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민속박물관
첫걸음입니다.
내부는 관람하지 않았으며, 야외전시장에는 제주읍성에서 옮겨 온 돌하르방 2기, 목장승(벅수)와 조산, 문석인 무석인, 그리고 전국의 벅수(장승)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조산과 벅수(장승)
솟대
금줄
문석인
문, 무석인
돌하르방
돌하르방(옛 답사기에서 가져옴)
조선 시대 제주현, 정의현, 대정현 성문 입구에 세워져 있던 석상石像으로, 마을, 성 수호신, 벽사, 성주민들의 안녕, 풍농, 이정표 기능을 상징하고 있어, 육지의 마을 장승, 사찰 장승, 성문 장승과 동일한 목적으로 조성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돌하르방은 우석목, 무성 목, 벅수 머리, 장군석, 옹중석 등으로 지칭되었으나 해방 후에 돌하르방으로 불려지다가 1971년 8월 26일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디지털 서귀포 문화대전에 의하면 제주에는 총 48기 돌하르방이 조성되었으나 제주성 돌하르방 1기가 분실되고, 2기는 1960년대 국립 민속박물관으로 옮겨져 제주에는 45기가 남아 있다.
돌하르방의 기원
어떤 연유로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역사적 유래에 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일반적으로 남방 기원설, 제주도 자생설, 몽골 유풍설 등 세 가지 설이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돌 하르방의 조성시기
김석익의 탐라 기년(1918년)
"1754년(영조 30년) 목사 김몽규 설 옹중석어 성문 외 牧使金夢奎設翁仲石於城門外 목사 김몽규가 성문 밖에 돌하르방을 세우다"
다른 의견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1754년 목사 김몽규가 제주성 바깥에 조성하였으며, 정의현 돌하르방도 동시대 작품으로 짐작된다.
***옛글에는 1754년 김몽규 글을 참조했지만, 1653년 제주목사 이원진이 간행한 탐라지 기록에 따르면 효종 4년(1653년) '옹중석(翁仲石)'은 제주읍의 성 동․서․남 삼문밖에 있었다"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제주의 돌하르방(45기)
https://blog.daum.net/12977705/8726968
돌하르방(1)
제주 읍성 동문 밖에 있었으며, 1967년 대여 형식으로 반출되었다고 합니다.
나무 막대를 끼웠던 흔적입니다.
육지의 장승(벅수)와 큰 차이점의 하나입니다.
그 외에도
제주 돌하르방은 손이 있고, 수염이 없으며,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반면에 육지 장승(벅수)은 대부분 손이 없으며, 수염이 있고, 이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돌하르방(2)
ㄱ자(字) 홈
어떤 형태의 대여인지 모르지만
제주 돌하르방은 탐라국 제주 읍성 동문지로 환지본처 되어야 합니다.
202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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