다.

김상헌은 1637년(68세)에 친형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동 풍산읍 소산리로 내려가 지내다가, 다음 해에 관작이 삭탈되었다. 중대사가 언급되는 ‘서간 초당에서 우연히 읊다 [西磵草堂偶吟]’(<청음집> 3)는 1638년에 서미리에 머물면서 지은 것이다.

석실선생일각건(石室先生一角巾)
모년원학여위군(暮年猿鶴與爲群)
추풍낙엽무행적(秋風落葉無行跡)
독상중대와백운(獨上中臺臥白雲)

[근가유사, 명중대(近家有寺, 名中臺)]

석실 선생이 각건 하나를 쓰고서
모년에 원숭이·학과 무리를 이루니
가을바람 지는 낙엽에 인적 없어
홀로 중대사에 올라 백운에 눕네.

[집 근처에 절이 있으니, 중대사라 한다.]

문설주 홈인지 돌확인지.

문설주 홈

기와 조각

중대사 승려와 청음 선생의 집안의 교류는 손자 김수증의 화산기에도 실려 있습니다.

 

[김상헌의 시는 손자 김수증은 1686년(63세) 안동에 다녀온 기록을 ‘화산기(花山記)’(<곡운집> 4)에 남겼다.
“신촌에서 번촌과 신녕촌을 거쳐 서미동으로 들어가면 길가에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있으니, 은자암이다. 중대사 아래 도착하니 8~9채 인가가 있는데 예전에 있던 것이 아니다. 산기슭을 하나 돌아가니 옛터가 나온다. 왕고(王考)께서 무인년(1638)에 두 칸 작은 집을 지어서 방 안에 ‘만석산방(萬石山房)’ 네 자 편액을 걸고 방 밖에는 ‘목석거(木石居)’ 세 자 편액을 거셨으니, 모두 한산(韓山) 당숙의 필체다. 뜰에는 뽕나무 한 그루와 솜대 한 덤불이 있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어떤 개울과 어떤 언덕을 겨우 구별해 가며 중대사를 올라갔다. 승려 몇이 있어 술과 과일을 내오길래 잠시 선방에 앉았다가 사찰 누대로 자리를 옮겼다. 연전에 도문(道文) 승려가 청풍군재(淸風郡齋)로 나를 찾아와서, 내가 왕고의 ‘석실 선생이 각건을 쓰고’ 시를 써서 주었는데, 지금 이 시가 누대 벽에 붙어 있다.”

김상헌이 서미리에 목석거를 짓고 머물며 은거하던 때가 1638년, 손자 김수증이 그곳을 찾은 때가 1686년(63세)이니 그리 오래되었다고 할 수 없는데 이미 목석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사실 김수증이 도문 스님의 방문을 받기 이전에도 중대사 승려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다. 1660년(35세) 2월 20일 저녁에 풍산현 소산리의 야산인 소요산에 도착하여 친족들과 만나고 어릴 적 노닐던 곳을 살펴보았는데 마을이 영락해져 안타까웠다고 한다. 그날 저녁에 중대사의 노승 희신(希信)이 김상헌이 직접 쓴 시축을 들고 김수증을 방문했었다.]

(출처. 위 불교신문 기사에서 발췌)

청음 선생 집안과 승려들과의 친분은 학조대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위 불교신문 기사에 실려있습니다

 

[ 김상헌의 문집 <청음집>에는 승려 시집에 차운한 경우들이 보이므로 승려들과 교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상헌이 불교 친화적이고 후손들 또한 그런 성향이 다분한데 그 근원은 학조 대사라 할 수 있다.

학조(學祖) 대사의 속명은 영형(永衡)으로, <농암집> 권35 부록의 ‘세계(世系)’를 보면 신(新)안동김씨의 시조 김선평의 11세 김계권의 아들로 기재되어 있다. 안동 학가산에서 남서쪽으로 30여 리 떨어진 풍산읍 소산동에서 태어나, 학가산 애련사 또는 중대사에서 출가했다고 한다.

학조 대사는 현재 안양시 삼성산(관악산) 삼막사 등곡대(燈谷臺)에서 득도하였기에 호를 등곡(燈谷) 또는 등명(燈明)이라 했다. 황악산인(黃岳山人)이라고도 했으니 이는 왕명에 따라 황악산 직지사를 중창했기 때문이다. 직지사 외에 유점사도 중창하고 봉선사와 흥복사를 창건하였으며 왕실의 원찰인 봉선사 주지를 맡았다. 도반인 학열(學悅)과 더불어 해인사 대장경을 인출하기도 했다. 애련사 또는 중대사에서 입적하였고, 부도는 속리산 복천사와 김천 직지사에 있다. 출가와 입적 사찰이 명확하지 않다.]

학가산 애련사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입적한 사찰로 추정되는 애련사를 언급한 답사기 두 편이 있습니다.

 

학가산 만월암지 승탑(부도)

https://12977705.tistory.com/8725173

 

학가산 자품리 석불입상

https://12977705.tistory.com/8724176

 

법주사 복천암 학조대사 승탑

https://12977705.tistory.com/8725436

 

김천 직지사 학조대사 승탑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구태여 추정하자면 승탑원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승탑원(3) 뒤편 부도가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직지사 승탑원(3) 승탑

https://12977705.tistory.com/8728046

이제 중대사 승탑을 살펴봅니다.

육각 대좌

세장한 탑신 가운데 보다 조금 낮은 곳에 두 줄을 새겼습니다.

특별한 문양, 당호는 없으며 넓은 굄위에 연화보주를 일석으로 조성했습니다.

조선 후기에 조성한 부도로 추정합니다.

육각 대좌

탑신

연화 보주

한편, 서미리 토박이들은 사지에 남아 있는 부도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억 오류가 아니겠냐며 되물었지만 수없이 오르내리던 곳이라 기억 못 할 까닭이 없다고 강하게 주장한다고 합니다.

아래는 중대사에서 1830년 조성되어 안동 대원사에 소장 중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불화(사진. 문화재청)입니다

신중도

후불도

지장도

중대사에서 반출된 하회마을 충효당 삼층석탑

https://12977705.tistory.com/8725519

1638년 서미리에 머물던 청음 김상헌이 지은 글로 마무리합니다.

 

간초당우금(磵草堂偶吟) 서간 초당에서 우연히 읊다.


석실선생일각건(石室先生一角巾) 석실 선생이 각건 하나를 쓰고서
모년원학여위군(暮年猿鶴與爲群) 모년에 원숭이·학과 무리를 이루니
추풍낙엽무행적(秋風落葉無行跡) 가을바람 지는 낙엽에 인적 없어
독상중대와백운(獨上中臺臥白雲) 홀로 중대사에 올라 백운에 눕네.

2024년03월 08일

 

위에 인용한 불교 신문, 사찰 이야기 원문입니다.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410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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