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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암. 2015년 4월 부도전과 목조아미타불을 뵙기위해 이른 아침에 들렸으나 무엇에 홀리듯 부도전을 건너뛰고 말았었다. (아래 답사기 참조) 돌아보니 세심정 주변은 벌써 4번째(?) 인연 지은 듯 하다. 2012년 금강골 쌍탑 답사 2014년 경. 탈골암 근처 폐사지 석불입상을 찾았으나 실패 2015년 4월 26일. 복천암. 탈골암 탑재.순조태실. 법주사 부도전 그리고 오늘 상고암 마애불상군, 석탑재, 복천암 부도, 탈골암 탑재 참고로 법주사 답사 동선은 크게 3곳 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입구 마애불을 비롯하여 법주사 경내 두번째는, 법주사에서 수원지를 따라 부도전, 폐사지 석불입상,탈골암 석탑,복천암 목조아미타불, 부도전 다시 내려와. 세심정 주차. 순조 태실.상고암 마애불,석탑재.금강 휴게소. 금강골 쌍탑 셋째.이곳은 비지정 탐방로이어서 사전 허락을 받으면 좋다.(개인적으로도 미답지로 남아 있다) 수정봉 석탑부재,여적토굴 마애여래좌상(근세불).여적암 에서 묘봉에 이르는 스님 포행로의 마애여래불. 중,하관음암지 부도 3기.석탑재 그 외에도 법주사 경외에는 비마라사 석조보살입상,여적암 다층청석탑,88야불이 계신다. 부도전 가는 길 복천암 경내로 들어가지 말고 우측 해우소 옆으로 난 산길을 10여분 오르면 된다. 상고암 글에서 언급했던 산중일기를 지은 정시한도 이 길을 따라 올랐을 것이다. 정시한선생은 상고암 방문 하루전인 1686년 10월 17일 복천암을 방문하였고 부도전에도 들렸다. 흐린 뒤에 맑았으며 추웠다. 아침 식사 뒤 달마암을 출발하여복천사에 도착했는데 약 4리 정도다.법당과 샘을 둘러보았는데 샘은 청룡변의 바위 틈에서 흘러내려오고 있어 매우 기이 했다.방에 들어가니 지통, 인관 두 노스님이 맞아주었다.(중략) 지통스님이 음식을 차려주었다.하가섭암 각령스님은 스물 여덟살인데 절에 돌아왔기에 얘기를 나눈 다음 짐을 짊어지고 복천암을 떠났다. 인관스님이 따라 나왔는데 동쪽 골짜기에 올라가니 신미와 학조 스님 부도 2기가 있다(하략) 부도전 신미대사 부도(뒤), 학조대사 부도(앞) 학조대사 부도 중대석의 명문으로 조성시기가 확인된 부도이다. 학조등곡 화상탑學祖燈谷和尙塔 정덕구년 갑술오월 일립正德九年甲戌五月日立.1514년(중종 9년) 학조대사 등곡(燈谷: 1432∼1514) 학조화상은 1464년(세조 10)속리산 복천암에서 왕을 모시고 스승 신미와 함께 대법회를 열었고, 1467년(세조 13)금강산 유점사를 중창하고 봉선사에 주석한 후 김천 직지사에 머물면서 1488년(성종 19)인수대비의 명으로 해인사를 중수하고 진관사, 대자사, 낙산사를 중수하였다. 1500년(연산군 6)에는 왕비 신씨의 명으로 해인사 고려대장경 3부를 인행하여 발문을 짓는 등 조선 전기에 활동한 고승이다. 1514년(중종 9) 그의 부도가 속리산 복천암과 함께 김천 직지사에 세워졌다. 부도 기단석 팔각지대석. 팔각 하대저석,면서그 갑석이 일석이며 상부에 괴임을 두었다. 팔각 중대석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고, 상대석 하부에에는 받침을 새겨 하대석과 대칭처럼 보인다. 상대석 상부에는 팔각의 면마다 2개로 구획하여 마치 앙련을 형상화한 것 같다. 원구형 탑신 옥개석 하부 추녀를 새겼다. 옥개석 팔각 옥개석 낙수면 경사는 상부에서는 급하고 내려오면서 완만해졌다. 전각 끝에는 귀꼿을 세우고 궐문을 새겼다. 탑신 명문 九年甲戌五月日立이 희미하게 보인다. 좌측은 和尙塔인 듯 하다. 옥개석 귀꽃과 궐문 상륜 낮은 호형의 받침을 3단으로 앉히고 그 위에 앙련이 조식된 보주를 올렸다. 학조대사 부도 신미대사 부도 탑신에 부도 주인공과 조성시기 명문이 있다. 수암화상탑 성화16년 8월 입秀庵和尙塔成化十六年八月立. 1480년 혜각존자(慧覺尊者)신미(信眉, 1405∼1480) 신미는 성종 때 영의정에 추층된 김훈(金訓)의 장자로, 이름을 김수성(金守省)이라 했고 수암(秀庵)이라 불렸다. 그의 둘째 동생이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므로 1405년 무렵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미는 성균관에 입학했다가 출가하였으며, 1446년(세종 28) 무렵 세종과 조우하여 여러 대군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 유생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판선교종직(判善敎宗職)을 제수받았으며 국가적인 행사인 수륙제를 관할하였다. 문종대에 선교양종을 통솔하는 위치에 올랐으며, 세조대에는 불경간경사업을 주도하며 세조의 존경을 받고 그의 두 제자 학열(學悅)과 학조(學祖)와 더불어 삼화상으로 불렸다. 그의 부도는 제자인 학조의 부도와 함께 속리산 복천암에 봉안되어 있다. 기단부 아무른 장식없이 팔각의 상.중,하대석을 앉혔다. 상대석 하부와 하대석 상부가 대칭 느낌이다. 전각 끝에 귀꽃이 생략된 것을 제외하면 학조대사 부도와 거의 유사하다. 옥개석과 보주 옥개석 낙수면 물매가 급하며 합각을 높게 새겼다. 1단 괴임위에 보주를 올렸다. 탑신 명문 육안으로는 구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스승인 신미대사 부도가 학조대사 부도 보다 간결하다. 일반적으로 스승의 부도보다 더 화려하게 조성하지 않는 것이 관례 아닌가? 신미대사는 한글창제와 관련하여 인구에 회자되는 스님이다. (몇년전 복천암 답사기에도 올렸던 글을 가져 온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71C15455432359E0C?download", "훈민정음과 신미대사." 속리산 문장대 등반을 하지 않았고 비지정 탐방로의 인연 짓지 못한 옛님들이 계시기에 아직 미완의 답사지로 남아 있다. 2017.06.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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