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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진천군

진천...두타산 영수사

by 임병기(선과) 2020.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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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사靈水寺

"918년(태조 1년)에 증통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나 확실한 문헌 기록이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절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조선 말기인 1871년(고종 8)에 간행된 『호서읍지(湖西邑誌)』에 처음으로 기록이 나타나는데 간단히 위치만 소개되어 있다. 1937년 간행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영수사는 두타산에 있는데 절 뒤에 영천이 있으므로 절 이름을 영수사라 하였으며 삼한고찰이라 하였다”라고 적혀 있으며, 상산지(常山誌)에도 이와 같은 기록이 보인다.

 

영수사에서 전해 오는 중수기에 의하면 1624년(인조 2) 벽암대사가 중건하였고, 1831년(순조 30) 승려 묘익이 지방민과 힘을 모아 절을 중수하였다 하며, 1866년(고종 3) 이한이 다시 수축(修築)하였다 한다. 이후 수차례의 중건을 거치면서 근근이 유지되어 오던 조그마한 암자였으나 30여 년 전 혜철화상의 중창에 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디지털 진천 문화대전)

 

대웅전

마루 보수로 출입하지 못 했습니다.

 

영산회괘불도.보물 제1551호

『묘법연화경』에 의거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청문중을 중심으로 그린 영산회상도로서, 1653년 명옥을 비롯한 4명의 승려화원들이 그렸다. 석가모니의 대좌 앞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사리불을 비롯하여 좌우에 시립한 많은 권속의 묘사는 조선후기 영산회상도 중에서도 영산회상을 가장 장엄하고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특히 밝은 채색과 유려한 필치, 다양하면서도 능숙한 인물묘사가 돋보인다.

영수사 괘불은 제작시기가 1653년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다는 시기성, 사리불이 청법자로 등장하는 가장 빠른 괘불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비록 부분적으로 후대에 수리한 흔적이 보이지만 17세기 영산회상도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원래 진천읍 상계리 멱수(미역수)골에 있던 백련암에 있던 것을 이 암자가 폐허되어 괘불만 현 영수사로 옮겼다고 하며, 가뭄이 들어 한해가 우심할 때 이 괘불을 밖에 높이 달고 승도들이 기우 기도를 드리면 비가 내린다는 설도 있다.(사진.문화재청.글 진천군청)

 

신중도.지방유형문화재 제 317 호

조선후기 형식과 양식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화기(畵記)에 불화(佛畵)를 그린 화사(畵師)의 기록이 남아 있고 절대편년(絶代編年)이 나오는 중요한 자료이다. 불화를 그린 화사(畵師)는 수화사(首畵師)인 금어(金魚)로 상원(尙月), 천여(天如), 편수(片手)는 학능(學能), 출초(出草)는 재근(在根), 체훈(體訓)이 맡아 참여하였으며, 이들은 경기도와 전라도, 경상도 등에서 19세기 후반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화사들이다. 또한 신중도(神衆圖)를 그린 화사(畵師)들은 조선후기 불교회화사에 있어서 저명한 인물들이며, 현재 불화의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사진.문화재청.글 진천군청)

 

오층석탑

대웅전 중정이 아닌 측면에 있습니다.

 

관음전

 

목조여래좌상

조선후기에 조성된 상으로 추정되나, 복장유물, 조성기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2020.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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