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예천군

예천...용문사 문효세자 태실

임병기(선과) 2020. 5. 28.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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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

오래전 인연 지었지만 근래에 발걸음이 잦았습니다.

 

오늘은

정조의 원자였던 문효세자의 태실을 찾아왔습니다.

 

용문사(2,013년)

http://blog.daum.net/12977705/8724045?category=5275

 

용문사 제헌왕후 태실(2,018년)

http://blog.daum.net/12977705/8725815?category=5275

 

용문사 부도전(2,018년)

http://blog.daum.net/12977705/8725816?category=5275

 

용문사 마애부도(2,018년)

http://blog.daum.net/12977705/8725948?category=5275

 

요즘 다음 블로그 개편 작업으로 위 링크 글 구성이 제멋대로 뒤죽박죽이 되었지만 참고 바랍니다.

 

천불전

태실은 우측 참나무 숲에 있으며 천불전 향좌측 넓은 길을 따라 가면됩니다.

 

문효세자 태실 文孝世子胎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태항아리는 서삼릉으로 이장되었고, 백자 내외 항아리와 동전 지석 등은 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태함이 있었던 곳은 매몰되었고, 아기 태비만 있습니다

 

태함이 묻혔던 태실지

 

아기태비阿只胎碑

 

문효세자 文孝世子(1782~1786) 

의빈성씨宜嬪成氏의 소생으로 정조 6년에 태어나  정조 8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정조 10년 홍역으로 세상을 떠난 원자로, 정조의 맏아들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783년 1등 태실로 채택하였고, 예천으로 태봉이 정해졌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14권, 정조 6년 9월 7일 신축 1번째기사 

1782년 청 건륭(乾隆) 47년

문효 세자의 탄생을 기뻐하다

 

왕자(王子) 가 탄생하였다. 임금이 승지와 각신(閣臣)들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성씨(成氏)가 태중(胎中)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受敎)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昭容) 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서 남아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달은 우리 선대왕께서 탄생하신 달이고 우리 전하께서 탄생하신 달인데다가 왕자께서 또 이 달에 탄생하셨으니, 경사에 대한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신이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명호(名號)를 정하기 전에 뜨락에서 문안을 드리는 것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더구나 을묘년에도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정조실록 18권, 정조 8년 8월 2일 을유 1번째기사

1784년 청 건륭(乾隆) 49년                         

왕세자 책봉 예식을 거행하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서 책봉사(冊封使)를 떠나보내고, 임금이 명하여 왕세자로 하여금 중희당(重熙堂)에서 책문(冊文)을 받게 하였다. 책문을 선포할 시간이 되자, 필선(弼善)이 끓어앉아서 ‘내엄(內嚴)·외비(外備)하라.’고 찬청(贊請)하였다. 왕세자가 쌍동계(雙童髻)·공정책(空頂幘)·칠장복(七章服)을 갖추고 지영위(祗迎位)에 나아갔다. 사자(使者)가 중문(中門)에 이르니, 왕세자가 국궁(鞠躬)하고 이를 맞이하였고, 상례(相禮)가 인도하여 배위(拜位)에 나아가 사배례(四拜禮)를 거행하였다. 책문을 받는 자리[受冊位]에 올라가자, 선책관(宣冊官)이 책문을 받들고 읽기를 끝마쳤다. 정사(正使)가 교명함(敎命函)을 가져다 왕세자에게 주자, 보덕(輔德)이 이를 대신하여 받았다. 정사가 책함(冊函)을 가져다가 왕세자에게 주자, 필선이 이를 대신하여 받았으며, 정사가 인수(印綏)를 가져다가 왕세자에게 주자, 익찬(翊贊)이 이를 대신하여 받았다. 왕세자가 내려가서 자리에 다시 서고, 사배례를 행한 다음에 내전으로 돌아갔다. 정사 이하가 꿇어앉아 복명(復命)하기를,

 

"하교를 받들고 왕세자에게 비물(備物)·전책(典冊)을 주었습니다."

 

하였다. 예식이 끝나자, 사배하였다. 진하(陳賀)할 때가 되자, 익위사(翊衛司)의 늑소(勒所)에서 의장과 호위를 보통 때와 같이 진열하였다. 종친과 문무 백관들이 각각 흑단령(黑團領)을 갖추어 입고 문 밖으로 나아갔다. 필선(弼善)이 꿇어앉아 ‘내엄·외비하라.’고 찬청하자, 왕세자가 의복을 갖추어 입고 나와서 바로 자리에 앉았다. 궁관(宮官)과 집사관(執事官)이 먼저 재배례(再拜禮)를 행하고, 인의(引儀)가 사(師)·부(傅)를 인도하여 자리 앞으로 나아가 재배(再拜)하자, 왕세자가 답례로 재배하고, 계단을 내려가서 영송(迎送)하였다. 인의(引儀)가 종친(宗親)들과 문무(文武) 2품 이상을 나누어 인도하여 당(堂) 안으로 나아가서 재배하자, 왕세자가 답례로 재배하고, 자리에 올라갔다. 인의가 3품 이하의 관원들을 인도하여 재배례를 행하였다.

 

정조실록 15권, 정조 7년 4월 27일 정해 3번째기사

1783년 청 건륭(乾隆) 48년    

원자의 태를 봉하는 일에 관한 예조판서 서호수 등의 상소      

 

 예조 판서 서호수, 참판 이숭호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원자(元子)의 태(胎)를 봉하는 일에 대해 의견이 있습니다. 신들이 삼가 선왕의 수교(受敎)를 상고해 보니, ‘이 뒤로는 어원(御苑)에다 태를 묻도록 정하라.’고 하셨는데, 이는 그때 옛 대궐 안에서 석함(石函)에 새겨진 글을 얻은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태를 봉하는 법은 본래부터 1등, 2등, 3등의 구분이 있는데, 신의 부서의 등록 가운데 우리 조정 18대 임금의 태봉(胎峰)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1등 태봉은 옛 대궐 안에 있지 않고, 석함에 있는 것은 2등 이하란 것이 확실합니다. 수교 가운데 비록 1, 2등을 구분하는 말씀은 없었으나, 옛 대궐 석함에 있는 것이 2등 이하이고 보면 1등의 의절을 이것으로 인용하여 예를 삼을 수 없다는 것은 단연코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이 일은 전례(典禮)에 관계되므로 감히 묵묵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재량하여 채택하셔서 국가의 체통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대신에게 의논한 다음 품처하라고 하였다.     

 

정조실록 16권, 정조 7년 8월 5일 갑자 2번째기사

1783년 청 건륭(乾隆) 48년

원자의 태봉을 예천에 정하다.

 

원자(元子)의 태봉(胎封)을 예천(醴泉)에다 정하였다. 처음에는 원주(原州)에다 정했었는데, 연신(筵臣)의 말이,

"태봉 근방의 땅에 민총(民塚)이 있으므로 마땅히 파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모두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여긴다면 차라리 다시 딴 곳을 구해야 한다. 이 항아리 하나를 간수하기 위해 사람들의 총묘(塚墓)를 옮기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니, 연신이 말하기를,

"원주 이외에는 다만 예천에 한 곳이 있습니다."

하니, 드디어 상지관(相地官)을 보내어 간심(看審)하도록 하여 결정하게 한 것이다.

 

정조실록 21권, 정조 10년 5월 11일 계축 1번째기사

1786년 청 건륭(乾隆) 51년 

왕세자가 훙서하다

 

왕세자가 훙서하였다. 세자의 병 증세가 갈수록 심해지자, 시약청을 설치하고 대신을 파견하여 재차 사직과 종묘에 기도하였다. 이날 미시(未時)에 창덕궁의 별당에서 훙서하였는데, 사부·빈객·춘방·계방에게 명하여 뜰 아래에 모아 서게 하였다. 임금은 흑립(黑笠)과 백포대(白布帶)를 착용하고 여러 신하들은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상(喪)을 발표하면서 검정 곤룡포를 입고 고복하였다. 종척(宗戚)과 집사, 여러 각신(閣臣)들이 돌아가며 모시고, 오영(五營)에서는 성을 호위하고, 병조는 대궐 안의 각문을 지켰다.        

 

전면.

건륭사십칠년구월초칠일 인시생 원자 아기씨 태실(乾隆四十七年九月初七日 寅時生 元子 阿只氏 胎室)

1,782년

 

후면

건륭사십팔년구월초육일잎(乾隆四十八年九月初六日立)

1,783년

 

태비 비갓(전)

아기태비의 전형입니다.

 

비갓(후)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숙종, 영조. 정조에 이어 문효세자가 임금으로 등극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20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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