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라남도/강진군

강진...월남사지 삼층모전석탑. 진각국사비

by 임병기(선과) 2021. 1. 6.
728x90
728x90

 

짧은 겨울해는 벌써 이부자리에 들었지만

숙소로 가는 길에 야간 답사의 후레쉬 신공을 맛보기 위해 월남사지를 들렸습니다.

 

 

답사객이라면 최소 몇 번은 들렸을 월남사지

 

오류도 있지만 옛글을 가져왔습니다.

http://blog.daum.net/12977705/8723865

 

 

 

 

 

 

 

 

 

 

 

 

 

 

진각국사 비

동행한 세종아빠님이 비좌 측면 해와달을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였는데.

 

짜릿한 흥분...

 

진각국사혜심眞覺國師慧諶 (1178~1234)

속성은 최씨(崔氏). 자는 영을(永乙), 호는 무의자(無衣子). 나주 화순현 출신이다.

완(琬)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배씨(裵氏)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출가하기를 청했으나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항상 불경을 생각하고 주문을 외었다. 1201년(신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병환으로 고향에 돌아가 있으면서 불경을 공부했다. 다음해에 어머니가 죽자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의 지눌(知訥)에게 나아가, 재(齋)를 올려 죽은 어머니의 명복을 빈 다음 지눌 밑에 출가했다. 이때부터 혜심은 힘써 정진했는데 한때 오산(蜈山)에 있을 때는 반석(盤石) 위에 앉아 밤낮으로 선경을 익혔고 오경(五更)이면 게송(偈頌)을 읊었는데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려 듣는 사람들이 이로써 시간을 짐작했다고 한다.

 

또 지리산 금대암(金臺庵)에 있을 때는 연좌대(宴坐臺) 위에서 좌선을 했는데 눈이 내려 머리까지 쌓여도 오직 좌선에만 몰두했다. 1205년(희종 1) 지눌이 억보산(億寶山) 백운암에 있을 때 혜심은 스승을 찾아가 뵈었다. 지눌이 다 해어진 짚신을 가리키며 "신발이 여기 있는데 사람은 어디 있는가?" 하고 묻자, 혜심은 "왜 그때에 보시지 않았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또 어느 날 지눌이 조주(趙州)의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라는 화두와 대혜종고(大慧宗杲)의 10가지 병을 들어 대중에게 물음에, 모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에 혜심은 "3가지 병을 앓는 이라야 그 뜻을 알 것입니다"라고 했다. 지눌이 다시 "3가지 병을 앓는 사람은 어떤 곳으로 숨을 쉬는가?"하고 묻자 혜심은 손으로 창을 1번 내리쳤다. 이에 지눌은 방장에 돌아가 그를 불러 "나는 이제 그대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네. 그대는 불법을 임무로 삼아 본래의 서원을 바꾸지 말게"했다. 1208년 지눌이 그에게 수선사의 사주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지리산으로 피하여 오래 숨어 지냈다.

 

1210년 지눌이 입적하자 왕명에 의해 수선사에 들어가 조계종의 2세가 되었다. 이후 그는 조정의 지원을 받아 수선사를 확장하고 선사의 선풍을 더욱 진작시켰는데, 그의 문하에는 뛰어난 선납(禪衲)들도 많았지만 최우(崔瑀)를 비롯해 당시 무인집권자들의 가족과 무인정권에 참여했던 수많은 문무 관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혜심은 1213년(고종 즉위)에 선사(禪師)를 제수받고 다시 1216년에는 대선사로 올려졌다.

 

1219년 왕이 단속사(斷俗寺)의 주지로 명하자 여러 번 사양하다가 이듬해 부임했다. 1234년 6월 26일 문인인 마곡(麻谷)에게 "이 늙은이가 오늘은 너무 바쁘다"라고 말하고 가부좌한 채 앉아서 입적했다. 이때 나이 56세, 법랍 32세였다. 왕은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부도의 이름을 원조지탑(圓炤之塔)이라 사액(賜額)했다.

 

부도는 광원암(廣遠庵) 북쪽에, 진각국사비는 강진군 월남산 월남사(月南寺)에 각각 세워졌다. 그의 비명에는 "승과(僧科)를 거치지 아니하고 승직에 오른 것은 사(師)가 처음이었다"라고 적혀 있다. 그의 문하에는 청진몽여(淸眞夢如)·진훈(眞訓)·각운(覺雲)·마곡 등이 있으며 청진몽여는 그의 뒤를 이어 수선사 제3세 법주가 되었다.

 

혜심은 지눌의 뒤를 이어 수선사 제2세로서 간화선(看話禪)을 크게 떨쳤다.

간화선은 화란 화두의 준말로서 화두를 근거로 공부하는 선풍을 간화선이라 하는데, 중국 당나라말 이후부터 시작하여 송대에 이르러 대혜종고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처음 전해졌다. 혜심도 지눌과 같이 수행의 요점은 지(止)와 관(觀), 정(定)과 혜(慧)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외에 혜심은 간화일문(看話一門)을 들어 이것이 가장 빠른 길이며 지관·정혜도 모두 이 속에 포함된다고 했다.

 

혜심이 정혜쌍수를 수행의 요체로 본 것은 지눌과 동일하지만, 지관·정혜가 간화일문에 포함된다고 함은 그의 독특한 견해이다.혜심은 선교융회의 입장과는 달리 한결같이 간화선만을 주장했고, 선과 교라는 상대적 의미에서 교를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선안에서도 이론적인 선은 옳지 못하다고 물리쳤다. 그는 "망상을 버리고자 하면 간화만한 것이 없다"라고 했으며 선수행에서의 간화일문에 의한 실참실오(實參實悟)를 한결같이 강조했다.

 

그는 또 유학에도 통하여 유불(儒佛)이 다를 바 없다고 했다. 저서로는 〈선문염송집 禪門拈頌集〉(30권)·〈심요 心要〉(1편)·〈조계진각국사어록 曹溪眞覺國師語錄〉(1권)·〈구자무불성화간병법 狗子無佛性話揀病法〉(1편)·〈무의자시집 無衣子詩集〉(2권)·〈금강경찬 金剛經贊〉(1권)·〈선문강요 禪門綱要〉(1권) 등이 있다.

 

 

순천 송광사 진각국사 부도

 

 

순천 송광사 진각국사 부도

 

송광사 16 국사 부도

http://blog.daum.net/12977705/8725338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 1178(명종 8년)~1234(고종 21년)]의 비.

고려 후기의 대표적 문인 이규보(李奎報)가 짓고 김효인(金孝印)이 써서 1235년(고종 22)에 세웠다. 비는 현재 원 자리에 남아 있는데 귀부 위에 절단된 비신이 있고 마모 상태가 심하여 글자를 판독하기 어렵다. 비문은 수선사의 제2세 사주인 진각국사가 향공진사의 아들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한 후 보조국사에게 출가하여 간화선을 수행하고 보조국사에 이어 수선사의 사주가 되어 강종의 지원으로 수선사를 확장하고 집정자 최우는 두 아들을 국사에 출가시키는 등 연관을 맺고 월등사에서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진각국사는 입적하자 입적처인 월등사에서 다비하여 영골을 거두어 본산인 송광사에 돌아가 광원암에 탑을 세웠다 하였는데 실제로 비는 월남사에 있다. 음기는 입적 후 16년이 지난 1250년(고종 37)에 최자(崔滋)가 짓고 탁연(卓然)이 썼는데, 내용은 음기 건립 사실과 승려와 재가 문도들을 열거하였다. 그런데 문도에 대선사, 승통, 선사, 수좌, 삼중대사 이하로 이어져 이때부터 선사의 문도에 교종 승계를 지닌 승려가 등장하는 자료가 된다. 또한 재가신도들은 당시 왕족과 재추 등 고위관료가 대거 등장하여 이를 분석하여 수선사와 고려 정계와의 관계를 밝힌 연구의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조계산 제이세 고 단속사 주지 수선사주 증시 진각국사 비명 병서 봉선술

(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碑銘 幷序 奉宣述)...출처.동문선(한국고전 종합 DB)

 

이규보(李奎報)

심법(心法)이 있은 때로부터 무릇 납자(衲子 승의(僧衣))를 입은 선승으로서 꼿꼿하게 앉아 수행하는 자들의 마음을 추구하여보면, 누군들 서리와 달과 더불어 깨끗함을 다투고자 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그러나 종문(宗門)의 명품(名品)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에 이르러서는 능히 심정에 아주 잊을 수 있는 자가 없다. 이에 이것을 혐오하여 드디어 깊이 바위로 둘러싸인 골짜기에 숨어서 가만히 마음의 요긴함을 닦으며, 결코 그 명(名)의 누(累)에 얽히지 않으려고 하여도 명예가 스스로 쫓아오는 자가 있다면, 누가 그런 사람일까. 우리의 진각국사(眞覺國師) 같은 이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더구나 국사께서는 젊은 때부터 이미 문장(文章)에 종사하였고, 얼마 되지 않아서 곧 어진 선비의 관문인 사마시(司馬試)에 뽑혔으니, 학문이 정밀하지 않음이 아니며, 명수(命數)가 불우(不遇)한 것도 아니다. 만약 잠깐 동안만 참았다면 문득 대과급제한 사람의 명단에 올라 길이 앞길로 달렸으면 이름 드날리는 사대부가 될 것은 틀림이 없을 터이다. 하지만 도리어 이루어지는 명예를 떼내어 버리고 오히려 일찍이 세속에 감염된 것을 털어버리지 않았음을 한탄하였으니, 그의 초연한 세상 밖에 뛰어나는 마음을 또한 여기에서 알 수 있으니 옛사람 중에서 찾아본다면 대체로 법융(法融 우두선(牛頭禪)의 개조(開祖)인 중국사람)이나 천연(天然) 선사(禪師)에게 비길 것이다.

 

국사의 휘(諱)는 혜심(惠諶)이요, 자는 영을(永乙)이며, 스스로 무의자(無衣子)라고 호하였다. 속성(俗姓)은 최씨(崔氏)요, 이름은 식(寔)이니, 나주(羅州) 화순현(和順縣) 사람이다. 고(考)의 휘는 완(琬)이니, 향공진사(鄕貢進士)다. 어머니 배씨(裵氏)의 꿈에 하늘 문이 활짝 열려 보였으며, 또 꿈에 천둥을 만난 것이 세 번이나 되었다. 이어 임신하여 무릇 열두 달만에 낳으니, 태의(胎衣태의 껍질)가 거듭 감기어서 가사를 메고 있는 형상 같고, 태의가 터지자 두 눈을 모두 감고 있더니, 7일을 지난 뒤에야 눈을 떴다. 매양 젖을 먹은 뒤에는 곧 몸을 뒤쳐 어머니를 등지고 누으니, 부모가 이상하게 여기었다. 아버지가 일찍 죽었으므로 어머니에게 중이 되기를 빌었으나, 어머니는 허락하지 아니하고 힘써 유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그러나 항상 불경을 외우며 주문(呪文)을 갖고 오더니, 오래 되어서 드디어 부처의 힘을 얻게 되었다. 음란한 무당을 배척하고 요사스러운 신사(神祠)를 헐어 버리기를 좋아하였으며, 혹은 이따금 사람의 병을 구제하여 효험이 있었다.

 

승안(承安) 6년 신유년에 사마시의 과거를 보아 합격하고, 이 해에 대학(大學)에 들어갔다가 어머니의 병보(病報)를 받고 드디어 고향에 돌아왔다. 족형 배광한(裵光漢)의 집에서 어머니의 병을 모시면서 생각을 모아 관불삼매(觀佛三昧)의 경지에 들어갔더니, 어머니의 꿈에 여러 부처와 보살이 두루 사방에 나타나 보였다. 깨니 병이 나았었다. 배광한씨의 부부(夫婦)도 또한 이 꿈과 같은 꿈을 꾸었다. 다음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 때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조계산(曹溪山)에서 새로 수선사(修禪社)를 열어서 도화(道化)가 한창 성하였다. 사(師)는 급히 가서 참례(參禮)하고 재(齋)를 올려 어머니의 복을 빌기를 청하고, 이어 머리깎고 중이 되기를 원하니 보조국사가 허락하였다. 그날 밤에 외삼촌의 꿈에 사의 어머니가 하늘에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처음에 사가 국사를 뵈올 때에 국사가 보고 중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다시 보니 아니었다. 이보다 먼저 국사가 꿈을 꾸니, 설두현선사(雪竇顯禪師)가 사원에 들어와 보이므로 마음에 이상하게 여겼는데, 이튿날 사(師)가 와서 참례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더욱기이하게 여기었다.

 

사가 일찍이 오산(蜈山)에 살고 있었는데, 한 반석 위에 앉아 밤낮으로 항상 선정(禪定)을 익히어, 매양 오경(五更)에 이르도록 매우 큰 소리로 게송(偈誦)을 부르니, 소리가 10여 리에 들리어 조금도 때를 어기지 아니하니, 듣는 이가 이것으로써 아침을 짐작하였다. 또 지리산 금대암(金臺庵)의 연좌대(宴坐臺) 위에 눈이 쌓여 머리까지 묻혔으나, 오히려 우뚝하게 앉아 말라죽은 나무같이 움직이지 아니하니, 여러 사람들이 그가 죽은 것으로 짐작하고 흔들었으나 대답하지 아니 하였다. 그는 몹시 힘써 고행함이 이와 같았으니, 무릇 도와 더불어 정기가 뭉쳐, 죽고 사는 것을 마음 밖에 육체를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겠는가.

 

을축년 가을에 보조국사가 억보산(億寶山)에 있었다. 사가 선승(禪僧) 두어 사람과 같이 가서 뵈옵고자 하여 산 밑에서 쉬고 있는데, 암자와의 거리가 천여 보나 떨어졌건만, 멀리 국사가 암자 안에서 모시는 자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가 게를 지었는데, 대략 이러하다.

 

아이를 부르는 소리는 송라(소나무와 칡덩굴)의 아득한 안개를 뚫고 / 呼兒響落松蘿霧
차를 달이는 향기는 석경 바람에 전해 오도다 / 煮茗香傳石徑風

 

하였다. 국사에게 참례하게 되었을 때 이와 같이 이야기하니, 국사가 그렇다 하고 손에 쥐었던 부채를 사에게 주었다. 사가 또 게를 지어 올리기를,

 

옛날에는 국사님의 손 안에 있더니 / 昔在師翁手裏
이제 와선 제자의 손바닥에 있구나 / 今來弟子掌中
만약에 들끓는 번뇌를 만나게 되면 / 若遇熟忙狂走
흔들어 청풍을 일으키는 것이 좋겠소 / 不妨打起淸風

 

하니, 국사는 사를 더욱 큰 그릇으로 여기었다. 또 하루는 국사를 따라가는데, 국사가 어떤 떨어진 신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신은 저기 있는데 사람은 어느 곳에 있는가.” 하니, 사가 대답하기를, “어찌 그 때에 서로 보지 않았던가.” 하니, 국사가 크게 기뻐하였다. 또 조주종심선사(趙州宗諗禪師)의 개(犬)에는 불성이 없다란 화두를 들고 이어 대혜고선사(大慧杲禪師)의 십종병(十種病) 이야기를 들어 물으니, 여러 중들은 대답이 없었는데, 사가 대답하기를, “삼종병인(三種病人)이라야 바야흐로 그 뜻을 해득할 것입니다.” 하니, 국사가 말하기를, “삼종병인은 어떤 곳을 향하여 기운을 내느냐.” 하였다. 사가 손으로 창문을 한 번 내리치니, 국사는 크게 껄걸 웃었다. 방장(方丈 참선하는 방)에 돌아와서 다시 은밀히 불러서 더불어 이야기하고 기뻐하며 말하기를,“내 이미 너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됨이 없다. 너는 마땅히 불법을 펴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고 본래의 소원을 바꾸지 말아라.” 하였다.

 

태화(泰和) 무진년에 국사가 사에게 명하여 자기의 자리를 잇게 하고, 즉시 안규봉(安圭峰)으로 물러가니, 사가 굳이 사양하고 드디어 지리산으로 가서 형적을 끊어버린 지 두어 해가 되었다. 대안(大安) 경오년에 국사가 입적하여 제자들이 임금에게 보고하여 칙명을 받들고 사에게 주지를 계승하게 하니, 사가 부득이 사원에 들어가 법당을 열었다. 이에 사방에서 학자와 도인(道人), 속인 중에 높은 사람과 숨어 있는 늙은이들이 구름처럼 달리고, 그림자처럼 따라서 모여들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강당이 매우 좁게 되니, 강종(康宗)이 듣고 주무 관원에게 명하여 증축하게 하고, 여러 번 중사(中使 왕명을 전하는 내시)를 보내어 공사를 독려하였다. 드디어 넓혀서 크게 만들고 또 사자(使者)를 보내어 만수가사(滿繡袈裟)와 마납(磨衲 비단으로 된 중의 옷) 각 한 벌과 아울러, 차(茶)ㆍ향ㆍ보병(寶甁) 등을 내리었다. 인하여 법요(法要 교법의 요의〈要義〉)를 찾으므로 사가 《심요(心要)》라는 것을 찬술하여 올렸다. 오늘날까지 그 책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이로부터 공경(公卿)ㆍ귀척과 사방의 방백(邦伯 지방 장관들이 소문을 듣고 도(道)를 사모하여, 혹은 멀리서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닦고 혹은 친히 그 문하에 나아가 제자가 되는 이가 있어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모든 선(禪)을 강하는데, 자기를 지나치게 자신하면서 남에게 굽힐 줄 모르는 고집으로, 스스로 자기만한 자가 없다고 뽐내던 자도 사를 한 번 보고 나면, 깜짝놀라 공경하는 얼굴빛을 짓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스승으로 섬기기에 분주하였다. 지금 문하시중 진양(晋陽) 최공(崔公)이 사의 풍운(風韻)을 듣고 정성을 기울여, 간절히 사모함을 마지 못하여 여러 번 서울로 모셔 오고자 하였으나, 사가 마침내 오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천리의 먼 곳에서 서로 마음의 사귐이 마치 면대한 것 같았다. 다시 두 아들을 보내어 참례해 모시게 하고, 모든 사의 일상의 생활하는 자재(資材)와 기구를 힘을 다하여 마련하여 주지 않는 것이 없었고, 차와 향, 약과 맛 좋은 음식과, 이름난 과일과 도구(道具)와 법복(法服)에 이르기까지 항상 때를 맞춰 제공하기를 계속하여 끊지 않았다.

 

지금의 임금께서 즉위하여 제서(制書)를 내려 사에게 선사를 제수하고, 또 대선사로 가자하였다. 선시(選試)의 시험장을 거치지 아니하고 바로 승관직(僧官職)에 오른 것은 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참정 최홍윤(崔洪胤)공이 아직 재상이 되기 전에, 일찍이 사마시의 시관(試官)이 되었었다. 사가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얼마 안 되어 공은 들어가 정승이 되고 사는 조계(曹溪)에 머물렀다. 최정승이 자신을 제자라고 일컫고, 조계의 결사(結社)에 이름을 넣기로 원하여 편지로 그 뜻을 전하였는데, 그 사연의 대략은,“불광(佛光)은 백학사(白學士 백거이)와 더불어 함께 하기를 즐겨 하여 친히 큰 법[大乘]을 전수하였고, 숭악(嵩岳)은 하비서(賀秘書 하지장(賀知章))를 즐겨 맞아서 가만히 묘지(妙旨)를 전하였습니다.” 하였다. 사가 회답한, 대략에, “내가 전에 공의 문하에있었더니, 공이 지금 나의 사내(社內)에 들어오니 서로 손이 되고 주인이 되며, 서로 바뀌어서 스승이 되고 제자가 되었습니다.”하였다. 사람들이 듣고 서로 전해 가며 훌륭한 일이라고 찬탄하였다.

 

정우(貞祐) 기묘년에 조서를 내려 단속사(斷俗寺)에 머물라고 하였다. 사가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아, 다음 해에 원(院)에 들어갔다. 그러나 본사(本寺)를 상주(常住)의 처소로 하였다. 계사년 중동(仲冬)에 본사에서 병이 드니 진양공(晋陽公)이 듣고 크게 놀라, 임금에게 알려 어의 아무(某)를 보내어 진찰하게 하였다. 봄에 월등사(月燈寺)로 처소를 옮기었다. 마곡(麻谷)이 방에 들어가니 사가 말하기를, “늙은 놈이 오늘 병이 매우 중하다.” 하였다. 마곡이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이러합니까.” 하니, 사가 게(偈)로써 답하기를,

 

온갖 고뇌가 이르지 못하는 곳에 / 衆苦不到處
따로 하나의 건곤이 있다 / 別有一乾坤
또 이것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 且問是何處
크게 적멸한 열반의 문이다 / 大寂涅槃門

 

하였다. 사가 주먹을 일으켜 세우며 말하기를, “이 주먹을 막아야 선(禪)을 설명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믿느냐.” 하고, 드디어 손바닥을 펴 보이며 말하기를, “펴낸 다섯 손가락이 길고 짧음이 제 각기 다르지만…” 하고 주먹을 쥐면서 말하기를, “합하면 한 덩어리가 된다. 펴는 것도 합하는 것도 자유자재하여 하나이거나 여럿이거나 구애됨이 없다. 비록 그러하나 이러하기도 하고 이렇지 않기도 한 것이 주먹에 대한 본분설화(本分說話)이다. 이 본분설화는 무엇인가.” 하고, 곧 주먹으로써 창(窓)을 한 번 내리치며 껄걸 웃었다. 갑오년 6월 26일에 제자들을 불러 뒷 일을 부탁하고 마곡(麻谷)에게 말하기를, “늙은 내가 오늘 몹시 바쁘다.” 하니, 마곡이 대답하기를, “무엇을 가리킴이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사는 말하기를, “늙은 내가 오늘 몹시 바쁘다.” 하였다. 마곡이 멍하니 있으니 사가 미소지으면서 가부좌하고 죽었다. 다음날 월등사의 북쪽 산봉우리에서 화장하고, 유골을 주워가지고 본산(本山)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듣고 매우 슬퍼하고 진각국사(眞覺國師)의 시호를 추증하였다.

 

을미년 여름에 광원사(廣原寺)의 북쪽에 장사를 지내고 드디어 부도(浮圖 탑(塔))를 세우니, 임금이 원소지탑(圓炤之塔)이라고 사액하였다. 사의 향년은 57세이고 중으로써의 생활은 32년이었다. 사가 병든 때로부터 그가 살던 산의 돌이 무너지고 또 새 떼가 골짝에 가득하게 날아와 울기를 10여 일이나 하였다. 아, 그 이상함이여. 그의 평생에 그윽히 감응함과 신기한 이적(異蹟)은 거북이가 불계(佛戒)를 받고 두꺼비가 설법을 들으며, 까마귀가 산가지(籌)를 합하고, 황소가 길에 꿇어앉는 등의 일은 모두 세상에 전하는 바이며 문도가 기록한 바이지만, 유학하는 자의 말할 바가 아니므로 여기에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사는 천성이 온하하며 크고 착실한 위에, 이미 유학에서 불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외의 경서에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까닭에 불법을 말하여 선양할 때나 게송을 찬술할 때에는, 능숙한 재인(宰人)이 소를 해부하는 칼날을 자유자재로 놀리는 것처럼 여유가 있었다. 이러하지 않고서야 어찌 발자취가 서울 땅을 밟은 일이 없으면서, 능히 앉아서 온 나라의 숭앙함을 누림이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아, 정말 선문(禪門)의 바른 눈이며 육신이 그대로 보살인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의 법통을 계승한 노장(老長) 선승인 몽여(夢如)도 또한 법왕(法王)이다. 그가 일암거사(逸庵居士) 정분 군에게 청하여 사(師)의 행록(行錄)을 갖추어 초기(草記)해 가지고, 진양공에게 비(碑) 세울 것을 청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스님이 세상에 머물렀을 때에 사람들을 이롭게 함이 많았으니, 비석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소신에게 명하여 비명을 지으라고 하였다. 그 비명에 이르기를,

 

미소 이후로 / 微笑已後
심법을 전한 자 누구던고 / 傳心者誰
우리 삼한에서는 / 於我三韓
진각국사가 심법을 얻었다네 / 國師得之
나면서 탯줄을 가사처럼 메었으니 / 生荷袈裟
그 징조가 이미 기이하더니 / 其兆已奇
과연 바른 안목을 얻어 / 果得正眼
당시를 초월해 보았네 / 超視當時
스스로 이러한 불성을 보고 / 自見是性
남에게 말로 전하였네 / 傳人曰辭
법을 전함이 없다면 / 不有傳法
헤매는 자들이 무엇을 의지할까 / 迷者何資
강당에 올라가 말씀하시니 / 上堂擧話
그 말이 청산유수같았네 / 亹亹其說
국사의 혀는 곧 부처의 마음이며 / 舌是佛心
국사의 마음은 곧 부처의 혀라네 / 心是佛舌
침묵하는 것이 본래 자연의 자세이지만 / 默固自然
말하는 것도 또한 즐거워할 만하네 / 談亦可悅
몸이 깊은 바위 속에 숨어 살았는데 / 身遁深巖
이름은 어디로부터 새었을까 / 名從何洩
배우려는 자들이 달려가 모이니 / 學者趁追
그의 문하는 구름처럼 빽빽하였네 / 雲蒸文下
좌우에서 질문하니 / 左右扣之
응대할 겨를이 없어 / 應接靡睱
일찍이 나를 놓아 두어 / 曾不放我
잠시나마 한가롭게 앉아있게 하지 않았네 / 片時閑坐
반야(법에 계합한 최상의 지혜)에 훈도되어 / 熏染般若
여러 방백들이 / 列岳躬趨
입사하기를 간청하고 / 痛求入社
왕자와 공후들은 멀리서 읍하여 / 王公遙揖
친히 그 교훈을 받은 것처럼 하였네 / 謂若親炙
스님으로 계시던 32년 동안에 / 三十二臘
기름진 은택이 많은 사람들에게 미치어 / 膏液所及
그들의 마음을 / 有許多人
고루 배부르고 흡족하게 하였네 / 飽飫周洽
불법을 지키던 기둥이 부러졌다고 하니 / 法棟云摧
사람들의 눈에는 다같이 눈물이 샘솟듯하고 / 萬眼同泉
임금은 매우 슬퍼하여 / 上甚哀悼
얼굴빛이 참연하셨네 / 玉色慘然
종말에 대하여 추증하심이 매우 화려하니 / 贈終孔縟
총애의 은전은 이지러짐이 없네 / 寵典靡諐
소신에게 명하여 / 仍命小臣
큰 비를 세우고 공덕을 기리어 새기게 하였으니 / 豐碑是鐫
이 산은 차라리 기울지언정 / 此山寧騫
이 비석은 옮기지 않으리라 / 此石不遷

 

하였다.

 

 

 

 

 

 

 

 

2020.12.12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