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강진군

강진...백련사 부도전

임병기(선과) 2018. 11. 25.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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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우리카페 장돌뱅이( 이글에서 닉은 상감)랑, 유현이랑 들렸었지만.

부도에 관한 단 한 줄 글도 없다.

 

가감없이 가져 왔다.

 

백련사 동백숲길에서...고재종 


누이야. 네 초롱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에
시방 동백꽃 송이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 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예 씻어 보겠다는 나인가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 종을 울려대면
너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無明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 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
한번쯤 걸어 보긴 걸어 볼 참인가

사람의 욕심이란 끝도 없겠지만 답사 때 마다 안타까운 것이 문학적 감성이 풍부한  님과, 님이 아니면 놈이라도 함께 와보는 것이다. 푸르른 보리밭에서든, 동백꽃 그늘 아래서이든 분위기와 매칭되는 멋들어진 시 한수 낭송해 줄 님과 언제쯤 손 잡고 거닐 수 있을까?

제기럴! 언감생심 내게는 일장춘몽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우칠 요량으로 상감이란 화상은 하루의 시작이 12시라며 단청불사(?)를 위하여, 안료 캔을 요란스럽게 따고,유현이랑 화상은 적어도 단청쟁이의 심정적 동조자가 되어 마부꾼의 심사를 건드리고 있다.

이도저도 아닌 무미건조한 인간이라도, 백련사 주차장에 도착해서는 울창한 동백숲을  걸어 올라 가고프단 말을 할 줄 알았는데, 마주칠 만경루의 위풍당당한 기세에 지레 기가죽었는지, 법당 앞까지 직진하는 나에게 쾌재를 부르고 있으니...

839년 성주산문 무염국사의 창건 여부의 오류를 떠나 백련사는 두어번 전성기가 있었으니, 무신정권이 들어선 후 혁명이냐,구데타냐 등등 그들의 정권 찬탈의 정당성을 홍보 및 지배 이념을 갖추기 위해 과거 왕권, 귀족,교리 위주의 교종을 배척하고 불교계를 결집한 것이 이른바 결사 였으며, 그 중심에 송광사를 중심으로한 보조 지눌의 수선결사와, 요세스님의 백련사를 중심으로 한 백련결사로, 이후 무신정권과의 우호관계로 인해 사세가 확충되고 여러명의 국사가 배출되었으니 백련사가 꽃이 만개한 시기라 하겠다.

건방진 이야기지만 망해 가던 신라말에 구산선문, 고려 무인정권의 결사, 조선의 유교도입, 박정희의 일련의 정책, 전두환의 삼청교육대, 프로 스포츠 창설, 김영삼의 세계화, 김대중의 햇볕정책,노무현의 과거사, 보안법 입법화 등도 정권창출, 찬탈의 당위성과 국민의 위무책 및 과거 정권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영속성이 결여된 미봉책으로 판단되는 것은 나만의 오류일까?

아무튼, 무신정권과의 밀월로 꿈같은 시절을 누렸지만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란 말처럼 무인정권의 몰락과 함께 무너지고, 그런저런 사찰로 유지해오다 혜장스님이 활동한 19세기에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게 되지만,아마도 백련사가 전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기는 바로 지금임에 분명하지 않을까?


나의 문화유산 답사 1권 첫장을 장식한 유홍준 청장의 남도 답사 일번지라는 글로 인해서...

유현의 말대로 일년에 한번 신도들의 보리, 쌀 한말 보시로 유지하던 사세가 최근에는 무통장 입금 시키는 손 큰 보살들로 인해 무차별적 불사가 이루어 지고 있으니, 백련사도 시류에 충실하게 불사가 진행중이지만, 조만간 자금 부족으로 인해 저아래 주차장 근처에서 입장료를 징수하지 않을까? 그러다 식객의 발길이 끊어지면 어떻게 될까?나의 조부님이 늘 그러셨는데 "절집이나, 사람이 사는 집이나 사람이 버글버글해야 한다고..."

구강포를 가로막는 만경루가 눈에 거슬려 애써 외면하며 원교의 글씨인 대웅보전 법당 삼존불을 뵙고 벽화를 보는 순간 머리가 아프다. 선종의 6조 혜능이 5조 홍인으로 부터 인가를 받는 육조 도정도는 그 주인공을 알겠으나 팔을 잘라 도를 구하고 인가를 받는  단비도의 주인공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명부전 주위를 배회하는 유현을 불렀더니 달마-혜가-승찬-도신-홍인-혜능조사는 물론 남종,북종까지 술술술 흘러 나오니, 저놈의 뱃속에는 불교철학(?)만 가득할거야 분명히!!!

고려시대 원묘의 부도비 귀부에 조선 숙종시의 비신과,이수를 세운 사적비 앞에서 창건연대와 귀부, 이수의 양식 변천에 이야기를 나누며, 공양간으로 향했으나 무슨놈의 백장청규를 찾는다고 일일부작, 일일부식을 앞세워, 한끼 공양할려면 두시간 원력을 해야한다고 뒷걸음만 친다. 이런놈의 화상들! 참 늘푼수도 없다. 한놈의 구두선이면 세명의 오장육부가 극락세계일텐데......

2005.03.21

 

 

대웅보전 편액

만경루 글씨와 더불어 원교 이광사의 글이다.

 

부산에서 오신 사찰순례단 보살님들의 참배에 밀려 법당 출입도 못하고 사적비를 거쳐 부도전으로 발길 돌려야 했다.

 

 

목조삼존불

조선후기 작품으로 전한다.

 

 

명부전

 

 

명부전 시왕

 

 

명부전 시왕

 

 

만경루

사적비에 기록된 만경루(숙 7년.1681년. 저 趙)

 

"절에 만경루(萬景樓)가 있어 큰 바다에 임해 있는데 누각에 오르면 조망이 뛰어나다. 골짜기에 심은 것은 모두 동백나무로 겨울과 봄 사이에는 짙은 붉은 색이 산을 뒤덮어 아름답다. 상서 성임(成任)과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이 모두 시를 읊은 것이 있다. 나는 정사년(숙종 3, 1677년)에 호남에 벼슬하러 가서 왕의 명을 실행하는 일정에 얽매여 돌아다니며 유람할 수 없었던 것이 지금도 한이 된다. 어찌 다시 남쪽 유람을 하여 이 절의 누각에 올라 북으로 월출산(月出山)의 구정봉(九井峰)을 조망하며 동으로 천관산(天冠山)의 석늠(石廩)을 보고 남으로 한라산(漢挐山)을 바라보며, 한점 안개 같은 것이 이내 숲을 이루는 것을 보고 둘이서 만들어 통쾌하게 읽어 오래 묵은 고질병이 몸에서 벗어나 떨어져 나가게 하지 않으랴."

 

만경루...기대승(奇大升1527 ~ 1572)

( 1557년(명종 12)   31세 때 부친 기진(奇進)의  삼년상을 마치고, 서석산(瑞石山)과 월출산(月出山)을 유람하고 백련사에 들렸다.)

오월에 만경루(萬景樓)를 오르니 / 서늘한 바람 불어와 가을 기운 움직이네.
누런 구름 이랑에 기름지니 풍년 만났고 / 강설은 가지에 뭉쳐 객은 시름을 잊네.
五月登臨萬景樓 凉風颯颯動高秋 黃雲膩畝農逢歲 絳雪團枝客撥愁

흥을 타 한 잔 마시며 애오라지 즐거워하고 / 삼 년을 서로 생각하니 다시 유유하구나.
남쪽 변방 장기 속에 청담을 펴니 / 뉘라서 깊은 걱정으로 머리 희게 할까
乘興一盃聊款款 相思三載更悠悠 南荒瘴癘開淸話 誰使幽憂白滿頭.

(출처...한국매일뉴스)

 

 

사적비각

부도전은 사적비를 등지고 우측 동백숲에 있다.

 

 

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에서 가져 왔다.

 

전라도 강진(康津)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寺) 사적비(事蹟碑)
통훈대부(通訓大夫) 전 행홍문관수찬(行弘文館修撰)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조종저(趙宗著) 지음
현록대부(顯祿大夫) 낭선군(朗善君)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이우(李俁)

가덕대부(嘉德大夫) 낭원군(朗原君)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이간(李偘) 전액을 씀

옛날에 삼신산(三神山, 신선이 산다는 세 산. 곧 봉래 방장 영주산)이 동해(東海)에 있다고 하였는데, 우리나라는 발해(渤海)의 동쪽에 있어 풍악산(楓岳山, 금강산) 두류산(頭流山, 지리산) 한라산(漢挐山)을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에 비기어 온 것은 믿어 헛된 것이 아니다. 풍악산에서 굽이져 천 여 리 간 것이 두류산이니 명찰 대찰이 그 사이에 있는 것은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두류산의 서남 몇 백 리 되는 곳에 산이 있는데 해안에 이르러 그쳐 곧바로 탐라(耽羅, 제주도)의 한라산을 대하고 험한 산세로 우뚝 솟아 있으니 이것이 강진의 만덕산(萬德山)이고, 산의 남쪽에 백련사가 있다. 풍수지리가들이 말하는 천하명산(天下名山)을 승가에서 다수 차지하고 있는 것은 대개 이 때문이다.


절은 신라 때 창건되었는데 도중에 황폐해져서 연대나 장소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고려 때 원묘국사(圓妙國師, 1163~1245년. 이름은 요세(了世)) 가 두류산에서 와서 절의 남은 터를 보고 그 형세가 기이하고 빼어난 것을 보고 기뻐하여 그의 제자 원영(元瑩) 지담(之湛) 법안(法安) 등에게 중수의 역할을 맡도록 하여 금(金)나라 대안(大安) 3년 신미년(고려 희종 7, 1211년)에 일을 시작하여 정우(貞祐) 4년(고려 고종 3, 1216년)에 일을 마치니 건물이 무릇 80 여 간이었다. 이에 문인 천회(天回) 등과 함께 법을 설하고 경전을 담론하여 원근의 승려와 일반인들이 모여들어 다투어 북면하니 공경(公卿)과 지방 수령들이 그 풍도와 명성을 흠모하여 모임을 맺어 와서 더불어 지낸 자가 거의 3백인이 되었다. 고려 왕이 듣고 정유년(고려 고종 24, 1237년)에 선사에게 호를 내리고 여러 차례 포상하는 왕명을 내렸으며 명절마다 선물을 내려 주심이 매우 많았다. 이로 말미암아 이 절이 동방의 제일도량(東方第一道場)이 되었고 총령(葱嶺, 파미르고원. 여기서는 고원을 넘어야 나오는 인도를 말함)의 쌍림사(䨥林, 석가가 열반한 곳에 세운 절)일 뿐 아니라 진조(震朝, 중국)의 여산(廬山, 중국 강서성 구강현에 있는 산. 동진 때 혜원이 이곳에서 염불결사를 열어 유명한 곳)과 같았다. 11대사를 이어 무외대사(無畏大師)에 이르러 이 절에 이어 머무르며 의발(衣鉢)을 전하고 도법(道法)을 드날려 지역과 사람이 모두 세상에 드러나니 세상에서 이 절을 중시함은 다른 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우리 세종(世宗)조에 들어와 절이 왜란에 파괴되어 잡초가 무성하게 되자 천태 대사 행호(行乎)가 그 제자 신심(信諶)과 함께 중건을 발원하여 경술년(세종 12, 1430년)에 일을 시작하여 병진년(세종 18, 1436년)에 마치니 전각 당우와 회랑 요사가 매우 크고 넓게 되어 거의 옛모습보다 앞설 정도였다. 아아. 신라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천 년을 넘는 시간에 절이 황폐해 진 것이 한번이 아니었지만 다시 중수하여 옛모습을 모두 복구한 것은 어찌 땅이 영험스럽고 경계가 특이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부처의 힘이 있어 보호를 받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았겠는가.

 

원묘(圓妙)국사의 이름은 요세(了世)이니 원묘는 곧 시호(諡號)로 받은 것이다. 배움에 목우자(牧牛子) 보조(普照, 고려의 고승 지눌(知訥), 1158~1210년)국사와 더불어 속으로 들어맞는 부분이 있어 정하여 불법의 친구가 되었고 보조국사가 일찍이 “파도가 어지러우니 달이 드러나기 어렵고, 방이 깊으니 등불이 거듭 빛난다. 권하노니 그대는 마음 기량을 가다듬어, 감로수를 기울이지 말게나.”라는 게송을 원묘국사에게 주었다고 한다. 절 안에 옛날에 원묘국사의 비가 있었으니 그때 학사(學士) 최자(崔滋)가 왕명을 받들어 지은 것인데 지금 그 비는 없어지고 승탑 8개가 있어 그 중 하나가 원묘국사의 사리를 보장한 것으로 고려 왕이 중진탑(中眞塔)이라고 이름을 책봉한 것이다.


절의 승려 탄기(坦奇)가 본 절의 실제 사적이 오래되어 잊혀져 없어질까 염려하여 돌에 새기고자 하여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나는 병을 얻은 지 몇년이나 되어 오랫동안 붓과 벼루를 던져 두었으나 그 뜻이 가상하게 여겨 마침내 글을 쓴다.


절에 만경루(萬景樓)가 있어 큰 바다에 임해 있는데 누각에 오르면 조망이 뛰어나다. 골짜기에 심은 것은 모두 동백나무로 겨울과 봄 사이에는 짙은 붉은 색이 산을 뒤덮어 아름답다. 상서 성임(成任)과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이 모두 시를 읊은 것이 있다. 나는 정사년(숙종 3, 1677년)에 호남에 벼슬하러 가서 왕의 명을 실행하는 일정에 얽매여 돌아다니며 유람할 수 없었던 것이 지금도 한이 된다. 어찌 다시 남쪽 유람을 하여 이 절의 누각에 올라 북으로 월출산(月出山)의 구정봉(九井峰)을 조망하며 동으로 천관산(天冠山)의 석늠(石廩)을 보고 남으로 한라산(漢挐山)을 바라보며, 한점 안개 같은 것이 이내 숲을 이루는 것을 보고 둘이서 만들어 통쾌하게 읽어 오래 묵은 고질병이 몸에서 벗어나 떨어져 나가게 하지 않으랴.

숭정기원 무진후 54년 신유(숙종 7, 1681년) 5월 일 세움"

 

 

백련사 사적비

제액을 쓴 낭원군.낭선군이 익숙한 이름이다.

 

부석사 암각문의 주인공이며, 단양 등에 암각문을 여럿 남겼다.

부석사 순례글에 올렸던 글을 가져왔다.

 

 

부석(浮石)에 새겨진 선원록봉안사낭원군(璿源錄奉安使朗原君) 명문

 

선원록봉안사 璿源錄奉安使

낭원군 朗原君

게유 동 癸酉 冬


더불어,미디어붓다 기사 중 낭선군에 관한 내용을 발췌하였다.

 

"낭선군[1637(인조15)~1693(숙종19)]은 옛 명필들의 글씨를 모아 서첩을 만든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의 편찬자인 선조(宣祖)의 손자인 이우(李俁)이다. 낭선군이 부석사를 온 것은 다름 아닌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에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동행한 인물이 바로 그의 동생인 낭원군 이간[朗原君 李偘(인조18년(1640)∼숙종25년(1699)]이다.

 

낭선군은 그렇다 치더라도 낭원군이 부석사에 왔음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모든 문제의 답은 현장에 있다. 무량수전 서쪽 ‘부석(浮石)’ 정면에 ‘선원록봉안사낭원군(璿源錄奉安使朗原君)’이라는 명문이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1681년 완간된 <선원록>을 1690년 태백산사고에 봉안하기 위해 각화사로 향하던 낭선군, 낭원군 형제가 부석사에 들러 무량수전 현판을 보고 공민왕이 친필임을 고증하였던 것이다."

 

 

 

지대석과 귀부가 한 돌이다.

 

 

귀부와 탑신 이수 암질이 달라 보인다.

이는 사적비에 기록된 최자가 찬한 원묘국사 중진탑의 귀부를 활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 엄기표님은 2012년 강진 백련결사 학술세미나  학술발표회에서 「강진 백련사 석조유물의 종합적 검토와 원묘국사의 부도와 탑비의 원형 시론에서 그 연유를 설명하고 있다

 

"白蓮寺에는 고려시대 崔滋가 찬하여 1245년경에 萬德山白蓮社圓妙國師碑(中眞塔碑)가 건립되었는데, 조선초기 行乎가 백련사를 중창할 때까지 잘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임진왜란 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碑身과 螭首는 파손되었고, 龜趺는 다행히 파손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20) 그리고 조선후기에 들어와 坦奇의 주도로 白蓮寺 事蹟碑를 건립할 때 경비와 시간 등을 줄이기 위하여 파손되지 않은 기존의 中眞塔碑의 龜趺를 재활용하여, 그 위에 碑身과 屋蓋形 螭首를 새롭게 결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白蓮寺 事蹟碑는 龜趺와 碑身의측면 문양, 龜趺와 屋蓋形 螭首의 조성 시기가 양식사적으로 어울리지 않게 된것으로 보인다."

 

 

 

 

춘파당 부도

육안으로 당호가 확인되지 않았다.

백련사사적비(1681년)에 의하면 백련사에는 요새의 부도를 포함하여 8기 부도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도전 입구

 

 

부도전

예전에는 경내에 있었던 부도도 이곳으로 모신 것 같다.

상단에는 원구형 부도, 중단에는 범자문 부도를 비롯 2기 부도와 대좌. 하단에는 요새부도(추정)를 포함 3기 부도가 봉안되어 있다.

 

 

원구형 부도.

상단에 위치. 방형 지대석은 본래 부재여부가 불투명해 보인다.

 

 

하대석

하대석 하단, 중단, 상단이 하나의 부재로 상부에는 1단 괴임이 있다.

중단에는 연주문으로 구획하여 2개의 안상을 새겼다.

상단에는 연주문을 새긴 후 위에 복련을 조식하였다.

 

상대석

방형으로 하대석 보다 문양이 단순하다.

 

 

탑신

원구형으로 연주문을 표현하였다.

 

 

옥개석

팔각으로, 낙수면 물매가 급하고, 마루를 굵게 표현하였다.

조선시대 장명등 옥개석 느낌이다.

 

상륜부

보륜차럼 보이는 받침위에 보주를 올렸다.

 

장흥 보림사 석등,보조국사 부도,동서부도전에 이러한 작례가 남아 있다.

 

 

 

중단

부도 2기. 부도 하대석 1기가 있다.

 

 

원구형 부도

중단에 위치

당호를 새기지 않았다.

방형 탑신위에 종형 탑신, 옥개석을 올렸다.

옥개석 상부에는 상륜을 끼웠던 것으로 추정되는 촉이 돌출되어 있다.

 

 

 

팔각원당형 부도

중단에 위치

 

 

 

방형 지대석

 

기단부

하대석과 상대석이 일석이다.

 

하대석은 팔각으로 하단과 갑석을 표현하였고 위에 팔각 상대석을 일석으로 조성하였다.

호형 상대석 상부에는 받침을 조출하고 탑신석 하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

원형처럼 보이나 팔각이다.

 

 

옥개석과 상륜

팔각옥개석 물매가 급하며. 상륜에는 보륜형 보주 받침만 남아 있다.

 

 

 

부도 하대석

중단에 위치

 

 

 

하단

 

 

범(梵)자문 부도

 

 

방형지대석, 복련이 조식된 하대석 상부에는 1단 굄이 있다.

 

 

중대석 전면

당호를 새긴 듯 하지만 육안 식별이 어렵다.

 

 

중대석 측면

안상을 크게 구획하고 4개 귀꽃을 표현했다.

 

 

상대석과 탑신

상대석 하부에는 방형의 별석 받침을 두고 앙련을 조식하였다.

상부에는 1단 괴임을 두었다.

 

 

탑신

원구형이지만 배를 불려 방형 처럼 느껴지며 각면에 범(梵)자를 새겼다

 

 

옥개석 처마선이 들렸고, 낙수면 물매는 깊지 않으며, 내림마루 끝에는 귀꽃을 새겼다.

상륜에는 보주를 올렸다.

 

 

 

 

월인당月印堂 부도

 

 

방형 지대석

방형 기단 상부에 홈을 파고 팔각 탑신을 올렸다.

팔각옥개석 의 물매는 급하며, 상륜부는 결실되었다.

 

탑신에 월인당月印堂를 새기고,

대석에 가경구년갑자사월嘉慶九年甲子四月 명문이 있어 조성시기(1804년)와 주인공이 알려진 부도이다.

 

월인당은 미황사 출신의 총신聰信스님으로 백련사 대웅보전 중수기를 쓴 분이라고 전한다.

즉,숙종조에 기록한 사적비에 기록된 8기 부도와는 별개의 부도임을 알 수 있다.

 

 

 

 

 

부도전

하단과 중단

 

 

(傳)원묘국사 요세 부도

 

사적비의 내용 

"원묘(圓妙)국사의 이름은 요세(了世)이니 원묘는 곧 시호(諡號)로 받은 것이다. 배움에 목우자(牧牛子) 보조(普照, 고려의 고승 지눌(知訥), 1158~1210년)국사와 더불어 속으로 들어맞는 부분이 있어 정하여 불법의 친구가 되었고 보조국사가 일찍이 “파도가 어지러우니 달이 드러나기 어렵고, 방이 깊으니 등불이 거듭 빛난다. 권하노니 그대는 마음 기량을 가다듬어, 감로수를 기울이지 말게나.”라는 게송을 원묘국사에게 주었다고 한다. 절 안에 옛날에 원묘국사의 비가 있었으니 그때 학사(學士) 최자(崔滋)가 왕명을 받들어 지은 것인데 지금 그 비는 없어지고 승탑 8개가 있어 그 중 하나가 원묘국사의 사리를 보장한 것으로 고려 왕이 중진탑(中眞塔)이라고 이름을 책봉한 것이다."

 

즉, 요세스님의 부도와 부도비가 백련사에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부도를 송광사에 남아있는 보조국사의 부도보다 간략화는 되었지만 거의 비슷한 유형의 부도로 미루어 원묘의 부도로 추정하는 듯 하다. 그러나 상단지역의 원구형 부도를 요세 부도로 추정하는 자료도 없지 않다.

 

나로서는 구분할 지식과 안목이 깊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송광사 보조국사 부도

 

 

보조국사 부도와 비교하면 보조국사부도는 탑신 옥개석이 팔각이며, 중대석이 있다.

 

4매석 지대석

기단부는 상대석,하대석으로 중대석을 표현하지 않았다.

방형 탑신, 옥개석도 방형이다.

옥개석 처마는 들려 있으며 물매는 급하다.

상륜에는 화염보주를 올렸다.

 

 

기단

 

 

탑신

 

 

옥개석과 상륜

 

 

 

백련사 답사를 13년 전에 하였으나

사진 한장 남아 있지 않아, 부도전은 늘 마음의 짐이 되었는데, 밀린 숙제를 마친 기분이다.

부도전의 부도는 만덕사 사적기에 당호와 위치가 전하는 부도로 추정되나 여러번 옮긴 까닭에 주인공을 밝힐 수없어 안타깝다.

더불어, 요세 스님의 중진탑비가 발견될 날을 기원해 본다.

 

2018.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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