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양군

함양...등구사지

임병기(선과) 2021. 11. 22.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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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구사(2013년)

https://blog.daum.net/12977705/8724005

 

(초안. 20211004)

 

등구사지(登龜寺址)

마천면 구양리 1217번지 일원에 자리하고 있는 등구사 옛터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소장 중인 등구사 사적기기(登龜寺事蹟記)에 의하면 등구사는 656년(신라 무열왕 2)에 창건되었고, 여말선초에 소실되었다가 1709년 행호 선사와 탄기(坦機), 자상(慈祥), 초익(楚益), 초학(楚學) 등의 스님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등구사는 1489년 조선시대 김일손(1464~1498)의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에 실려있어 당시에도 사찰의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등구사가 오도봉 아래(登龜寺. 在悟道峰)에 있다고 하였으며 유호인의 시가 수록되어 있어 등구사가 향화를 피웠음을 알려준다. 이후 1765년의 여지도서輿地圖書). 1799년 발간된 범우고(梵宇攷)에는 금무(今無), 금폐(今廢)로 실려 있어 18세기 후반에 폐찰되었음을 짐작 가능하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등의 조사에 의하면 사역에는 거대한 석축과 배수구, 경남문화재 자료인 삼층석탑 부재, 상단구역의 주초, 장대석, 나비장이 새견진 석조물, 기와 조각, 도자 조각 등이 사역에 산포되어 있다. 등구사에서 간행한 등구사 사적기(1716년), 1685년 발간된 묘법연화경을 비롯 경전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2021년 청동 금고가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이곳에서 발굴되어 행방이 묘연한 청동 관음보살입상도 조선 초기의 양식 특징을 지니고 있어 등구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는 유물이다.

현재 사역에는 등구사(주지. 인담)에는 청동 아미타불 좌상과 목조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을 봉안한 인법당([因法堂), 불사 중인 금당, 귀한선원(龜閑禪院) 등의 당우가 있다.

김일손.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에 실린 등구사

(1489년 음력 4월 14일~4월15일)

信馬到登龜寺.

山形穹窿如龜. 以寺登其背而名也.

古砌絶峻. 砌隙有幽竇.

澗水自北而注其中㶁㶁然.

其上有東西二刹. 一行皆寓於東刹. 汰還從者.

雨勢竟夜. 終朝殊未已.

遂留寺宇. 各就午寢.

僧忽報雨霽. 頭流呈露.

吾三人驚起. 刮睡眼視之. 則蒼然三峯. 偃蹇當戶.

白雲橫斜. 翠黛隱映而已.

少選又雨.

余戲曰. 造物其亦有心者歟. 潛形山岳. 似有所猜.

伯勖曰. 安知山靈久關騷客爲計耶.

是夜復晴. 皓月流光. 蒼顏全露.

稜稜壑谷. 若有仙人羽客來舞翩翩也.

伯勖曰. 人心夜氣. 於此都無査滓矣.

余之小蒼頭. 頗調觱篥令吹之. 亦足以傳空山之響.

三人相對. 夜分方寢.

遲明. 吾與伯勖. 着芒屩策扶老. 步下登龜一里許. 有瀑布可觀.

나는 말을 믿고 몸을 맡겨 등구사에 이르렀다.

솟아 오른 산의 형상이 거북과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앉아 있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래된 축대가 빼어났는데 축대의 틈새에 깊숙한 구멍이 있었다.

석간수石澗水가 북쪽에서 흘러 그 속으로 흘러 내렸는데 졸졸 소리를 내는 듯 하였다.

그 위쪽엔 동, 서로 두 사찰이 있었는데, 일행은 모두 동쪽 사찰에 묵기로 하고 따르는 자를 가려서 보냈다.

내리는 비의 기세가 밤까지 계속되었고 아침까지 그치질 않았다.

마침내 절에 머물며 각자 낮잠을 잤다.

한 승려가 문득, “비가 개어 두류산 가는 길이 보인다.”라고 알려주었다,

우리 세 사람이 놀라서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고 내다보니, 세 개의 푸른 봉우리가 문 앞에 우뚝 솟아 있는 듯 했다.

흰 구름이 가로지르듯 감싸고 있어 짙푸른 봉우리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조금 뒤에 다시 비가 내렸다.

내가 농담삼아 말하기를, “조물주도 역시 마음이 있는가 봅니다. 산의 형세를 숨겼다가 보여주었다가 하니 시기하는 것이 있는 듯합니다.”라고 하니,

백욱이 말하기를, “어찌 산신령이 객을 오랫동안 잡아두려는 계책인지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날 밤에 다시 맑아져서 달빛이 환하게 비추자, 푸른 산의 모습이 모두 드러났다.

굽이굽이 이어진 골짜기에는 선인仙人과 우객羽客이 와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듯하였다.

백욱이 말하기를, “사람 마음이 밤 기운을 받아 이때에는 속세의 찌꺼기라곤 전혀 없군요.”라고 하였다.

나의 어린 종이 제법 피리를 불 줄 알아서 불게 하였더니, 빈 산에 메아리가 울리기에 충분하였다.

세 사람은 서로 마주 대하여 놀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15일) 새벽에 나는 백욱과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등구사에서 1리 정도 걸어 내려갔는데 볼 만한 폭포가 있었다

뇌계 유호인의 등구사 칠언절구가 전한다.

登龜寺...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 1445∼1494)

好在頭流萬疊山

暫偸休暇此登攀

金堂玉室尋前約

碧嶺丹崖摠舊顔

歲律蒼茫鴻北去

黃花搖落客南還

鑾坡遠與雲林隔

兩地歸來鬢已斑

두류 만첩 산아 잘있었는가.

잠깐 여가 타서 여기 올랐노라.

금당(金堂)과 옥실(玉室)의 옛 언약을 찾으니,

푸른 고개 붉은 벼랑이 모두 옛 안면일세.

해 저물어가니 기러기 북쪽으로 가고,

누런 국화 떨어질 제 객이 남쪽으로 돌아온다.

난파(鑾坡)가 멀리 운림(雲林)과 격했구나.

양(兩) 지역에서 돌아오니 귀밑머리 반백일세

(출처.신동국여지승람)

登龜寺 贈敏修禪師(등구사 증 민수선사)

坦夷堂裏共幽期(탄이당리공유기)

香燼堆盤夜正遲(향신퇴반야정지)

萬丈頭留眞面目(만장두류진면목)

坐來收拾入吾詩(좌래수습입오시)

탄이당에서 그윽한 만남을 함께 하니

향불 재 쌓이고 밤은 정녕 더디구나

만길 되는 두류산의 진면목을

앉아서 거두어 내 시에 들이네

(출처. 지리산 문학박물관)

등구사의 불교유적

미륵원명 청동 금고(彌勒院銘 金鼓)​

2021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었다.

금고(金鼓)는쇠북으로 금구(禁口) 또는 반자(半子, 般子) 라고 불리며 처마 밑이나 법당 안팎에 걸어 두고 당목(撞木)으로 쳐서 공양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을 모을 때 사용하는 불구(佛具)이다.

측면에 새겨진 명창(明昌. 중국 금나라 장종 때의 연호) 2년 경술년(明昌 二年 庚戌年) 명문을 통해 1190년(고려 명종 20년) 충남 공주의 인제원(仁濟院)의 후신이 미륵원(彌勒院)에서 조성한 금고임을 알 수 있다. 한 쪽이 빈 금고는 내구.중구. 외구로 구획되었다. 위와 좌우에 3개의 뉴(鈕)를 가졌으며, 내구(內區)에는 16개의 연판문이 당좌(撞座)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고, 당좌 안에는 14개 연과(蓮顆)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중구(中區)에는 특별한 문양이 없으며, 외구(外區)는 덩굴문으로 장식하였다.

금고는 2017년 10월 남원에 거주하는 재미교포 소스캇(60대) 씨가 등구사에 기증하였다

미륵원명 금고(사진.문화재청)

등구사 삼층석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

일제강점기에 도굴꾼에 의하여 훼손되어 도괴된 탑부재를 수습 복원하였다고 전한다.

지대석. 하층 기단, 상층기단. 초층탑신석, 초층 옥개석이 남아 있으며, 이상의 부재는 망실된 상태이다. 방형 지대석 위에 하층 기단 저석(低石)과 중석(中石)은 일석(一石)이며, 중석에는 탱주(撑柱)가 1주 모각되었고 우주(隅柱)를 새겼다. 하대갑석은 4매 부재이며 일부는 후보하였다. 약간의 물매(기울기)가 있고, 상부에 각호(角弧) 2단 굄이 조출(彫出)되었다.

상층 기단 중석은 탱주 1주, 우주를 모각하였고, 엇물림식으로 결구하였다. 갑석 하부에는 부연(附椽)을 새겼으며, 상부 물매는 급하지 않고, 각호각(角弧角) 3단 탑신 굄이 조출(彫出)되었다. 초층 탑신석만 유존하며 일석이다. 초층 탑신석에 사리공이 있다. 옥개석 물매는 급하여 각형 4단 층급받침이 있고, 절수구(물 끊기 홈)를 새겼다. 전각의 반전은 경쾌하며, 상부에 각형 2단 탑신 굄이 있다. 통일신라 하대에 조성한 탑으로 전한다.

등구사지 삼층석탑

등구사에는 경남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삼층석탑 외에 지정되지 않은 또 다른 석탑 부재가 있다.

현 석탑이 위쪽에 위치하며, 나비장이 있는 여러 매의 장대석, 탑신석, 복련이 조식된 방형 부재가 쌓여 있다. 탑신석에는 우주가 모각되었고, 복련이 있는 부재는 석탑의 부재 여부가 불확실하다. 주지 스님은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에 "등구사에는 동찰, 서찰"이 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각각의 사찰에 조성되었던 석탑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등구사 석탑 탑신석, 장대석

청동 관음보살입상

비지정 문화재

등구사지에서 발굴되었으나 반츨되어 현재는 행방이 묘연하다.

11면 관음이 아니라 9면관음으로 조선초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관에는 화불을 배치하였고, 양쪽 귀 옆으로 고리형의 관대가 있다.

오른손에는 염주를 지고 있으며, 정병을 든 왼손은 가슴에 두었다. 팔 죄우에 길게 흘러 내린 천의(天衣) 자락은 끝에서 잘려나갔다. 팔목에는 팔찌를 패용하였다.목걸이를 착용하였으며, 화려한 전신영락 장식이 3단으로 늘어져 있다. 사진상으로 분명하지 않지만 우전왕식 군의자락이 양쪽 다리로 내려와있다.

이와 비슷한 청동관음은 15세기에 조성된 북한 함경북도 칠보산 개심사에 있으며, 쌍둥이 처럼 닮았다.

사진.등구사 제공

북한 칠보산 개심사(사진 출처.다음)

기타

등구사 사적기 필사본(1716년)이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慶尙道咸陽郡智異山登龜寺事蹟

筆寫本 墨書 : 康熙紀元五十五丙申七月下弦月華坦天述

등구사 사적(사진 출처.다음)

등구사에서 간행(1685년)한 묘법연화경 외에 불경이 해인사성보박물관에 있다.

(康熙二十四年乙丑中夏日慶尙道咸陽地智 異山安國寺新刋留鎭 表紙墨書 : 登龜寺)

석축(石築)

삼층 석탑 뒤편과 아래 편에 축대가 유존한다 위쪽 축대는 훼손이 심하며, 복원한 하단 석축은 약 30미터 높이 3~4미터 내외이며 하부에 배수구가 남아 있다..배수구는 석축 주변 계곡에서 유입되는 계류의 배수를 위해 조성한 것 같다, 이 후 일제강점기(1936년)에 상산 김씨 집안에서 묘동으로 썻던 것으로 추정된다.

명문

상산 김씨 묘동 병자 이월중순 유만 서 성애 백만 OO OO(商山金氏墓洞 丙子二月中旬 有萬書 聖愛 百萬 OO OO)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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