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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영암군

영암...원풍정. 관찰사 김병교 철비

by 임병기(선과) 2020.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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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풍정(願豊亭)

군서면 모정리 302-1. 모정마을

풍년을 바라는 정자 이름보다도 월출산과 넓은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오는 모정지 물가에 세워진 정자입니다.

정자에서 바라보는 달맞이는 황홀경을 연출할 것 같으며 홍련이 만개하면 연꽃 축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원풍정은 1557년 전남 담양부사로 재임하면서 식영정으로 담양에서 더 알려진 석천 임억령(1496~1568)의 형제가 지은 ‘쌍취정(雙醉亭)’이었던 것을  서호면 엄길리로 옮겨져 ‘수래정(修來亭)’으로 불리고 그자리에 원풍정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쌍취정(雙醉亭)은 사라졌고 이곳에 있었을 때 남긴 시만 남았다.   정자주인 임억령은 술과 시가 없이 이곳에 머물렀다면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랬다. 곤드레 만드레 마셨다.

장로남북몽 長勞南北夢 오랫동안 남과 북의 꿈에 꾸었더니 보파해산배 保把海山盃 우연히 해산에서 술잔을 잡네 만일군은보 萬一君恩報 만일 그대 은혜 갑고 자 하면 여군흥거애 輿君興去來 그대와 더불어 다시 돌아오리다.

 

원래의 쌍취정이 다른 마을로 옮겨지고, 모정마을 사람들이 풍년과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는  의미의 원풍정(願豊亭)이라는 정자를 새로 지어 졌고 지금의 정자는 1934년 마을 주민들의 뜻으로 지어져 풍원계를 조직 마을의 화목하는 장소로 이용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한국매일.남도정자기행에서 발췌 정리

 

한국매일. 원풍정

http://hankukmail.com/newshome/detail.php?number=19799&thread=21r03r06r01

 

임하소연林下小蓮. 임연林蓮

이분에 대한 정보도 찾지 못 했습니다.

 

금정 錦亭

서예가 금정은 누구?

 

원풍정 12경

지우야우(指南夜雨) 지남들녘에 내리는 밤비.  선장목적(仙掌牧笛) 선장의 목동의 피리소리 
덕진귀범(德津歸凡) 덕진의 돌아오는 범선.      월산반조(月山返照) 월산의 돌아오는 불빛 월산반조
서호백석(西湖白石) 서호의 흰돌                       연당추월(蓮塘秋月) 연당의 가을 달

아천명사(雅川明沙) 아천의 밝은 모래               학령귀운(鶴嶺歸雲)학고개의 돌아가는 구름

구림조연(鳩林朝烟) 구림의 아침연기                용강어화(龍江漁火)용강(영산강)어선의 불빛
갑사모종(岬寺暮鐘) 도갑사의 늦은 종소리        은적청람(隱跡晴嵐)은적산의 맑은 날에 아른거리는 아지랑이

 

출처.한국매일/남도정자 기행

 

12경은 원풍정 주련, 모정마을 벽화에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차경(借景)

 

원풍 12경 중

월산반조(月山返照) 주련, 멀리 월출산이 조망됩니다.

 

 

관찰사 김병교 영세불망비(金炳喬 永世不忘碑)

원풍정 옆에 위치 

 

김병교(金炳喬.1801~1876)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공기(公器). 김이장(金履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태순(金泰淳)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김교근(金敎根)이며, 어머니는 오재선(吳載選)의 딸이다. 형이 이조참판 김병조(金炳朝)다. 1851년(철종 2) 진사가 되고 이듬해 현감으로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지평(持平)이 되었다.

 

1853년 이조참판에 특진된 뒤 수원부유수·대사성을 거쳐 1856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857년 형조·예조의 판서, 한성부판윤·대사헌·우참찬 등을 역임하고, 그해 대호군(大護軍)으로 산실청권초관(産室廳捲草官)과 안태사(安胎使)를 겸하였다. 1862년 이조판서·좌참찬·공조판서를 지내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이듬해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실권을 잡자 사임하였다. 그러나 다시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용되어 1864년(고종 1) 형조판서가 되고, 1868년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도 공조판서·형조판서·판의금부사(判義禁府使)·상호군(上護軍)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다음 백과)

 

관찰사 김병교 영세불망비(金炳喬 永世不忘碑)

답궤관수 언실속중 畓樻灌水 堰實屬衆

명어송결 구이익송 明於訟決 久而益頌

(음역은 개인적인 판단임)

 

모정마을에 벽화에 관찰사 김병교의 판결문이 쓰여 있습니다.

1800년 초 어떤 집안에서 저수지 위의 농토를 팔고 마을 떠난 후, 다시 돌아와 농토는 매각했어도 저수지는 팔지 않았다며 모정저수지 소유권을 주장하여 주민들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 송사에서 김병교 관찰사는"논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논을 팔았을 때 수리시설인 저수지도 함께 판 것"이라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결국 저수지는 마을 소유가 되었으며, 주민들이 그 공을 잊지 않기 위헤 영세불망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후면

 

정사 오월 일 모정 민인 립(丁巳 五月 日 茅亭 民人 立)

김병조 관찰사가 1856년에 부임하였으므로 정사년은 1857년 이며, 1857년 5월 모정리 마을 사람들이 세웠습니다.

 

 

 

 

 

우리나라의 철비(목록,사진)

http://cafe.daum.net/moonhawje/MebK/321?q=%EC%9A%B0%EB%A6%AC%EB%82%98%EB%9D%BC%EC%9D%98%20%EC%B2%A0%EB%B9%84(%EB%AA%A9%EB%A1%9D%EA%B3%BC%20%EC%82%AC%EC%A7%84)

 

20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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