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담양군

담양...용추사 부도전.소요대사 부도

임병기(선과) 2018. 4. 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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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추사

얼마전 우리카페 시나브로님이 내블로그에 용추사 소요대사 부도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럴리가?

설마 영조의 모후 숙빈 최씨의 원당사찰인 용구산 용흥사와 착각했을까요?

 

용추사

계곡을 따라 진입한 것 같은데 산 하나를 완전히 넘어 위치하고 있었으며, 기억속의 가람은 아니었습니다.

어쩔수 없다고 자위해보지만 서글픈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이다. 526년(백제 성왕4) 혜총()과 혜증()이 함께 창건하였다. 624년(무왕25)신라의 원광()이 중창한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주지 있던 태능()이 승병을 모아 왜군과 싸웠다. 이 때 금성산성()에서 활약하던 김덕령() 장군과 합세했는데, 왜군이 절에 불을 질러 모두 태웠다. 1630년(인조 8)에 태능이 중창하였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1799년(정조 23)에 나온 《범우고》에는 용천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1905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하며, 1905년 이후에는 최익현() 등 의병들이 모이던 호국사찰이었다. 1949년 다시 불에 탄 것을 1961년 본래의 절터에서 윗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초막을 짓고 복원한 바 있다"...다음백과

 

 

용추사 부도전

근자에 조성한 부도, 조선후기부도 5기와 부도재 2기가 용추사 입구 좌측 산아래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부도(1)

지대석위에 상하대좌. 옥개석,보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대좌는 뒤집현진 상태로 보이며, 덩굴문을 새겼습니다.

탑신은 원형이며, 상부에 연화문이 새겨진 상대석으로 추정되는 부재를 올려두었습니다.

옥개석 물매는 얕으나 마루를 높이 새겼으며, 귀꽃을 음각하엿습니다.

상륜에는 일부 부재만 남아 있습니다.

 

 

 

 

당호를 새기지 않았습니다.

 

 

부도(2)

맨아래 부재는  후보물로 보입니다.

팔각 지대석에는 안상을 새긴 듯 하지만 분명하지 않습니다.

대석에는 저석을 표현하였으며, 복판 복련과 귀꽃을 새겼습니다.

원구형 탑신

옥개석은 기왓골과 귀꽃을 새겼습니다.

상륜부는 결실된 상태입니다.

 

 

 

 

 

 

부도(3)

동일 부재일까요?

 

 

부도(4) 소요대사 부도입니다.

 

소요대사 태능(太能 : 1562∼1649)

소요대사는 호남 담양 사람으로, 부휴당(浮休堂)선수(善修)에게서 경전을 배우고, 서산대사휴정(休靜)에게서 선을 닦았으며, 사명유정(四溟惟靜), 편양언기(鞭羊彦機), 정관일선(靜觀一禪) 등과 함께 문파를 형성하여 조선 후기 불교계를 이끈 인물이다. 그의 시문을 엮은  『소요당집(逍遙堂集)』에 행장이 전한다.

 

용추사 외에도 소요대사 부도는 백양사, 구례 연곡사, 연천 심원사지.김제 금산사에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남 미황사에도 부도가 있다고 전하고 있으나 분명하지 않습니다.

 

김제 금산사 소요당 비문에는 입적후 김제 금산사, 철원 심원사(현재 연천)에 사리를 봉안하였다는 명문이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절의 부도는 이후 분사리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경기도 연천 심원사지

 

 

장성 백양사(현재는 실내성보박물관에 있다.)...미카엘님 사진

 

 

구례 연곡사

 

탑신에 소요대사지탑 순치육년 경인 (逍遙大師之塔 順治六年庚寅) 명문을 새겼다.  

순치 6년은 조선 인조 27년(1649년)으로 간지(干支)로는 을축(乙丑)에 해당하며 소요대사가 입적한 해 입니다.

경인(庚寅)은 그 이듬해인 1650년(효종 1)에 해당합니다.

 

김제 금산사 소요당 부도비문에 의하면 처음에는 금산사, 철원 심원사(당현재 연천)에 부도를 모셨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연곡사 부도는 이듬해 분사리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제 금산사.소요당대사혜감비 消遙堂大師慧鑑碑

 

"옛날 達磨大師는 중국으로부터 印度로 귀국하고자 서쪽 葱嶺으로 돌아갈 때 신 한짝을 남겨두는 靈蹤을 남겼고 , 李翶는 동쪽 藥山에 올라가서 藥山惟儼스님으로부터 一聲의 妙蹟을 전하여 받았거늘, 하물며 우리들은 스님의 舍利를 받들어 모시는데 있어서 어찌 浮圖의 建造를 빼 놓을 수 있겠는가!


스님의 속성은 吳氏이고, 法諱는 太能이요, 호남 潭陽 출신이다.嘉靖四十一年 壬戌 9월에 출생하였다. 어머니의 꿈에 어떤 神僧이 小字로 書寫한 大乘經典 .을 전해 주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여 출생하였는데, 아이의 모습이 俊秀하며 특이하여 꿈에 보았던 스님과 똑 같았다. 13살 때 長城 白羊寺로 가서 眞大師를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黃蘗希運의 禪旨를 參究하여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호를 逍遙라고 한 것은 自性에 一任하여 逍遙自在하라는 뜻이다. 자취를 一般大衆들과 함께 하여 인연따라 걸림이 없었다. 南國 을 두루 參訪하면서 大藏經을 浮休堂 善修스님으로부터 受學하고, 다시 西山 을 찾아가서 本源의 淸淨한 自性을 깨달았다. 그 후 금강산에 數年 동안 주석하면서 一生에 대한 玉偈를 연설하였다. 그 후 지리산으로 가서 孤峰頂上에神興庵을 얽어 모든 攀緣을 끊고 밝은 거울을 높이 걸어 놓고 비추었으며, 福區를 정하여 燕谷寺를 창건하고 叢林을 개설하여 大衆을 지도하였다. .


舊觀을 勝境으로 바꾸고, 앉아서 說法하면 원숭이가 마치 山처럼 엎드려 聽法하고, 서서 講演하면 龍象大德들이 마치 냇물이 흘러오듯 찾아들어 그의 門下는 찬란하였고 또한 入室建幢하는 제자로가득찼다. 榮華로움을 버리고 높은 뜻을 품었으므로 王으로부터 特殊한 恩錫을 입었지만, 전혀 마음에 기꺼움이 없었으며, 일을 해결하는 훌륭한 能力으로 丙子胡亂 때, 국가를 위하여 큰 功을 세웠으나, 조금도 공을 내 세우는 마음이 없었다.

 

곧 바로 山中으로 들어가 깨달음의 동산을 깊이 탐구하며 보배로운 뗏목을 미혹한 나루에 띠우고, 무성하게 經典(眞筌)을 闡揚하며, 자비의 배를 苦海에 띠우고, 涅槃의 境地를 유희하다가 入寂함에 다달아, 錫杖을 세우고 臨終偈(“解脫非解脫 涅槃豈古鄕 吹毛光爍爍 口舌犯鋒鋩”)를 설하시니 平常時와 전혀 다름이 없었다. 계송이 끝나자마자 홀연히 入寂하시니, 己丑年 (1649년) 11월 21일이었다.세수는 90세에 2살이 모자랐고(88세),. 法臘은 七秩(70세)에3살을 더하였다. 방안에는 香氣가 가득하였고, 처마에는 祥瑞로운 光明이 서려 있었다. 衲子들이 千餘名이나 雲集하였으며, 法의 비가 三千大千世界를 적셔주었다. 闍毗 하는 날에 神珠인 舍利가 祝願하는 시간에 空中에서 나타났으며, .仙骨도 또한 공중에서 나타났다.


이를 봉안할 珎臺와 淨土를 선정하여, 鐵原 寶盖山 深源寺와 全州 毋岳山 金山寺 .에 塔을 세우고 舍利를 봉안하였다. 그의 弟子들이 스님이 入寂한 後 3년이 되던 해에 더욱 깊어가는 追慕의슬픔을 안고 千里의 먼길을 무릅쓰고 찾아와서 옹졸한 文章임에도 不拘하고 나에게 碑文을 청탁함이 매우 정성스럽고 간절하였으므로 나는 이 청탁을 듣고 크게 웃었지만 무슨 긴 말이 必要하겠는가! 銘하여 이르기를

 

無의 根本 본래 없어 없을 것없고 有라지만

有를 어찌 있다 하리요!

 

有何有有 : 멸하지만

그 本性은 滅하지 않고 偶然이라 말하지만 偶然 아닐세!


이 世上의 어떤 것이 이에 앞서며
제아무리 長壽한들 이에 뒤지랴!

어느 누가 이것보다 長壽할건가?
그의 實體 永遠하여 生滅이 없네!

原任 의정부 영의정 李景奭 .은 비문을 짓고


前行사간원 正言 趙晋錫 .은 비문과 篆額을 썼다.


歲舍
辛卯年 9월 일.

※ 이하 陰記의 註釋은 생략한다."...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

 

 

금산사.(傳)소요대사 부도

 

아쉽지만 미황사에서는 소요당부도로 추정되는 부도를 추적하지 못했습니다.

 

 

소요대사 부도

여러매로 결구된  방형 지대석위에 하대저석과 하대상석, 앙련이 조식된 중대석 받침을 일석으로 조성하였으며

중대석과 상대석은 일석이며, 팔각상대석에는 앙련을 크게 표현하였습니다.

팔각 탑신석에는 당호를 새겼고, 옥개석에는 내림마루, 기왓골,귀꽃, 겹처마가 보입니다.

상륜은 모호합니다.

 

하대석에 귀꽃에 표현된 다양한 상은 미황사 하부도전의 부도를 연상시킵니다.

혹 용추사 소요대사 동물 문양을조성한 장인그룹과 미황사 부도를 조성한 그룹은 동일 계열 아니었을까요?

 

예전 미황사 답사기에서 미황사 홈페이지에서 발췌하여 언급했던 내용으로 미루어 저의 추측도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듯 합니다.

 

"묘향산 원적암에서 열반에 드신 서산대사의 유지를 받들어 직계상좌인 소요대사와 법을 이은 손상좌 편양선사가 서산대사의 의발을 모시고 대둔사에 내려오게 된다.


소요대사는 서산대사의 의발을 대둔사에 모시고 편양선사로 하여금 법을 펼 수 있도록 도량을 만들어 준  후 함께 내려온 서산대사 직계상좌 들과 미황사에 모여 살게 된다.


그래서

대둔사 부도전에 모셔진 대부분 스님들은 편양선사의 법맥을 이으신 분들이고

미황사 부도전에 모셔진 대부분 스님들은 소요대사의 법맥을 이으신 분들이다."

 

 

지대석.하대석.중대석,상대석

 

 

하대석 사자.

 

 

하대석 거북 2마리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하대석 게

 

 

하대석. 세호

 

 

하대석 상부

앙련이 조식된 중대석 괴임

중대석과 상대석은 일석

상대석의 큼직한 앙련

 

 

탑신

소요당 逍遙堂 명문

 

 

옥개석 하부

겹처마로 표현 하였습니다.

 

 

옥개석

내림마루와 기왓골이 보입니다.

마루끝에는 문양 또는 귀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상륜부는 모호합니다.

 

 

용추사에 소요대사 부도를 봉안한 까닭은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용추사 주지로 있던 태능()이 승병을 모아 왜군과 싸웠다. 이 때 금성산성()에서 활약하던 김덕령() 장군과 합세했는데, 왜군이 절에 불을 질러 모두 태웠다. 1630년(인조 8)에 태능이 중창하였다."라는 사적으로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부도(5)

상륜부만 남아 있는 부재 입니다.

 

 

부도(6) 옥개석만 남아 있습니다.

 

 

부도(7) 월파당月波堂 부도

우리나라에 월파당 당호를 가진 부도가 여럿 있으나 동일 인물 여부는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팔각대좌는 죽절문으로 구획하였으며

면마다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월파당月波堂 명문

 

 

옥개석, 복발 ,보주

 

 

 

 

 

저는

2005년 이전 어느 해에 용추사에 들렸을까요?

그냥

뷰자데 일까요?

 

20018.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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