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양군

함양...군자사지

임병기(선과) 2021. 11. 2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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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사지(2020년)

https://blog.daum.net/12977705/8727049

 

(초안. 20211004)

 

군자사지 君子寺址

마천면 군자리 467번지

이곳이 현재까지 알려진 군자사지의 금당 터이다..

 

군자사의 창건과 폐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문화재청 발간 한국의 사지에 짧게 기록되어 있다.

"사찰의 연혁은 이덕무(174l~1793)가 함양군 사근역 찰방 재직 중 1783년에 군자사에 머물 때 옮겨 적은 현판 사적기에는 당시 군자사에는 10여명의 승려만 있는 퇴폐(頹廢) 사찰이라고 하였다. 이덕무가 옮겨 적은 사적기는 1684년에 승려 형곡 복환이 기록한 내용으로 "신라 진평왕이 578년 왕위를 피해 이곳에 있을 때 태자를 낳고. 이후 환도하면서 이곳의 집을 사찰로 창건하여 군자사로 명했다고 한다. 이후 고려시대 불일국사가 중창에 실패하였으며, 진각국사가 중창하였다. 1,317년(고려 충숙왕4) 혜통화상에 의해 중수되고, 여말선초 왜구의 침략으로 전소되었으며 1,404년 행호대선사가 중창하였다고 전한다"

 

1,684년 이전 선비들의 지리산 유산기에는 군자사의 사명이 영정사(靈井寺)로 기록되어 있다.

 

박여량. 두류산 일록(1,610년)

君子者。古之靈凈寺也。新羅眞平王避亂居此寺生子。因改以今名。其曰安國寺者。亦因其時而得此稱歟

군자사는 옛 이름이 영정사(靈淨寺)이다. 신라 진평왕이 즉위하기 전에 어지러운 조정을 피해 이 절에 와 거처하였다. 그때 아들을 낳게 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안국사(安國寺)도 이때에 그 이름을 얻은 듯하다.

 

유몽인. 유두류산록(1,611년)

暮投君子寺。寺野刹也。埃氛滿堂。獨牧丹對禪房方敷榮。可賞。寺前舊有靈井。號靈井寺。今改以君子。未知取何義也

저물녘에 군자사(君子寺)에서 투숙했다. 이 절은 들판에 있는 사찰인지라 흙먼지가 당 안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유독 모란이 선방(禪房) 앞에서 한창 꽃을 피우고 있어 감상할 만하였다. 옛날에는 절 앞에 신령스러운 우물이 있어서 영정사(靈井寺)라 불렸는데 지금 절의 이름이 군자사(君子寺)로 바뀐 것은 무슨 뜻을 취했는지 모르겠다.

 

박장원. 유두류산기(1643년)

夕得君子寺。寺本名靈井寺。而新羅眞平王生子於此。改今名云

저녁때 군자사(君子寺, 현 함양군 마천면 군자동)에 이르렀다. 이 사찰의 본래 이름은 영정사(靈井寺)였었는데, 신라 진평왕이 이곳에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사찰 이름을 군자사로 고쳤다고 한다.

또한, 구전되는 진평왕 창건설에 대한 내용은 신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신동국여지승람(1,530년).

君子寺。在智異山。俗傳新羅眞平王避位居此,生太子還國,捨家爲寺​

군자사(君子寺)는 지리산에 있다. 신라 진평왕이 왕위를 피해 여기서 살다가, 태자를 낳아서 돌아가고, 집은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군자사는 사적기와 유산기, 문헌이 남아 있지만, 가람 배치와 불교 유적, 살림 살이 등은 박여량의 두류산 일록의 선당, 누각과 박장원의 유두류산기의 삼영당 외에는 주목받을 내용이 크게 없는 것 같다.

유호인(1445~1495년)

군자사(君子寺)

내 낀 숲은 어두울 제 비 내릴 뜻이 더디어라 煙樹平沈雨意遲

늦게 와서 대를 보려 오랫동안 앉았었소 晩來看竹坐移時

늙은 선사 푸른 눈이 예와 다름없어 老禪碧眼渾如舊

지난해 읊은 시를 다시금 읽어보네 更檢前年此日詩

노스님이 주석하고 있지만, 절집 살림살이 등의 언급이 없다

박여량. 두류산 일록(1,610년)

兵火之後。所重刱者。法堂禪堂南樓而已

전란을 겪은 뒤에 중창한 것은 법당, 선당(禪堂), 남쪽 누각뿐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후 중창 불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몽인. 유두류산록(1,611년)

寺前舊有靈井。號靈井寺

절 앞에 영정(靈井)이 있어 영정사라 한다

영정 외에는 사찰에 대한 기록이 없다

박장원. 유두류산기(1643년)

臺殿房屋。俱極宏麗。寺之西偏。有一新建別殿。金碧焜耀。名曰三影堂。堂中有淸虛,四溟,靑梅三大師眞像。取燭仰視。如接軟語。三像中四溟則不翦鬚。鬚長且美。眞好男子也

사찰 건물들이 모두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서쪽에 있는 삼영당(三影堂)은 새로 지은 건물인데, 노란빛과 푸른빛을 곱게 발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청허,사명,청매 세 대사의 초상화가 있었다. 촛불을 들어 비추어보니 부드러운 음성이 들리는 듯하였다. 그중 사명대사는 머리를 깎지 않았는데, 머리가 길고 아름다웠다. 정말로 잘 생긴 남자였다

삼영당(三影堂)은 조사당(祖師堂), 영각(影閣), 진영각(眞影閣)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며 선사(禪師), 창건주 등의 그림을 봉안한 전각이다.

정시한. 산중일기(1648년)

庚宿買海松子於君子寺來 寺僧送水芹二束來

경숙이가 군자사에서 잣을 구해왔다, 군자사 스님이 미나리 두 단을 보내왔다

군자사 승려가 미나리 두 단을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어 군자사에 미나리 깡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군자사지에 남아 있는 유물은 다음과 같다.

문화재청 발간 한국의 사지에는 "추정사역에 대해 1942년 자료에는 율봉당 승탑을 비롯 부도 3기를 별도 사지로 구분하지만 1,977년 부터는 같은 내용으로 포함하고 있다. 1987년, 1996년 자료에는 군자마을 대밭 숲 내에 팔각원주형 승탑과, 당간지주, 기단석 등이 있고 인근 도마 마을에 율봉당 승탑 등이 있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한국의 사지에 기록된 벽송사로 이건한 율봉당 승탑을 비롯 3기 부도는 도마마을의 도마사지에 있었으며, 군자사와 다른 사찰로 보고 있다. 또한 군자사 대숲에 있었던 부도 2기는 서암정사로 옮겨 갔으며 지대석만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서암정사에는 부도가 없으며, 서암정사 지근의 벽송사 공양간 아래에 경암당(鏡巖堂, 1743~1803)과 남곡당(南谷堂)부도 2기가 있지만, 동일 부도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군자사지 다비장(화장장)으로 구전되는 마을 뒤편 대숲에는 한국의 사지에 등재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승탑(僧塔)과, 당간지주(幢竿支柱), 기단석 등은 땅속에 묻혔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현장 확인 결과 부도 기단석으로 전하는 석조 부재와 팔각원당형 부도의 옥개석으로 추정되는 석조물이 남아 있었다.

부도 옥개석

즉, 팔각 부도 옥개석(지붕돌)은 한국의 사지에 언급된 팔각 원당형((八角圓堂形) 승탑 옥개석으로 추정된다. 옥개석(屋蓋石)낙수면(落水面) 물매(기울기)가 깊고, 내림마루를 굵게 표현하였으며, 받침 위에 연화 보주(蓮花寶珠)를 일석(一石)으로 새겼다. 옥개석은 근처 영원사의 청매선사 팔각원당형 부도 옥개석과 흡사하다. 위에 언급한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1996년까지 팔각원당형 부도가 있었으며, 이후 매몰 또는 반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석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서암정사로 옮겨 간 부도 기단석 2점이 있다.

돌확, 수조

예전에는 마을 곳곳에서 군자사지 유물이 산포하고 있었으나, 외지인들의 반출, 매입 등으로 마을에는 돌확과 수조를 제외한 유물이 남아있지 않다..

우물

마을에는 군자사지 우물터로 추정되는 곳이 5곳 있었으나, 현재는 1곳만 남아있다.

기타 유적

진평왕 왕자 태실 금표

마천면 소재지. 당흥 마을 뒤편 바위에 새겨져 있다.

명문

古諺 傳 眞平王 入此山時 聽封次占此而 其后居人皆以噤地云(고언 전 진평왕 입차산시 청봉차점차이 기후 거인 계이금지운)

(해석)예로부터 민간에 전해 내려온 이야기에 전하기를 신라 진평왕이 이산에 들어왔을 때에 봉토를 허락하여 이곳을 차지하였다. 그 후 주민들이 모두 땅에 대하여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더욱 많은 연구와 고증이 필요하지만, 진평왕 왕자 태실로 규명되면, 현재까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지로 전하는 충북 진천의 김유신 장군 태실 보다 앞선 태실지가 된다.

*금석문 음역과 해석은 대전에 거주하며, 마천면사 편집위원인 이영규 님의 견해 입니다

장승

군자사지 입구에 장승배기라는 지명이 있다.

지명으로 판단하면, 그곳에 군자사 사찰 장승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사찰 장승(벅수)은 사찰에 유입되는 사악한 기운을 막고,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앙, 사찰 경계 등의 다양한 상징성을 가진다. 함양에는 벽송사의 목장승, 백전면 영은사지에 석장승이 있으며, 가까운 남원 실상사에도 석장승 4구가 남아 있다.

군자사지에 유존하는 유물은 크게 없지만 인구에 회자되는 까닭은 조선 시대 많은 선비들의 지리산 유산록에 거의 빠짐없이 등재되어 탐방단의 규모, 동행한 인물, 남려꾼, 기생, 악공 등 유람단 구성원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생들의 숙소로 활용된 군자사의 실상과, 승려 들의 사회적 신분을 알 수 있는 기록이 곳곳에 확인되기 때문이다.

부도 옥개석

벽송사 부도전

(좌)경암당 鏡巖堂, 경암집 鏡巖集을 쓴 應允 鏡巖(1743~1803)

(우)남곡당 南谷堂

마을 주민에 의하면 서암정사로 옮겨갔다고 함

부도 기단석(1)

부도 기단석(2)

수조

돌확

우물

미나리 깡이 있었던 자리

진평왕 왕자 태실 금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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