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담양군

담양...세일재. 죽림재

임병기(선과) 2021. 8. 16.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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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재 비림

 

얼마 전 페이스북 친구분이 죽림재의 석탑 옥개석 사진을 올려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죽림재가 아니라 비림부터 세일재가 배치되어 있어서 퍽 당황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죽림재와 세일재는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죽림재만 문화재로 등록된 것 같습니다.

 

취사루(聚斯樓)

세일재 루대입니다.

밖에서는 이층 루각이지만, 안쪽은 세일재 중정괴 바로 연결되어 공간 확보가 가능합니다

 

취사루(聚斯樓)

안쪽에 걸려 있습니다

 

석조부재

취서루 앞, 비림 뒤편에 자리하며 페친이 석탑재로 포스팅한 석물입니다.

얼핏 옥개석 같지만, 처음부터 비석 대좌로 조성한 석물입니다.

 

맨 위도 각형 1단 상층 탑신 굄이 아니라 비좌로 정치하게 다듬었습니다.

낙수면 내림마루가 넓어 백제 계열 석탑의 유형 같지만, 낙수면 끝단 처마의 구분선은 옥개석에서 유례가 없습니다

 

그래도, 석탑 옥개석을 비석 대좌로 전용하면서 장식성을 가미하기 위한 방법으로 구분선을 구획하였을까?라는 생각으로 석조부재 하부를 살펴보았습니다.

 

평평합니다.

옥개석 층급 받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석탑 기단 갑석일까?

낙수면 물매가 급하고, 끝단을 구획한 작례는 유존하지 않기 때문에 석탑 부재가 될 수 없습니다.

 

세일재(歲一齋)

창녕 조씨 밀직사공파의 고려 보문각 직제학 조유도(曺由道)선생을 모시는 사당

조유도 선생은 창녕 조시 창평 입향조이며, 죽림 조수문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세일재

 

조유도 신도비

조유도 선생은 공양왕 때 직제학으로서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여조(麗朝)를 부지(扶持)하는데 힘쓰다가 정몽주가 화를 당함에 그를 신구(伸救)하는 소(疏)를 올린 끝에 창평으로 적거(謫居)당하게 되었습니다

 

서재

정일재

 

현판

 

동재

육영당

 

현판

 

정일재와 육영당의 동서재 구분

일반적인 전각의 위계인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에 준하여, 동재 육영당, 서재 정일재로 판단하였습니다

 

우물지

 

죽림재

창녕조씨 문중의 글방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

죽림(竹林) 조수문(曺秀文)이 창건, 초창 건물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귀중한 책들과 함께 불에 타버렸고 인조 원년(1623)에 6대손인 삼청당 조부(三淸堂 曺溥)에 의해서 다시 세워졌으며, 현재의 건물은 1945년에 중수하였습니다.

(대부분 자료에는 현재 건물이 1948년 중수로 기록하고 있으나, 현지 안내문에는 1945년입니다)

 

죽림 조수문(1426~?)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되 학문이 빼어났고 비범한 기상을 나타냈다고 한다. 8살에 부모가 무엇인가를 알아 효로서 보은 할 것을 알아 효심이 깊었으며 부모를 공양하기 위해 벼슬살이에 나가지 않았다. 20살에 학업이 크게 성장했으나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서 성리학을 탐구하였다.


자신을 잦추고 근엄한 생활을 해왔으며 친지들의 권고에 의해 세조 14년(1468년) 생원시 3등으로 합격해 성균관 생원을 지냈으며 여러 번 벼슬에 천거를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향리로 돌아와 죽림(竹林)속에 정사를 짓고 강론하면서 일생을 마쳤다. 향리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등 미풍양속의 진작에 공적이 많아 사방의 학자들이 운집했으며 호남 유학의 근본이 되었다. 


그의 학문은 강호, 김숙자의 학맥을 승계했으며 점필재 김종직과 교유했던 바, 훗날 점필재는 조수문을 ‘호남의 진짜 유학자’ 라 칭송했으며, 박신극(1703-1770)의 행장에는 “호남의 유생이 죽림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저서로는 ‘성학지남(聖學指南)’ ‘작불론(作佛論)’이 있으며 문하로는 판서 윤달화, 현감 강백령, 교리 조호 등이 대표적이다.

고서 분향리에 있는 <죽림재>는 창녕조씨 문중의 글방으로 사용하기 위해 죽림 조수문이 창건했다. 초창기 건물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귀중한 책들과 함께 불에 타버렸고 인조 원년(1623)에 6대손인 삼청당 조부(三淸堂 曺溥)에 의해서 다시 세워졌으며, 현재의 건물은 1948년에 중수했다."(담양 뉴스. 2021.05.21)

 

죽림재

 

죽림사(竹林祠)

죽림 조수문 선생과 선생의 아들인 운곡 조호(雲谷 曺浩), 삼청당 조부와 소은 정민하(簫隱 鄭敏河)의 행적을 추모하기 위해 1708년에 문인과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 시절 철폐되었다가 2002년 복원되었습니다.

 

창원 조씨 삼선생 서원 유허비

삼선생은 죽림 선생과 두 아들 같습니다

 

뒤집힌 옥개석?

처음부터 비석 대좌로 조성한 부재 같았습니다

 

주초

죽림재 기둥

 

장서각(藏書閣)

 

효자정려(孝子旌閭)

삼청당 조부 선생의 정려비각

 

연당(蓮塘)

처음부터 반월(半月) 형으로 축조한 것인지, 방지원도(方池圓島) 형이 변형되었을까요?

 

석탑 옥개석을 확인하기 위한 답사이었지만

담양 고서 지방의 창녕 조씨 유허지와 내력을 주마간산으로 둘러보았습니다.

죽림재는 매화와 배롱이 전각과 잘 어울리는 숨은 장소라고 합니다.

 

2021.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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