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청주시

청주...송상현 묘역, 열녀 이소사, 한소사 무덤

임병기(선과) 2021. 10. 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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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 묘역

송상현 장군의 묘, 앞쪽에 한소사, 이소사의 무덤

코로나 때문에 충렬사는 들리지 않고 신도비를 거쳐 바로 묘역으로 향했습니다.

 

 

신도비각

 

신도비

1659년(효종 10)에 건립

방형 기단, 비신, 이수를 올렸습니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제전(題篆)은 이정영(李正英)의 글씨라고 합니다.

 

이수 전면

 

이수 후면

 

송상현 무덤

본래는 동래에 있었으나 1610년 묵방산 자락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에 동래성 전투에서 전사한 송상헌을 기리기 위하여 선조대왕이 임진왜란 후 중국에서 귀화한 두사충으로 하여금 묏자리를 잡아주도록 명하였다고 전합니다.

 

묘역은 봉분, 상석, 향로석,좌우에 석양, 문석인, 망주석과 장명등 1기가 있습니다

 

송상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2s2920a

 

두사충(대구.모명재)

https://blog.daum.net/12977705/8726532

 

장명등

 

일반적으로 소사(召史)는 양민의 아내나 과부를 이르는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조선 왕조 실록 중에 수양대군이 정적인 남자는 죽이고, 그 가족 어머니, 부인, 딸, 손녀 할 것 없이 여자는 모두 공신들에게 종으로 하사했다는 의금부의 기록을 보았다. 여기에 모두 158명의 여자 이름이 나온다. 정적인 양반의 부인이 83명, 딸이 36명이다. 그중에 소사(召史)라는 이름이 모든 이름의 10%가 넘는 16명이나 된다는 것이다."(여원 뉴스. 이상우 컬럼. 2016.05.14)

 

열녀 한소사 금섬지묘(烈女 韓召史 金蟾之墓)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한 금섬의 무덤도 동래에 있었으나, 송상현 선생 무덤 이장 때 함께 옮겨왔다고 합니다.

 

열녀 이소사 지단(烈女 李召史 良女之壇)

즉, 단(壇)으로 미루어 시신이 없는 봉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소사는 동래성 전투 이후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묘를 지켰겠지만 끝내 시신을 이곳에 묻을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임금이 하사한 묘역에는 다른 사람의 봉분을 쓸 수 없기 때문이어서, 처음에는 금섬의 묘비에 이름만 새겼다고 합니다.

 

(전)烈女 李召史 良女之壇

가묘에는 단(壇)이라는 비를 세웠습니다

 

단기 4322년은 1989년입니다.

따라서 그 이전에는금섬의 묘비에 이름을 새겼을 것입니다.

또한 명문으로 미루어 실제로 묻힌 장소는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송상헌 사후 26년 동안 공의 묘를 지켰던 정부인 성주 이씨도 왕의 명으로 조성한 묘에는 더 이상의 무덤을 마련할 수 없다는  예법 때문에 사후 남편 옆에 묻히지 못하고 이곳에서 다소 떨어진 황구산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소사와 한소사는의 신분을 노비 신분으로 알고 찾아 왔지만, 열녀(烈女)로 미루어 후처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충비, 충노 묘와 비석에서 제외시켰습니다.

 

2021.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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