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우리카페 장돌뱅이( 이글에서 닉은 상감)랑, 유현이랑 들렸었지만. 부도에 관한 단 한 줄 글도 없다.
가감없이 가져 왔다.
백련사 동백숲길에서...고재종
대웅보전 편액 만경루 글씨와 더불어 원교 이광사의 글이다.
부산에서 오신 사찰순례단 보살님들의 참배에 밀려 법당 출입도 못하고 사적비를 거쳐 부도전으로 발길 돌려야 했다.
목조삼존불 조선후기 작품으로 전한다.
명부전
명부전 시왕
명부전 시왕
만경루 사적비에 기록된 만경루(숙종 7년.1681년. 조종저 趙宗著)
"절에 만경루(萬景樓)가 있어 큰 바다에 임해 있는데 누각에 오르면 조망이 뛰어나다. 골짜기에 심은 것은 모두 동백나무로 겨울과 봄 사이에는 짙은 붉은 색이 산을 뒤덮어 아름답다. 상서 성임(成任)과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이 모두 시를 읊은 것이 있다. 나는 정사년(숙종 3, 1677년)에 호남에 벼슬하러 가서 왕의 명을 실행하는 일정에 얽매여 돌아다니며 유람할 수 없었던 것이 지금도 한이 된다. 어찌 다시 남쪽 유람을 하여 이 절의 누각에 올라 북으로 월출산(月出山)의 구정봉(九井峰)을 조망하며 동으로 천관산(天冠山)의 석늠(石廩)을 보고 남으로 한라산(漢挐山)을 바라보며, 한점 안개 같은 것이 이내 숲을 이루는 것을 보고 둘이서 만들어 통쾌하게 읽어 오래 묵은 고질병이 몸에서 벗어나 떨어져 나가게 하지 않으랴."
만경루...기대승(奇大升1527 ~ 1572) ( 1557년(명종 12) 31세 때 부친 기진(奇進)의 삼년상을 마치고, 서석산(瑞石山)과 월출산(月出山)을 유람하고 백련사에 들렸다.) 오월에 만경루(萬景樓)를 오르니 / 서늘한 바람 불어와 가을 기운 움직이네.
사적비각 부도전은 사적비를 등지고 우측 동백숲에 있다.
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에서 가져 왔다.
전라도 강진(康津)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寺) 사적비(事蹟碑)
원묘(圓妙)국사의 이름은 요세(了世)이니 원묘는 곧 시호(諡號)로 받은 것이다. 배움에 목우자(牧牛子) 보조(普照, 고려의 고승 지눌(知訥), 1158~1210년)국사와 더불어 속으로 들어맞는 부분이 있어 정하여 불법의 친구가 되었고 보조국사가 일찍이 “파도가 어지러우니 달이 드러나기 어렵고, 방이 깊으니 등불이 거듭 빛난다. 권하노니 그대는 마음 기량을 가다듬어, 감로수를 기울이지 말게나.”라는 게송을 원묘국사에게 주었다고 한다. 절 안에 옛날에 원묘국사의 비가 있었으니 그때 학사(學士) 최자(崔滋)가 왕명을 받들어 지은 것인데 지금 그 비는 없어지고 승탑 8개가 있어 그 중 하나가 원묘국사의 사리를 보장한 것으로 고려 왕이 중진탑(中眞塔)이라고 이름을 책봉한 것이다.
백련사 사적비 제액을 쓴 낭원군.낭선군이 익숙한 이름이다.
부석사 암각문의 주인공이며, 단양 등에 암각문을 여럿 남겼다. 부석사 순례글에 올렸던 글을 가져왔다.
부석(浮石)에 새겨진 선원록봉안사낭원군(璿源錄奉安使朗原君) 명문
선원록봉안사 璿源錄奉安使 낭원군 朗原君 게유 동 癸酉 冬 더불어,미디어붓다 기사 중 낭선군에 관한 내용을 발췌하였다.
"낭선군[1637(인조15)~1693(숙종19)]은 옛 명필들의 글씨를 모아 서첩을 만든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의 편찬자인 선조(宣祖)의 손자인 이우(李俁)이다. 낭선군이 부석사를 온 것은 다름 아닌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에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동행한 인물이 바로 그의 동생인 낭원군 이간[朗原君 李偘(인조18년(1640)∼숙종25년(1699)]이다.
낭선군은 그렇다 치더라도 낭원군이 부석사에 왔음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모든 문제의 답은 현장에 있다. 무량수전 서쪽 ‘부석(浮石)’ 정면에 ‘선원록봉안사낭원군(璿源錄奉安使朗原君)’이라는 명문이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1681년 완간된 <선원록>을 1690년 태백산사고에 봉안하기 위해 각화사로 향하던 낭선군, 낭원군 형제가 부석사에 들러 무량수전 현판을 보고 공민왕이 친필임을 고증하였던 것이다."
지대석과 귀부가 한 돌이다.
귀부와 탑신 이수 암질이 달라 보인다. 이는 사적비에 기록된 최자가 찬한 원묘국사 중진탑의 귀부를 활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 엄기표님은 2012년 강진 백련결사 학술세미나 학술발표회에서 「강진 백련사 석조유물의 종합적 검토와 원묘국사의 부도와 탑비의 원형 시론에서 그 연유를 설명하고 있다
"白蓮寺에는 고려시대 崔滋가 찬하여 1245년경에 萬德山白蓮社圓妙國師碑(中眞塔碑)가 건립되었는데, 조선초기 行乎가 백련사를 중창할 때까지 잘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임진왜란 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碑身과 螭首는 파손되었고, 龜趺는 다행히 파손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20) 그리고 조선후기에 들어와 坦奇의 주도로 白蓮寺 事蹟碑를 건립할 때 경비와 시간 등을 줄이기 위하여 파손되지 않은 기존의 中眞塔碑의 龜趺를 재활용하여, 그 위에 碑身과 屋蓋形 螭首를 새롭게 결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白蓮寺 事蹟碑는 龜趺와 碑身의측면 문양, 龜趺와 屋蓋形 螭首의 조성 시기가 양식사적으로 어울리지 않게 된것으로 보인다."
춘파당 부도 육안으로 당호가 확인되지 않았다. 백련사사적비(1681년)에 의하면 백련사에는 요새의 부도를 포함하여 8기 부도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도전 입구
부도전 예전에는 경내에 있었던 부도도 이곳으로 모신 것 같다. 상단에는 원구형 부도, 중단에는 범자문 부도를 비롯 2기 부도와 대좌. 하단에는 요새부도(추정)를 포함 3기 부도가 봉안되어 있다.
원구형 부도. 상단에 위치. 방형 지대석은 본래 부재여부가 불투명해 보인다.
하대석 하대석 하단, 중단, 상단이 하나의 부재로 상부에는 1단 괴임이 있다. 중단에는 연주문으로 구획하여 2개의 안상을 새겼다. 상단에는 연주문을 새긴 후 위에 복련을 조식하였다.
상대석 방형으로 하대석 보다 문양이 단순하다.
탑신 원구형으로 연주문을 표현하였다.
옥개석 팔각으로, 낙수면 물매가 급하고, 마루를 굵게 표현하였다. 조선시대 장명등 옥개석 느낌이다.
상륜부 보륜차럼 보이는 받침위에 보주를 올렸다.
장흥 보림사 석등,보조국사 부도,동서부도전에 이러한 작례가 남아 있다.
중단 부도 2기. 부도 하대석 1기가 있다.
원구형 부도 중단에 위치 당호를 새기지 않았다. 방형 탑신위에 종형 탑신, 옥개석을 올렸다. 옥개석 상부에는 상륜을 끼웠던 것으로 추정되는 촉이 돌출되어 있다.
팔각원당형 부도 중단에 위치
방형 지대석
기단부 하대석과 상대석이 일석이다.
하대석은 팔각으로 하단과 갑석을 표현하였고 위에 팔각 상대석을 일석으로 조성하였다. 호형 상대석 상부에는 받침을 조출하고 탑신석 하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 원형처럼 보이나 팔각이다.
옥개석과 상륜 팔각옥개석 물매가 급하며. 상륜에는 보륜형 보주 받침만 남아 있다.
부도 하대석 중단에 위치
하단
범(梵)자문 부도
방형지대석, 복련이 조식된 하대석 상부에는 1단 굄이 있다.
중대석 전면 당호를 새긴 듯 하지만 육안 식별이 어렵다.
중대석 측면 안상을 크게 구획하고 4개 귀꽃을 표현했다.
상대석과 탑신 상대석 하부에는 방형의 별석 받침을 두고 앙련을 조식하였다. 상부에는 1단 괴임을 두었다.
탑신 원구형이지만 배를 불려 방형 처럼 느껴지며 각면에 범(梵)자를 새겼다
옥개석 처마선이 들렸고, 낙수면 물매는 깊지 않으며, 내림마루 끝에는 귀꽃을 새겼다. 상륜에는 보주를 올렸다.
월인당月印堂 부도
방형 지대석 방형 기단 상부에 홈을 파고 팔각 탑신을 올렸다. 팔각옥개석 의 물매는 급하며, 상륜부는 결실되었다.
탑신에 월인당月印堂를 새기고, 대석에 가경구년갑자사월嘉慶九年甲子四月 명문이 있어 조성시기(1804년)와 주인공이 알려진 부도이다.
월인당은 미황사 출신의 총신聰信스님으로 백련사 대웅보전 중수기를 쓴 분이라고 전한다. 즉,숙종조에 기록한 사적비에 기록된 8기 부도와는 별개의 부도임을 알 수 있다.
부도전 하단과 중단
(傳)원묘국사 요세 부도
사적비의 내용 "원묘(圓妙)국사의 이름은 요세(了世)이니 원묘는 곧 시호(諡號)로 받은 것이다. 배움에 목우자(牧牛子) 보조(普照, 고려의 고승 지눌(知訥), 1158~1210년)국사와 더불어 속으로 들어맞는 부분이 있어 정하여 불법의 친구가 되었고 보조국사가 일찍이 “파도가 어지러우니 달이 드러나기 어렵고, 방이 깊으니 등불이 거듭 빛난다. 권하노니 그대는 마음 기량을 가다듬어, 감로수를 기울이지 말게나.”라는 게송을 원묘국사에게 주었다고 한다. 절 안에 옛날에 원묘국사의 비가 있었으니 그때 학사(學士) 최자(崔滋)가 왕명을 받들어 지은 것인데 지금 그 비는 없어지고 승탑 8개가 있어 그 중 하나가 원묘국사의 사리를 보장한 것으로 고려 왕이 중진탑(中眞塔)이라고 이름을 책봉한 것이다."
즉, 요세스님의 부도와 부도비가 백련사에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부도를 송광사에 남아있는 보조국사의 부도보다 간략화는 되었지만 거의 비슷한 유형의 부도로 미루어 원묘의 부도로 추정하는 듯 하다. 그러나 상단지역의 원구형 부도를 요세 부도로 추정하는 자료도 없지 않다.
나로서는 구분할 지식과 안목이 깊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송광사 보조국사 부도
보조국사 부도와 비교하면 보조국사부도는 탑신 옥개석이 팔각이며, 중대석이 있다.
4매석 지대석 기단부는 상대석,하대석으로 중대석을 표현하지 않았다. 방형 탑신, 옥개석도 방형이다. 옥개석 처마는 들려 있으며 물매는 급하다. 상륜에는 화염보주를 올렸다.
기단
탑신
옥개석과 상륜
백련사 답사를 13년 전에 하였으나 사진 한장 남아 있지 않아, 부도전은 늘 마음의 짐이 되었는데, 밀린 숙제를 마친 기분이다. 부도전의 부도는 만덕사 사적기에 당호와 위치가 전하는 부도로 추정되나 여러번 옮긴 까닭에 주인공을 밝힐 수없어 안타깝다. 더불어, 요세 스님의 중진탑비가 발견될 날을 기원해 본다.
2018.1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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