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양군

함양...지리산 금대암

임병기(선과) 2021. 11. 21.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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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대암(2008년)

https://blog.daum.net/12977705/4802671

 

 

(초안. 20211004)

 

금대암(金臺庵)

지리산의 사찰중 빠른 시기에 창건한 사찰로 신라무열왕 3년* 656년(신라 무열왕) 행우(行宇)가 창건하였으며, 도선(道詵)이 나한전을 지었다고 한다. 고려 때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의 제자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1178~1234)이 금대암에서 수도하였으며, 1430년(세종 12)에 행호(行乎)가 안국사(安國寺)와 함께 중창하여 금대사(金臺寺)라고 하였다.

 

금대암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지리산 유산기에 자주 등장하여 당시의 현실을 짐작케 한다.

금대암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기록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지은 유두류록(遊頭流錄)으로 1471년 음력 8월 14일에 환희대(歡喜臺) 바위에 올라가 내려다보니 금대암·홍련암(紅蓮庵)·백련암(白蓮庵) 등의 암자가 보인다고 적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당시 금대암이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489년(성종 20)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속두류록(續頭流錄)에는 금대암에 20여 명의 승려가 경을 외우며 수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며, 그후 중창되었다가한국전쟁의 전화를 입었다. 또한, 1790년 이동항의 방장유록에 '금대암과 벽송암을 거쳐 군자사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에도 사찰이 경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후 1960년에 중건하였다. 1985년에 법당을 새로 지으면서 옛 법당을 해체하여 현재 자리로 옮기고 금대선원(金臺禪院)으로 불렀다. 경내에는 삼층석탑, 신중도, 동종. 전나무 등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금대암 삼층석탑

경남 유형문화재

법당 뒤 커다란 바위 앞에 자리한 삼층석탑으로, 초층 탑신석과 삼층 옥개석에 일부 보수한 흔적이 남아 있다.

본래는 자연 암반(巖盤)을 지대석 겸 기단(기단부가 망실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으로 삼고 3층 탑신부(塔身部)와 상륜부(相輪部)를 올렸다. 탑신석에는 우주(隅柱)를 모각하였고 초층 탑신석에는 문비(門扉)를 새겼다. 탑신석은 옥개석에 비해 크기가 작으며 체감율이 미미하다. 두텁지 않은 옥개석 상부에는 탑신 굄이 없고 깊게 새긴 하부 층급 받침은 전층 3단이다. 물끊기 홈인 절수구는 생략되었고, 낙수면(落水面) 물매(기울기)가 급하며, 전각(轉角)의 반전(反轉)은 희미하다. 일석(一石)으로 조성한 상륜부에는 노반석(露盤石), 복발(覆鉢), 앙화(仰花). 여러 개의 보륜(寶輪), 보개(寶蓋)가 있다. 탑신에 비해 상륜부가 지나치게 높아 비례가 맞지 않다. 그 이유는 상륜부를 후대에 복원하였거나, 탑 기단부가 망실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금대암 삼층석탑은 탑의 위치로 보아 고려전기에 널리 유행했던 산천비보(山川裨補) 석탑(인근의 산청 지리산 법계사에 비보석탑이 남아 있다)을 이은 고려 중기 이전에 조성한 석탑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자료에는 조선전기 석탑으로 기록되어 있다.

금대암 신중도(金臺庵 神衆圖)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신중도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호법신을 그린 불화(佛畵)이다.

금대암 신중도는 중앙의 위태천을 줄심으로 좌우에 각각 3명의 신중이 자리하고 있다.

화기에 의하면 1785년에 조성된 금어 서우 스님의 작품으로, 본래 봉안처는 기록되지 않았다.

화기(畵記)

乾隆伍拾年乙巳,六月日神衆幀O. 造成 大施主. 世一. 瑞英.朴仁三. 林厦春. 姜渭 賢. 尹得三, 金廷道. 金海云. 張斗咸. 良工 瑞雨. 證師 體宇. 誦呪 彩一.殿 文暉. 以此㓛德增福壽.生淨土

건륭 오십년 을사(乾隆伍拾年乙巳)

건륭은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연호로 1736년부터 1795년까지 사용되었으며, 오십년은 1785년이다.

화승을 양공(良工)으로 표현하였다. 복과 장수, 극락(정토) 세계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며 조성하였다.

금대암동종(金臺庵 銅鍾)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1734년 제작

용뉴(龍紐)는 한마리 용이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고 음통(音筒)이 있다.

천판은 볼록하며, 종신 상대에는 범자문(梵字紋)을 새겼으며, 연곽(蓮廓)안에 연꽃봉우리를 묘사한 연뢰(蓮蕾) 9개가 있다. 연곽 사이에는 4분의 보살입상을 봉안하였다. 종신에는 조성 명문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횡선으로 구획한 하대에는 문양이 없다.

명문(銘文)

雍正十二年甲寅四月日 山陰 雙溪寺 中 鍾重七十斤. 化主 比丘 聲振. 片手嘉善 金聲遠. 折衝 金善奉

옹정( 雍正)은 청나라 세종의 연호이며, 옹정 12년은 서기 1734년이다.

산청 쌍계사에서 제작된 종의 무게는 칠십근이며, 종을 만든 장인은 편수 김성원과 김선봉으로 이들은 나라로 부터 가선(嘉善), 절충(折衝)의 공명첩(空名帖)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금대암 전나무

경상남도 기념물

소나무과의 상록침엽고목으로 중부 이북의 고시대에 서식하며 높이 40미터까지도 자란다.

금대암 전나무는 높이가 40미터가 넘으며, 지름 3미터 가량으로 추정된다. 점필재의 지리산 탐방길에 동행했던 유효인(兪好仁, 1445~1494)의 시(詩)중에 “잘있느냐 금대절아( 好在金臺刹), 송하문(依然 松下門)이 옛 같구나, 송풍에 맑은 꿈 깨어(松濤沸淸睡) 잠꼬대를 하는구나(忽作魘中言) ”라는 내용이 있어 이 전나무는 그 당시에도 자생했던 한 그루로 추측된다. 현재 수술을 받고 있다.

유호인. 금대사

好在金臺刹 依然松下門 笙簧元作磵 鷄犬自成村 宿火迎晨活 頑雲響鐸奔 松濤沸淸睡 忽作魘中言

목조아미타불 좌상

비지정 문화재

무량수전의 주불로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을 협시보살로 봉안하였다.

석조 나한상

나한전에 봉안되어 있으며, 비지정 문화재이다.

 

금대암

무량수전 불단

신중도

금대사 동종

금대사 전나무

나한상

삼층석탑

문비

상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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