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담양군

담양... 모현관(慕賢館)

임병기(선과) 2021. 8. 15.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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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현관(慕賢館)

대덕면 장동길 89-5

미암 종택. 미암 박물관과 더불어 장동마을에 있는 연못 위에 세워진 단아한 청석으로 지은 돌집입니다.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1513~1577)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42058

 

미암일기

개인 일기로는 가장 방대한 것으로 약 11년 간 동안의 기록이 실려져 있습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9976

 

모현관은 1957년 후손들이 훗날 보물로 지정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미암일기 등의 서책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수장고이었습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서지류가 습기에 취약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화재 예방 목적으로 방지도원처럼 조성된 연못 중앙에 지은 것 같습니다. 

 

정면과 후면에 출입문을 달고, 정치하게 바른돌 쌓기로 세운 사방 벽면에는 상하로 유리창을 내었으며, 미암종택 앞에 가설된 돌다리를 통하여 출입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미암종택,사당

사진 우측 상단에 보이는 건물입니다.

 

아침 이른 시간이어서 아쉽지만 종택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측면

 

측면. 후면

 

후면

미암종택에서 다리를 건너 출입할 수 있습니다

 

후면. 측면

 

정유년. 1957년

 

돌다리

 

미암(眉巖) 류희춘(柳希春·1513~1577), 덕봉(德峰) 송종개(宋種介·1521~1578)

 

"우슬재 넘으면 해남이다. 고개가 높아 소도 무릎을 꿇는다는 그 재 넘어 저수지 사이로 난 숲길을 따라, 해촌서원 가는 길이다. 초록도 지고, 단풍도 지고, 나무는 옷을 벗어버린 가을의 끝자락. 자리 잡지 못한 낙엽들이 바람 따라 쓸려 다니고 있다. 겨울과 어둠이 내리기 직전의 실루엣 같은 시간들. 사랑이 사랑에 도착하기 전에 더 설레고 조바심 나는 것처럼, 500년 전 조선의 최고의 격조높은 로망스를 찾아가는 발길이 그러하다. 해촌서원에는 최부, 류희춘, 임억령, 윤선도 등 6현이 배향되어 있는데, 지금 이야기는 미암과 덕봉에 관한 것이다.

 

미암(眉巖)은 류희춘(柳希春·1513~1577), 덕봉(德峰)은 송종개(宋種介·1521~1578)의 호다. 둘은 부부다. 통상 미암 류희춘과 송덕봉이라고 부르지만, 여인으로서 덕봉 역시 선비로 모자람이 없어 '미암과 덕봉'이라고 나란히 쓰고 싶다. 미암은 16세기 대표적 성리학자이자 관인이다. 해남에서 태어났고 24세에 덕봉과 혼인했다. 2년 뒤 과거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무장현감 등을 지냈다. 그러나 35세에 뜻하지 않은 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을 떠나 21년간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선조 때인 50대에 해배되어 홍문관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 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미암은 호남의 거유이기도 하지만 '미암일기'(보물 제260호)의 저자로 더욱 유명하다. 덕봉의 자는 성중(成中), 이름은 종개(種介), 호는 덕봉이다. 담양에서 태어났으며 사헌부 감찰을 지낸 송준(宋駿)의 딸이다. 덕봉은 자질과 성품이 명민하여 성장하면서 서사(書史)와 경서를 두루 섭렵했고, 일찍이 문재를 드러냈다. 문학에 대한 소질은 집안 내림으로 '매창월가'라는 조선전기 대표적 은일가사를 남긴 이인형이 외조부다. 덕봉이 마천령 고개에 올라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지은 시 한수.

磨天嶺上吟(마천령상음)

걷고 또 걸어 마천령에 이르니

行行遂至摩天嶺(행행수지마천령)

동해는 평평한 거울처럼 끝없이 펼쳐있구나

東海無涯鏡中平(동해무애경중평)

부인의 몸으로 만리 길 어이 왔는가

萬里婦人何事到(만리부인하사도)

삼종의 도는 무겁고 이 한 몸은 가벼운 것을

三從義重一身輕(삼종의중일신경)

 

1560년 덕봉은 남편을 찾아간다. 미암은 을사년 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어 있는데 그곳에 가는 길이다. 홀로 시어머니 삼년상을 치르고 저 땅끝 해남에서 출발하여 머나먼 여정을 나섰다. 함경 남북을 가르는 마천령 고개에 서서 회한을 담은 시를 한 수 읊는 중이다. 오랜 유배의 세월,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천리 길도 아니고, 이천리 길도 아니고, 장장 삼천리 길의 대장정으로 이끈 것이다. 바람이 세고 일기가 고르지 않아 맑은 날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마천령 고개를 넘으면서 쓴 '마천령상음'에는 무거운 삼종지도를 벗어날 수 없는 여인의 회한과 유배로 고생하는 남편을 지켜주고자 하는 아내의 마음이 담겨 있다. 덕봉은 그 때 먼 길에 찬바람 쐬고 병을 얻어 훗날 오랫동안 고생하기도 한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1570년(선조3년) 유배에서 풀려 한양으로 돌아오게 된다. 미암은 홍문관 관리 벼슬을 하면서 덕봉에게 편지를 쓰는데, 그동안 일체 여색과 음악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자랑하면서 "당신은 이런 훌륭한 남편의 은혜를 입은 줄 알라"는 내용이었다. 그에 대한 덕봉의 답이 걸작이다. "겉으로 인의를 베푸는 폐단과 남이 알아주기를 서두르는 병폐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당신은 금욕적 삶을 강조하지만, 내가 홀로 시어머니 상을 치르고 삼천리 길을 걸어 당신을 찾아간 것과 비교하면 무엇이 더 무거운 줄 아느냐"고 따져 묻는 것이다. 사랑스러우면 서도 당찬 덕봉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거기에 미암은 당신의 지적이 맞는 말씀이라고 화답한다. 서로 우대하고 존중하면서 오고간 수많은 삽화들이 미암일기에 잘 남아 있다.

 

덕봉이 살았던 조선 중기는 과도기였다.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서 혼례를 올리고 처가살이를 하는 풍습이 일반적이었고, 딸이 부모를 모시고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며 조상의 제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이처럼 고려부터 내려오던 전통적 모계질서와 새롭게 가부장적 사회로 변화해 가는 성리학적 질서 속에서 덕봉은 스스로 결정하고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편이 유배 가 있는 동안 홀로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갔고, 시어머니 사후에 혼자 상을 치르고, 남편의 유배지까지 삼천리 길을 다녀온 것 하며, 그리고 유배를 떠날 때 딸려 보냈던 첩(방긋덕)이 함경도에서 낳은 네 명의 딸을 가족으로 품어 키우고 시집보내는 일까지, 어진 마음, 넓은 아량, 높은 부덕(婦德)을 잘 보여준다.

 

반면에 덕봉은 친정 아버지의 묘에 비석 세우는 일과 관련하여 바르고 당찬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덕봉은 남편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비석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친정아버지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덕봉은 석물은 마련했으나 돈이 부족하여 애를 태우고 있는데도 남편이 송씨 형제끼리 알아서 하라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이다.

 

덕봉은 글(착석문서, 착석문)을 통해 미암의 태도를 논리정연하게 비판한다.

첫째, 미암이 장가오던 날 친정아버지가 '금슬백년(琴瑟百年)'이란 시구를 보고 어진 사위를 보았다고 좋아하던 일,

둘째, 내 형제는 과부가 된 사람도 있고 가난하여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어 그 비용을 거둘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셋째,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장사 지내고 제사를 모셔 남의 며느리로서 부끄러운 점이 없이 행했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미암은 장인이 돌아가셨을 때 오직 소식(素食)만 하고 삼년 안에 한 번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만일 자신이 이런 평생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다면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덕봉의 이러한 일화는 아내와 여인의 나약한 모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떳떳한 행동과 논리를 근거로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고자하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덕봉은 신사임당, 허난설헌 등 조선의 여류 유명 문인들과 달리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남편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학문과 문학을 통해 소통하고, 우리나라 여성문학사에서 개인문집을 가진 최초의 여성지식인으로도 손꼽힌다.

 

덕봉은 1577년 미암이 숨을 거둔 지 8개월 후 향년 57세로 남편의 뒤를 따라 갔다. 미암은 해남 해촌사와 담양 미암사당에 배행되어 있으며 담양에 미암박물관이 건립되어 부인 송덕봉과 함께 담양군, 선산유씨 종가, 홍주송씨 발전사업추진위원회에 의해 다양한 현충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 머무는 동안 필연적으로 인연을 맞이한다. 부모와 자식과의 만남, 그리고 억겁의 연이 닿아야 만날 수 있다는 부부의 가약을 맺는다. 특히나 남끼리 만나는 부부의 인연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기적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부부를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할까? 나를 알아주는 지음, 다들 친구 같은 부부가 되길 원할 것이다. 조선시대 부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서로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소통하고 마음을 나누는 친구 같은 관계를 원했을 것이다. 그 가부장적 시대의 굴레 속에서 대등한 부부관계를 실천한 것이 미암과 덕봉이다. 'Ministry of Gender Equality & Family' 우리나라 여성가족부의 영문 표기이다. 여성을 'Gender Equality', 양성평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지금도 이루지 못한 그것을 벌써 5세기 전에 실천적 삶으로 산 사람들이 있었으니, 미암과 덕봉이 아닐까 한다."

 

(출처...네이버 블로그 긴하루 님 /  '미암일기'의 저자, 미암 유희춘과 덕봉 송종개|작성자 몽촌

아침 이른 시간, 더구나 코로나 때문에 미암박물관도 닫혀 있었습니다.

모현관, 미암종택, 미암박물관을 둘러보아야 올바른 답사 동선인 줄 잘 알지만, 이른 아침 종택 방문은 결례이기에 훗날을 기약하며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미암일기 국역본을 구입하여 읽은 기억이 있는데, 책꽂이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저의 기억을 제가 믿지 못할 정도로 기억의 오류가 심하여 구입 여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2021.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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