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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울릉군

울릉...육군대장 박정희 장군 순찰기공비

by 임병기(선과) 2022.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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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해정

관해정 푯말이 눈에 들어와 정자로 생각하고 찾았습니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의 쉼터,  만남의 광장, 주민들의 애환이 깃든 공간으로, 300년이 넘은 후박나무와 뜻밖에도 박정희 장군 기공비가 있었습니다.

 

관해정(觀海亭) 유래

이곳은 저동 앞바다의 촛대바위 뒤로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기 좋은 곳이라 하여 관해정이라 부르며, 개척 당시 관해정 부근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후박나무 숲이었으나 개척민들이 나무를 베어내고 논밭을 만들어 울창했던 숲은 점차 사라지고 현재의 몇 그루 후박나무(수령 350년 정도)들만 보존되어 마을 내 유일한 숲으로 남아 주민들에게 좋은 휴식처와 아이들의 놀이터로 이용되어왔다.  또한 개척당시부터 마을 산신당이 1960년경까지 있다가 이후 울릉고등학교 뒤편으로 이전되었지만 현재에도 일명 이곳을 제당으로 부르기도 한다.

 

1882년 조선정부에서 빈섬으로 관리해 오던 울릉도를 사람이 거주할 수 있도록 개척령이 반포되자 울진에서 정감록을 신봉한 전재환(田在桓) 일가가 피난지라는 이유로 울릉도로 이민해 올 때 식솔로 함께 이주해 온 배상삼(裵祥三)은 힘이 천하장사인 무부(武夫)였다.  그는 사동의 과부를 보쌈하여 관해정 앞에서 대장간을 차려 놓고 농기구를 만들어 팔며 거주하였다.  당시에 울릉첨사로 순시차 입도한 평해군수 조종성(趙鐘城)은 배상삼을 도수(島首)로 정하여 섬을 관리토록 하였는데 배도수는 왜인들이 무단으로 건너와 벌목하는 것을 혼자의 힘으로 20여명을 상대하여 몰아낸 이후로 왜인들은 몇 년간 얼씬도 못하였다.

 

1894년경 가뭄과 쥐떼로 흉년이 들어 개척민들이 기아에 허덕이자 부유층의 창고를 강제로 수색하여 수십 석의 곡물을 모아 나누어주어 굶어 죽어가는 수백 명을 살려 생명의 은인이 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이 떼에 왜인들로부터 생필품을 구입해서 개척민들에게 되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몇몇 상인들이 배도수로 인하여 왜인들이 오지 못하자 상업을 할 수 없어 그를 죽이기로 모함하였고, 배도수는 태하 성하신당제를 지낼 때 이들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이곳 관해정 앞에서 화장장으로 치러졌다.

 

1962년 10월에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및 대통령 권한대행이신 박정희 대통령께서 군함을 타고 울릉도를 방문하였는데 저동항 내까지 군함이 들어올 수 없어 전마선을 타고 뭍으로 내릴 때 발을 헛디뎌 바닷물에 빠졌는데 방파제가 없어 고생하는 주민들의 고충을 직접 체험하고 저동항 방파제를 건설할 것을 지시하였고 다음 해인 1963년 9월에 울릉도민들은 이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모금을 하여 박정희 대통령 순찰 기념비를 항만이 바라다 보이는 이곳에 세웠다.  저동항은 1980년도에 준공되었고 당시 동해안에서 두 번째로 큰 방파제로써 동해의 어업전진기지가 되었다.

 

관해정은 저동마을의 정월 대보름, 필월 한가위 등 문화행사의 공간으로 이용되었고, 50년대와 60년대에는 남면 그네뛰기 대회도 매년 열리던 곳으로 마을 내 행사가 있으면 의례히 이곳으로 모이는 장소로 주민들의 가장 사랑받는 곳이었다.  관해정을 중심으로 큰 모시개, 중간 모시개, 작은 모시개 마을로 나뉘어 있으며 참고로 저동마을은 개척 당시 이곳 해변에 모시가 많이 자생해 있었기 때문에 ‘모시가 많은 포구’란 뜻으로 모시개라 하였다.  이후 행정동명을 제정할 때 ‘모시 저(苧)’자를 써서 저동이라 하여 현재까지 이르로 있다.  그리고 깍끼등, 주사골(朱沙谷), 줄맨등, 숯골, 내수전(內水田), 신흥동(新興洞), 와달리(臥達理), 용바위골 등 자연지명을 가진 마을이 산재해 있으며, 주변에는 촛대바위와 북저바위 대섬(죽도竹島), 봉래폭포, 풍혈(바람구멍), 해안산책로, 내수전 약수터, 일출전망대와 개척민들 애환이 서려있는 내수전 둘레길이 있다.

*출처. 현장 안내문

 

陸軍大將朴正熙將軍巡察記功碑

대통령 권한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1962년 10월 10일 박 의장 방문을 기념하며,

울릉도민의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고스란히 반영된 비석으로 1963년 7월에 건립하였습니다

비문이 훼손되었던 흔적이 보였습니다

 

朴議長閣下記功碑趣旨文

東海의 孤島인 鬱陵島는 大韓民國의 領土이면서도 歷代의 爲政者로부터 버림받은 孤兒가 되어 二萬島民은 檀君의 한 피를 받은 倍達겨레이면서도 本土의 國民으로부터 된 지 오래였고 現代文明과 隔離된 生活을 한 지 얼마나 歲月이 흘렀든가 本島가 開拓以來 全島民의 宿願인 港灣施設과 水力發電所建設 定期交通船就航 水産物加工處理工場建設을 爲하여 中央政府要路에 數十次 陳情建議하였으나 거의 黙殺當하고 失意속에서 살아오는中 하늘이 無心치않아 우리 二萬島民에게도 光明希望의 새날이 찾아왔으니 이는 民族을 累卵의 危機에서 救出하신 우리 民族의 領導者 朴正熙議長의 五·一六軍事革命이 아니요 去年十月十日 國家元首이신 朴正熙議長의 本島來訪은 鬱陵島開拓以來 最初의 慶事가 아닙니까

當時 本島를 巡視하신 議長閣下께옵서는 現代文明과 完全히 隔離된 生活을 營爲하고 있음을 愛惜히 여기시고 歸京卽時議長閣下의 指示로 鬱陵島綜合開發計劃이 成案되고 지난 三月 第十七次閣議에서 同案이 議決되여 이미 交通船은 就役하게 되고 島內一週道路 水力發電所는 着工中이며 餘他 開發計劃도 着タ進行中이니 이 얼마나 기쁨에 눈물겨운 일입니까 우리가 지금 朴正熙議長閣下巡視記念碑를 建立코져 하는 것은 議長閣下각하께옵서 우리 二萬島民에게 베푼 恩惠의 萬分之一이라도 할까 하는 것이요 우리 二萬도민의 작은 精誠으로된 이 記念碑가 우리 島民子孫萬代의 마음의 등불이 될 것이요 鬱陵島民의 歷史的 記念物이 될 것이다

 

西紀一九六三年七月 建立

*출처.디지털울릉문화대전

 

비명(碑銘)

義堂 李晳洛 讚吟

이석락이 어떤 사람인지 검색되지 않습니다.

 

발기인 대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

저동항은 변함없이  한가롭기만 합니다.

 

202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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