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청주시

청주...양수척 효자비

임병기(선과) 2021. 10. 29.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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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척 효자비

상당구 운동동 131-3, 민가 담장 옆에 위치

 

조선시대에 운동동 비선 거리에 살았던 양수척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양수척은 천민 신분이며 이름은 수척입니다. 

 

명문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양수척효자비(楊水尺孝子碑)

현장 안내문에는 효자양수척지비(孝子楊水尺之碑)로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눈으로 확인 결과 현장 안내문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뒷면에도 건립 시기로 추정되는 명문이 있으나 판독되지 않으며, 일부 자료에는 1860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1860년이 맞다면 양수척 3형제를 교화시킨 경대유 선생을 검색하면. 1522년 생으로 검색되어 동명이인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천민 신분인 양수척 형제의 효자비를 300년이 흐른 후 세울 까닭은 없기 때문입니다.

 

경대유(慶大有, 1522 壬午生)

"명종4년 식년 문과 을과(乙科)로 등과 하여 홍문관 정자(正字), 저작(著作), 수찬(修撰)을 지냈다. 후에 평양부 서윤(庶尹), 백천(百川), 군수를 거처 개성부 경력(經歷)에 제수되었다. 다시 사간원 사간(司陳)을 지낸 뒤 통정대부에 올라 종부시정(宗簿寺正)과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였다."(다음)

 

"양수척은 조선시대에 현재의 상당구 운동동 비선 거리에서 두 아우와 함께 살았는데, 주위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지 않았고 늙은 어머니에게도 효도를 하지 않았다. 이를 걱정하던 어머니가 드러눕게 되자 고려장을 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이때 남일면 효촌리에 살던 慶大有가 이 소문을 듣고 삼 형제를 불러 꾸짖자 양수척 형제는 크게 감화되어 이후 노모에게 효행을 극진히 하였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어느 날 모친이 중병으로 눕게 되자 청주성으로 들어가 한약을 지어 돌아오는 중에 홍수가 나서 월운천을 건너지 못하고 한탄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천의 물이 갈라져 건너게 되었으며 약을 달여 모친의 병구완을 하였다고 전하여 온다."(위키 백과)

 

후면

 

양수척이 솔거 노비라는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천민의 신분으로 알려져 우리나라의 충노, 충비 무덤과, 비석 사례에 포함시켰습니다.

 

우리나라의 충노(충비) 비석

https://blog.daum.net/12977705/8727148

 

2021.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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