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강진군

강진...병사 장한상 철비

임병기(선과) 2020. 3. 27.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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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성 동문

 

동문 밖에 위치했던 비석 군

공사로 인해 성안에 임시 보관 중인 것 같습니다.

 

병사 장 공 한상 영세불망비(兵使 張 公 漢相 永世不忘碑). 1714년

병마절도사 장한공 불망비

 

장한상張漢相

(사)의성향토사연구회 카페에서 옮겨 왔습니다.

 

울릉도 사적기를 남긴 운암(雲巖)장한상(張漢相)

                                                             

  장한상(張漢相: 1656~1724))선생은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자는 필경(弼卿), 호는 운암(雲巖)으로 상주목(尙州牧) 내동면 사포리(현재 구천면 용사리 상제부락)에서 1656년(효종 7년) 10월 6일 삼도수군 통어사를 지낸 장시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장덕명(張德明)이고 조부는 장익(張翊), 부친은 장시규(張是奎),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이다.

 

점곡 사촌마을에서의 서애 선생 탄생 일화가 있듯이 운암선생 모친도 비안현 외서면(현 구천면 내산리) 청석마을에서 잉태했으나 출산일을 짐작해 사주(四柱)를 보니 이곳에서 출산하면 큰 인물이 못 된다는 예언에 따라 구천면 용사리로 이주한 후에 낳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선생은 출생 후 3일 만에 앉았고, 석 달 만에 걸었다고 전해지며 태어날 때부터 영특하고 눈의 광채가 빛나서 마치 선인 같은 위엄이 서려있었다고 한다.

 

한 예로 선생이 혈기 왕성할 때, 산처럼 커다란 호랑이 여러 마리가 장안에 나타났는데, 그 중 호랑이 한마리가 선생 앞에 와서 엎드리자 선생은 바로 등에 탔고 이어서 5~6 마리의 호랑이가 그 뒤를 따랐다는 일화는 할머니의 구수한 민화처럼 들리겠지만 현재 호랑이를 탄 그의 화상이 선생의 사당에 남아 있다. 그만큼 보통 사람들과 구별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분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기도 수군절도사(京畿道 水軍節度使)를 역임한 부친 장시규((張是奎:1627~1708)는 여말 충신으로 이름 높은 달산군 장보지(張輔之)와 국천효자(國薦孝子) 장지단(張之端)의 후예이며 22세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고 한다. 자헌대부 삼도수군통어사, 양주목사를 마지막으로 30여 년간의 긴 출사 길을 내려놓고 고향에 돌아올 때 그의 나이는 벌써 56세였다. 선전관을 출발로 경상좌도의 수군절도사를 거치고 교동도호부사와 삼도수군통어사 시절에는 국토보위의 막중대임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이에 아들과 함께 무관으로서 수군절도사를 거쳤으므로 양병사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1708년(숙종 34년) 지금의 안계면 도덕리 화경산(花頭山) 남쪽의 眞城李氏 부인의 묘에 합장되었고 또한 이곳이 그가 일찍이 말 달리고 활 쏘며 조련하던 안계벌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무관이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운암선생은 1676년 무과에 급제하여 정략장군(定略將軍) 선전관, 진위장군(振威將軍), 훈련원정(訓練院正), 내금위장(內禁衛將)과 칠곡(漆谷), 회령(會寧) 등지의 수령을 두루 거치고 1682년 통신사(通信士)로 일본에도 갔다. 그 뒤 삼척포진영장(三陟浦鎭營將)으로 기용되어 울릉도에 잇따른 왜구의 침범을 막았으며 이어 호남에 대기근이 들어 도적이 들끓자, 선생이 부임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는데 이곳 주민들이 철비를 세워 송덕을 기렸다. 철비가 세워진 곳은 네덜란드인 하멜이 표류하여 7년간 머무르면서「하멜 표류기」를 쓴 곳이기도 한 전남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이다. 

 

‘병사장공한상영세불망비(兵使張公漢相永世不忘碑)라 쓰여진 비 좌우에는

‘天彰南鎭 飢病咸蘇 - 남쪽 진을 하늘에 드러내 굶주리고 병든 이 모두 살렸고

開典雄蕃 卓世之恩 - 병사의 소임을 법전대로 펼치니 세상에 끼친 은덕 우뚝하다.’ 라 새겨져 있다.

 

짧으나마 내용을 읽으면 의성군민으로서 자부심이 뭉클해진다.

1694년(숙종 20년) 삼척첨사이던 선생이 조정의 명령으로, 9월 19일에 울릉도 순시를 나가 독도를 발견했다는 「장한상 울릉도 사적기」를 남겼다.

 

“東望海中有一島 杳在辰方 而其大末滿蔚島三分之一不過三百餘里

- 울릉도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바다 가운데 섬이 하나 있다.

아득한 동남방에 위치하였으며 크기는 울릉도의 3분의 1에 못 미치고, 거리는 300여리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독도의 존재를 명확히 기술하고 있으며 사적기 사본은 현재 독도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선생이 조사한 이러한 자료는 1693년 동래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를 침입한 일본인을 추방한 이후이지만 1697년 안용복의 활동으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 받고, 일본인의 울릉도 출어금지 공한을 시달하는 일련의 과정 이전 조정에 전달된 문헌으로서 또한 조정의 정책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이 기록이야말로 문헌에 나오는 울릉과 우산(독도)의 지명은 모두 울릉도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일본 주장에 대해 울릉도와 그 부근에 있던 독도를 우리가 17세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문서로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이며 숙종 38년(1712년) 선생이 함경북도 병사(咸鏡北道 兵使)로 근무할 당시 왕명으로 백두산 남쪽지대 지형을 그려서 바치기도 하였다.

 

요즘도 지구온난화 때문에 지구 곳곳에 폭설이 내리는 곳이 있는가 하면 홍수가 나서 큰 피해를 입은 곳도 많다. 이미 조선 숙종 대에 해당하는 17세기에도 전 세계적으로 기상이변 현상이 일어난 시기인 소빙기가 있었다고 한다. 우박과 서리, 한발과 홍수, 해일·지진 등 지상 및 해상의 재앙이 닥쳤고 이에 따라 실농, 기근, 전염병, 충해 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자연의 재난으로 살기 어려워진 사람들은 도적떼가 되거나 또는 세금이 없는 울릉도와 독도로 건너가 어로 활동을 하고 또 일부는 청나라 국경 지대로 들어갔다. 이런 이유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울릉도 쟁계(鬱陵島爭界)가 일어났고,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백두산 정계비가 서게 된 원인이 된 천재지변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진행과정에서 울릉도 형편을 자세히 살펴보고 주민을 이주시켜 진을 설치해 일본의 침탈을 막자는 남구만의 견해를 받아들여 삼척영장인 선생을 파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의성 조문국박물관에서는 지난 2014년도 하반기에 3층 특별기획전시실에서 ⌜독도와 장한상⌟이라는 제목으로 금성면 출신 해암 김재도 선생의 작가 초대전과 함께 성대히 치러졌다.

 

일본과 우리나라와의 독도 문제에 걸맞게 준비한 이번 전시에는 조문국 박물관에 위탁 보관되어 있다. 약 200 여점이 사료적 가치는 높게 평가하지 않지만 한 가문에서 소장하장한상의 영정, 장시규와 장한상의 교지, 유지, 유서통, 실록, 호패 수우각, 단장(무관 지휘봉), 인장(숙종 하사품), 소초, 병학지남, 외손 소봉사, 산송(山訟)문서, 동복 분쟁 화해 문서, 일산 등과 함께 ‘울릉도 사적’ 을 짜임새 있게 전시하였다. 이 자료들은 2012년 12월 4일 일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3호로 지정된 경덕사(景德祠) 소장 고문서 및 유물들로 현재 대부분 의성 고 있는 17~19세기 자료라는 점에서 보존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보는 견해다.

 

선생은 1724년(경종 4년) 갑진 2월 19일 셋째사위 병조판서 이삼[李森]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묘소는 백학산(白鶴山) 동쪽 비안면 외곡리에 있으며 경덕사(景德祠 구천면 용사리 290)에서는 해마다 유림에서 부자를 함께 삼월 中丁日에 매년 제향하고 있다.

 

“국가의 가치는 결국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의 가치다.” 라는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S.밀)의 명언과 같이 독도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우리나라의 가치는 곧 우리 국민 스스로가 만들어 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보면서 금성면에 가칭 ‘장한상과 독도사진전시관’이 설립되기를 기대해본다.

 

천창남진 天彰南鎭 병영성 창고를 열어

기병함소 飢病咸蘇 굶주리고 병든 백성을 살렸으며
개전웅변 開典雄蕃 병마절도사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
탁세지은 卓世之恩 그 높은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음역, 의역은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숭정 기원후 오십삼년 갑오 칠월 일(崇禎 紀元後 五十三年 甲午 七月 日)

1714년 7월

 

비갓 전면

 

비갓 후면

 

 

 

2020.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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