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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숭정처사 유허비(崇禎處士遺墟碑)

임병기(선과) 2020. 2. 24.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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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처사 유허비(崇禎處士遺墟碑)

대구시 동구 용수동  팔공산기독연수원 옆 용수천변에 위치



숭정처사 유허비(崇禎處士遺墟碑)

숭정(崇禎)은 명나라 마지막 연호로 명나라 폐망 후 둔산동 옻골마을 입향조인 대암 최동집((臺巖 崔東㠍)이 용수동 팔공산자락에  자락에 은거하여  말년을 보낸 곳으로 그를 숭정처사崇禎處士)로 부릅니다.


대암 최동집의 삶은 5세손인 백불암 최흥원(百弗菴 崔興遠)에 의해 널리 알려졌으며, 유허비문은 백불선생이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1720~1799)에게 부탁하여 받은 행장 입니다. 그러나, 유허비(遺墟碑)는  백불 최흥원의 증손자 지헌 최효술(止軒 崔孝述·1786~1870)선생이 1824년에 글을 새기고 1826년에 세웠습니다.


정면

숭정처사 유허(崇禎處士遺墟), 통판 정시용 서(書)


배면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이 찬撰한 ,숭정처사대암선생최공유허비명병서(序).


측면

박락이 심하여 거의 명문 판독이 어려운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옻골마을. 대암 최동집.백불 최흥원은 아래 링크 글 침조

http://cafe.daum.net/moonhawje/DjZP/4933



숭정처사 유허비(崇禎處士遺墟), 통판 정시용 서(書)

배면의 비문과 동시대에 새겼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비문보다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을 전면에 크게 새긴 경우는 기억에 없기 때문 입니다.

즉, 주객이 전도된 느낌입니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 등재된 정시용과 유허비문 글을 쓴 인물이 동일 인물이라는 가정하에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전면 암각 문을 새긴 년도를 추정해보겠습니다.


정시용容(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1786년(정조 10)~졸년 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유지(有之)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출신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정석증(鄭錫曾)이고, 조부는 대사간 정계순(鄭啓淳)이며, 부친은 청도군수(淸道郡守) 정동면(鄭東勉)이다. 외조부는 정언(正言) 임희일(任希一)이고, 처부는 송영재(宋永載)이다.

1814년(순조 14) 갑술 식년시에 생원으로 합격 하였다.
벼슬은 1828년 음관으로 황간현감(黃澗縣監)과 중외(中外)의 여러 벼슬을 거치고, 1854년(철종 5) 갑인 기로정시(耆老庭試) 문과에 69세로 급제하였다. 1854년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1857년(철종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었다. 1859년(철종 10) 가자(加資)되어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전임(轉任)되었다. 1861년(철종 12)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정시용容(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 30권, 순조 29년 11월 30일 경신 3번째기사 / 공충도 암행 어사 홍원모가 서계와 별단을 올리다

...황간 현감(黃澗縣監) 정시용(鄭始容)..."


순조 29년은 1829년, 황간 현감은 종6품


"-.철종실록 6권, 철종 5년 6월 25일 임진 1번째기사 / 도정을 행하여 홍종응·정시용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시용(鄭始容)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철종 5년은 1852년, 대사간은 정3품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는 1854년 대사간으로 등재)


유허비에 새겨진 통판(判)은 종5품 관직 입니다.

따라서 정시용의 관직 품계 기준으로 하면 유허비 전면 암각문(崇禎處士遺墟, 書)은 1830년~1851년간에 새겼습니다.


그런데, 유허비 배면 채제공이 찬한 글은 최효술의 농연입석기사聾淵立石記事(甲申三月。而先祖遯世之用甲。此事之始於此年。亦非偶然也。招鄭姓石手。先爲磨面。而刻字旣了)에 의하면 갑신(1824년)년에 새겼으므로 전면 암각문은 후대에 새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론적으로

비문은 채제공(1720~1799)이 찬하였으며, 배면의 각자(遺墟序)는 정시용이 1824년에 글을 쓰고, 유허비 전면의 각자(崇禎處士遺墟. 書)는 1830년~1851년 사이에 새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개인적인 견해이며,한문 해석, 관직 품계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측면 명문

박락이 심하여 육안 구분이 어렵습니다.


맨 좌측 상단 행(行)은 직급보다 낮은 관직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숭정처사 십일(崇禎處士 十一...)"


대암 최동집선생의 11대손을 뜻하는 각자?


11대손은

최시교(崔峕敎, 崔時敎, 1844~1918) 선생 입니다.



유허비 배면

깊히 감실을 파고 명문을 새겼으며, 육안으로 구분 되지 않습니다.



다행히 네이브 지식백과에 전문이 실려 있습니다.


公遺墟
. . . . . 諱東㠍. . . . . 退. . . . . . . . . . . . . . . . . . . . . . . . . 歿. . . . 使. . 未也. . . . . . . . . . . . 使.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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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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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아쉽게도 이 자료에는 행장을 부탁한 백불 최흥원과 번암 체제공이 찬撰한 내용만 기록되어 있고 글을 쓴 년대는 없습니다.


백불암 최흥원 百弗庵 崔興遠(1705~1786)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1720~1799년)


두 사람의 생몰년대를 비교하면 1,786년 이전이며, 번암이 서울 근교에서 은거했던 1780년~1788년 년간으로 추정합니다.


개인적 견해 입니다.


번암 채제공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55646



해석문도 네이버 지식백과에 실려 있습니다.


숭정처사대암선생최공유허비명병서(序)

팔공산()이 영남()에 이름이 드러나 초목과 구름과 안개가 드러나게 특이한 기운이 있는 것은 어찌 은일()하는 군자()가 그 속에서 있는 까닭이 아니겠는가? 그 군자()는 누구인가? 사부() 최공이 바로 이 분이다. 공의 이름은 동집(東㠍), 자()는 진중()이고 대암()은 호()이다. 한강() 정선생()의 문하에 종유()하여 학문하는 요결()을 들었다. 물러나서는 한 시대의 여러 명유()들과 더불어 도의()로 교분()을 맺어 성인()의 글이 아니면 강마()하지 않았으니 위기지학()의 독실함과 공부의 세밀함을 알 수 있다.

광해군() 때 생원()으로서 성균관()에 유학할 때 적신() 이이첨()이 교유하기를 청했으나 드디어 소매를 뿌리치고 고개를 넘어 고향으로 돌아와서 분수에 만족하며 배고픔을 잊었다.

인조() 기묘년(1639)에 유일()로 천거되어 능참봉()에 제수되었다. 다음 해에 효종()이 대군()으로 청나라의 심양()에 인질()로 갈 때 공을 대군사부()에 제수하였다. 공이 그 명을 듣고 곧 말을 달려 조정에 나아갔으나 길이 멀어 대군의 행차에 미치지 못하여 교체되어 통곡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갑신년(1644)에 명나라가 망하자 드디어 팔공산()에 들어가 농연()의 수석()이 좋은 곳에 초가()를 짓고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공이 돌아가신 지 백여 년이 되었는데 5세손 전() 익찬() 흥원()씨가 공의 유적()이 없어질까 두려워서 농연()의 옛 터에 다시 몇 칸의 집을 짓고 여러 자제들로 하여금 그 안에서 독서하여 이름난 조상의 구업()을 실추시키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그래도 흡족하지 않다고 여기고, 작은 집은 흥폐()가 무상()한 것이니 오래 갈 수 없고 오래 가기 위해서는 돌을 세움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곧 제공()에게 서신을 보내었는데 공의 사적()이 매우 자세하였다. 그 끝에 이르기를, “훌륭하지도 않은 것을 칭찬하는 것은 속이는 것이요 훌륭한 행의()가 있는데도 칭찬하지 않음은 어질지 못함이니 원하옵건대 귀하()께서는 우리 선조의 유허비명()을 지어 후생()들로 하여금 어질지 못한 사람에 이르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라 하였다. 제공()이 손을 씻고 읽고서는 탄복하여 말하기를, “요동()의 심양()으로 대군()을 따라가는 길은 험난한 길이다. 처자()들을 생각하는 사람은 형세를 살피고 머뭇거리지 않는 사람이 드문데 공은 홀로 용감하게 즐거운 땅에 나아가듯 하였다. 이윽고 대군 행차에 미치지 못하여 교체되었을 때에는 북쪽을 바라보며 크게 통곡했으니 이것은 춘추()시대의 개자추()가 진문공()의 망명()에 말고삐를 잡고 다닌 정성과 같다.

갑신년 이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 세상이 되어 의관과 문물이 오랑캐의 문화로 변하자 공은 필부()의 몸으로 이미 세상에 할 일이 없게 되어 마침내 멀리 세상을 피해 숨고 오직 입산한 곳이 깊지 않을까 두려워했으니 이것은 제()나라의 노중련()이 진()나라의 방자한 정치에 반대하여 동해()를 밟은 기풍()과 같다.

공의 충의와 대절()이 사람들의 이목()에 밝게 비추어져 지금까지 칭찬의 말이 어제의 일처럼 되었으니 공의 충의를 썩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은 비석이 아니겠는가? 비록 익찬공()이 효성에 독실하여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오래되어도 게을리 하지 않아 선조의 덕행()을 현양함에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으니 제공()이 어찌 감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드디어 명()을 붙인다.

팔공산 정상에 해와 달이 높게 비치도다.

공의 마음 여기에 있어 용연의 돌처럼 굳건하시네.

물은 천고토록 이어지니 공의 이름도 이와 더불어 가리라.

저 짧은 비갈에 어찌 경중을 모두 말하리오.

오직 후손들의 정성이 한없이 넓고 크니,

귀신들이 보호 유지하여 숨은 은덕 빛나게 하리라.



그리고

유허비를 조성한 배경은 최효술의 농연입석기사(聾淵立石記事)에 실려 있습니다..

필요한 부분은 해석하였지만 전문 해석은 언감생심 저의 능력 밖 입니다.


최효술(崔孝述)은 농연입석기사(聾淵立石記事)에서  계미년(癸未年· 1823년) 봄에 농연에서 돌을 발견하고 갑신년(甲申年.1824년)에 글을 새기고 세우려고 애를 썼으나 번번이 실패하여 중지하고((乙酉年.1825년),병술년(1826년)봄에 길씨 성을 가진 목수 주관으로 돌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처음부터 서 있는 바위가 아니라 누워 있던 자연석에 글을 쓴 후 세웠습니다.

뿐만아니라, 세운 방법을 묘사한 글도 보여 해석하면 건축,토목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세워 놓고 보니 지주중류석상(於是碑石屹然有中流砥柱之象)으로 보인다는 문장도  있습니다.

지주중류석(砥柱中流石)은 익히 아실 테고...


농연입석기사(聾淵立石記事)...최효술(崔孝述)

(출처.한국고전종합 DB)


聾淵。卽先祖臺巖先生崇禎甲申後遯世所也。歷歲久遺躅蕩然。祇有亭址在焉。在昔曾王考就其地。重建亭榭。又嘗營立一碑。乞文於樊巖蔡相公。而顧力有所未遑。以迄于今矣。癸未春。余避痘在山亭。與宗智族老興岐。日遊聾淵上。見一大石橫臥亭前。長數十尺。頭圓身直。上薄下厚。余曰傳後者貴於久存。古人有磨崖之例。此若磨刻一面。擧全體而立之。其長久之道乎。但其起立未可輕議。而曾見大屋將傾。以小杶而正之。今以杶而試之何如。族老曰苟用長杶。豈有不立之石。至其離地而半起也。何術而爲用杶之階乎。余曰若得空斛三百。每斛盛石。隨起隨築。最爲便好。而其盛石之道。使壯丁六十人。各持五斛。則三百之斛。不過半日事矣。遂以此決定。然此大事也。會諸宗議。皆言其甚難。而再從叔父洵曰此地此石。殆若有待。莫如斷定於今日。於是再從叔檢其事。族老爲之贊畫。而余實先後之。寔甲申三月。而先祖遯世之用甲。此事之始於此年。亦非偶然也。招鄭姓石手先爲磨面。而刻字旣了。遂伐杶而試之。大抵十丈之杶。可代百夫之力。而兩傍各竪二杶。上頭又竪三杶。七杶皆直立而後。繫繩懸石。使之貼地。石之起僅一寸許矣。而其擧措之際。極費智巧。著不得一毫麁氣。故用丁每不過數十。而一日僅一試而已。始役纔數旬。而石手病歸。至是石頭僅起一丈餘。而竪杶之事。又倍艱矣。余又自念轉借役丁。怠心一生。則竪杶之際。易有傷害。莫如專委本洞。而施以酬勞之資。爲完全不敗之術。僉議皆以爲不然。而持論各異。未得決定。竟以秋務中止乙酉春。又以痘警因寢。秋用一士友計。以長木橫繫石頭。以葛索幾千絛繫長木。而借丁三四百名。引而起之。曾不動一寸。無聊而散。丙戌春吉姓木手因人薦來。自用其智。但用繅車爲積石動得計。已而繅車裂碎。積石跳散。聲振山嶽。時幸役丁休止他處。無一受傷。殆鬼神佑之也。乃招洞中解事人懸重價。皆曰諾。兩傍則用四杶。上頭則用六七撑柱。動以分寸。至八九日乃立。於是碑石屹然有中流砥柱之象。。三年遷就。其亦有待於今日歟。葢本洞以我曾王考設約之故。有沒世不忘之意。曲盡誠意。如趨父事。是以累次赴役。而不以爲勞。及其末梢專委。非特感於賞而從之也。此極危至難之事。而千夫之役。曾無寸膚之傷。先世遺愛之地。亦若有感應者矣。是役也。決可否考勤慢者。再從叔也。持前驗應事機者族老也。余則僅能指揮戒飭。未嘗頃刻放心預盡防危之道。而石根缺處。塡補其基址而已。西南隅積小石數尺許。實廣詢而爲之也。




농연서당. 부인동동약공전답비 夫仁洞洞約公田碑


숭정처사 유허비에서 신무동마애여래좌상 방향 500여 미터 좌측에 위치




농연서당기記. 대산 이상정(1,802년)

(출처.한국고전종합DB)


公山之一支南走八九里,陡絶爲巖壁,面皆粉白,高十數丈。水出龍門,循山而下,至巖之陰而爲聾淵,兩旁巨石橫臥如籠几然。水瀉其中,潔淸紺寒,在一壑最爲奇處。水聲喧聒,咫尺不辨人語,淵之得名以此。東行十數武,又南折爲鼓淵,巨石橫峙,飛瀑駕空,噴洩泡沫,白日霧雷交騰。水上下數百步之間,科而成淵者凡九曲,聾淵正當其中,足以管領上下,而淵之北,寬衍深奧,可亭而俯焉。

往在崇禎庚辰,臺巖 崔公孝廟潛邸師傅,陪質于瀋館,旣在途而不及,則築室於此而隱約以終其身。顧今百年之後,遺蹟蕩然無復存者矣。甲戌春,來孫興源 汝浩甫慨然思有以修之,與諸族人,拓舊址、營小屋。屋凡三間,東二間爲齋曰洗心,西一間爲軒曰濯淸,後爲僧寮若干楹,合而扁曰聾淵書堂。鑿沼種蓮,築壇蒔菊,列以梅、竹、牧丹、海棠諸異卉。汝浩甫奉老多病,不能常處其中,使子弟讀書攻業,屬其友象靖,俾爲之記。余惟異時嘗與汝浩甫一過其地,勸其早爲經營,旣與聞乎始矣,其何說之辭?
夫以先先生早遊寒岡之門,得聞君子之道而以存心克己爲學,其媺言懿行必有可傳於後者,而今不可幸而得,則惟有從事於古昔聖賢之訓,以泝尋其門路耳。夫 “明誠兩進,敬義偕立”,朱先生之賦白鹿也。“存養於未發,省察於已發”,又所以記岳麓也。汝浩甫旣用力於此學,盍以是益加晩暮之工?又推而敎其子弟與其來學者,專意於此而不雜以他歧,則明誠盡而知行兩進,存省至而動靜互養。積眞之多、用力之專,從容而勿迫,悠久而無間,俛焉以盡其力,則俯仰顧眄之際,無非此理之流行。仁智動靜之機、天淵飛躍之妙,源源呈露於造次之頃而直與造物者遊。所謂洗心濯淸者,至是而可得以充其實而不流爲偸閒虛樂之歸矣。汝浩甫有子曰周鎭,有從子曰恒鎭,皆有志於學,亦嘗以是記爲託,而不幸病且死矣。感念存沒,不忍無一言,余亦有聞而無成者,亦因以自警焉

팔공산(八公山)의 한 자락이 남으로 8, 9리를 달려 내려오다가 가파르게 끊어져서 암벽이 되었는데, 벽면이 모두 분을 바른 듯 희고 높이가 10여 길이나 된다. 시냇물이 용문(龍門)에서 나와 산을 돌아 내려오다가 암벽의 북쪽에 이르러 농연(聾淵)을 이루니, 양쪽에 큰 바위가 마치 삼태기처럼 옆으로 누워 있고 물이 그 가운데로 쏟아져 내리는데 짙푸른 물이 깨끗하고 차가워서 계곡 전체 중에서 가장 멋진 곳이다. 물소리가 시끄러워서 바로 옆 사람 말도 알아듣지 못하니 귀머거리 못〔聾淵〕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서 동쪽으로 수십 걸음을 내려가다가 또 남쪽으로 꺾이어 고연(鼓淵)을 이루는데, 큰 바위가 가로질러 솟아 있고 허공을 타고 내리치는 폭포가 뿜어내는 물보라로 한낮에도 물안개와 우렛소리가 등등하다. 물줄기가 흐르는 위아래로 수백 보 사이에 웅덩이가 되어 못을 이룬 것이 모두 구곡(九曲)이나 되는데 농연은 그 한가운데 위치하여 위아래를 모두 살펴볼 수 있다. 농연의 북쪽은 지세가 너르고 평탄하면서 깊고 그윽하여 정자를 지어서 굽어볼 만한 곳이다.

예전 숭정 경진년(1640, 인조18)에, 효묘(孝廟)의 대군 시절 사부인 대암(臺巖) 최공(崔公)이 인질이 된 대군을 심양관(瀋陽館)으로 배종(陪從)하기로 하였는데, 이미 길에 올랐지만 미처 따르지 못하게 되자, 이곳에 집을 짓고 은거하여 일생을 마쳤다.

돌아보건대 이제 백 년이 지난 후이니 유적이 씻은 듯이 없어져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갑술년(1754, 영조30)에 5대손인 최흥원 여호(崔興遠汝浩) 씨가 탄식하여 그를 중건할 생각을 가지고 여러 족인과 더불어 옛터를 닦아서 작은 집을 지었다. 집은 모두 세 칸으로 동쪽의 두 칸은 재로 만들어서 ‘세심재(洗心齋)’라 하고, 서쪽의 한 칸은 마루를 만들어 ‘탁청헌(濯淸軒)’이라 하였으며, 뒤에 몇 개의 기둥을 세워 승방처럼 만들고 합하여 ‘농연서당(聾淵書堂)’이라고 편액을 걸었다.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단을 쌓아서 국화를 옮겨 심었으며, 매화ㆍ대ㆍ모란ㆍ해당화와 여러 기이한 화초를 줄지어 심었다.

여호 씨는 늙은 어버이를 봉양해야 하고 병이 많아서 항상 그 가운데 처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 자제들로 하여금 여기서 글을 읽고 학업에 전념하게 하고, 벗인 나에게 그 기문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내가 생각해 보니, 예전에 여호 씨와 그 지역을 한번 들러 보고는 그에게 빨리 일을 경영하도록 권하였으니, 이미 처음부터 참여하였는데 무슨 말로 사양하겠는가?

돌아가신 선생은 일찍이 한강(寒岡)의 문하에 종유하여 군자의 도를 듣고 존심(存心)과 극기(克己) 공부에 종사하였으니, 반드시 후세에 전할 만한 좋은 말씀과 아름다운 행실이 있었을 텐데 이제는 요행으로도 얻을 수가 없은즉, 오직 옛날 성현의 가르침에 종사하여 그 문로를 거슬러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무릇 명성(明誠)의 공부를 병행하고 경의(敬義)를 함께 세우라는 것은 주 선생(朱先生)이 〈백록동부(白鹿洞賦)〉에서 읊은 글이요, 정이 발하기 전에는 존양(存養)하는 공부를 하고 이미 발한 뒤에는 성찰(省察)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또 〈악록서원기(岳麓書院記)〉의 내용이다. 여호 씨가 이미 이러한 공부에 힘써 왔으니, 어찌 만년의 공부에서 이에 더욱 힘쓰지 않겠는가. 또 이 마음을 미루어 그 자제들과 후학들로 하여금 여기에만 뜻을 전일하게 하고 다른 길이 섞이지 않게 하면, 명성 공부가 극진하여 지행(知行) 공부가 둘 다 진보하고, 존양과 성찰 공부가 지극하여 동정(動靜) 간에 서로 함양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참된 공부를 많이 축적하고 힘쓰기를 전일하게 하되, 여유롭게 하여 촉박하게 하지 않으며 오래도록 간단없이 하여서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에도 어디든 이 이치의 유행이 아님이 없어서, 산수에서 인지(仁智)의 동정(動靜)을 깨닫는 기미나 연비어약에서 볼 수 있는 조화의 묘리가 잠깐 사이에도 끊임없이 드러나서 곧장 조물자와 더불어 노닐게 될 것이다. 이른바 세심재나 탁청헌이라는 이름도 이에 이르러서야 그 실질을 채울 수 있고, 한가한 틈을 타서 헛되어 즐기는 데로 빠지지 않을 것이다.

여호 씨의 아들 최주진(崔周鎭)과 조카 최항진(崔恒鎭)이 모두 학문에 뜻을 두고 또 나에게 이 기문을 부탁했었는데 불행하게도 병들어 죽었으니, 생사에 대한 유감으로 차마 한마디 없을 수가 없다. 나 또한 도를 듣기는 했으나 성취하지는 못한 자이기에 역시 이 글로 인하여 스스로를 경계하는 바이다.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부인동동약공전답비 夫仁洞洞約公田碑

백불암 최흥원이 1765년(영조 41) 61세 때 동약(마을 단위로 이루어진 자치규약)을 실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전비문을 새긴 비.

일제강점기 대홍수로 공전비가 유실 된 후  2000년 7월에 재건.


夫仁洞洞約公田碑(출처.한국고전종합 DB)

此洞最深僻。居民朴愚無詐。我先祖臺巖先生。甲申以後。隱居聾淵上。糾檢民俗遺風。至今不衰。不肖孫興遠。又爲洞民齊懇。復修舊約。參以時宜。立約聞官。歲一會講。以明人皆有愛親忠君之秉彛。然顧無自修之實。又無先富之制。變化民俗。盖不可易議。况此洞水田多。土不宜緜。民不業織。而以達城一邑。通爲宜緜之地。民夫稅役。皆出於緜。獨此一區。不可以緜貴有異。則農民秋收。太半爲稅役之費。雖樂歲不免於催困。而不勝其飢寒也。余乃約約中之饒者。謀所以先公便民之道。鬻洞田一段。得數千錢。又以講會用餘別儲。逐年保長剪息買土。至數十年。所買水田。近百餘斗地。儲租近數百斛。名其田曰公田。庫曰公庫。卽以此當約中民夫稅役。此殆取井田中百畒爲公田之義也。於是催租之吏不入。洞民得以安。向之飢寒者。今或有衣食。衆情咸樂。肯受所敎。古聖所謂先富後敎。良以是也。然人情患終怠。美蹟恐易泯。遂就講舍下。特立大石。磨其面。以事實刻。圖所以永久。噫。約中上下人後孫。苟能以今日諸人之心爲心。顧名思義。一心奉公。毋敢干私。則庶幾爲家之能子。國之良民。不然當不免於悖子奸民之律矣。各宜勉之哉。百弗翁識。


해석문 요약(네이버 지식백과)

대암 최동집 공이 농연()에 은거하시면서 민속을 규검하여 남은 풍속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쇠퇴하지 않았다. 동민들의 간절한 바람을 위하여 옛 규약을 닦고 시의()를 참작하여 규약을 세워서 관부()에 알리고 해마다 한 번씩 모여서 강론하여 사람들이 모두 애친()하고 충군()하는 병이()가 있는 것을 밝혔으나, 돌아보건대 스스로 닦은 실적이 없고 먼저 부유하게 할 제도가 없으니 민속을 변화시키는 것을 대개 쉽게 논의 할 수 없었다. 더욱이 달성지방은 목화재배에 알맞은 땅이라 간주하여 세역을 모두 목화로 내게 하였는데, 부인동은 수전()으로 땅이 목화에 알맞지 않아 풍년이 들어도 최곤()함을 면하지 못하여 기한()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약중()에서 요부()한 자와 약속하여 공세를 먼저 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를 도모하여, 동전() 1단()을 팔아 수천 전()을 받고 또 강회에 쓰고 남는 것을 별도로 저축하여 해마다 늘였다가 이자를 떼어서 토지를 사기로 하여 수십 년에 이르니 사들인 수전()이 백여 두락에 가깝고 저축한 곡식도 수백 곡에 가까웠다. 그 밭을 공전()이라 하고 창고를 공고()라 하여, 바로 이것으로써 약중() 민부()의 세역에 충당하기로 하였으니, 이것은 거의 정전제() 중에서 백 묘를 취하여 공전으로 삼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마침내 게을러지는 것이 걱정이 되고 아름다운 자취가 쉽게 사라질까 두려워서, 드디어 강사() 아래에다 큰 돌을 세우고 그 석면()에 사실대로 새겨서 영구히 남기를 도모한다.

이에 약중(約中)에서 요부(饒富)한 자와 약속하여 공세를 먼저 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를 도모하여, 동전(洞田) 1단(段)을 팔아 수천 전(錢)을 받고 또 강회에 쓰고 남는 것을 별도로 저축하여 해마다 늘였다가 이자를 떼어서 토지를 사기로 하여 수십 년에 이르니 사들인 수전(水田)이 백여 두락에 가깝고 저축한 곡식도 수백 곡에 가까웠다. 그 밭을 공전(公田)이라 하고 창고를 공고(公庫)라 하여, 바로 이것으로써 약중(約中) 민부(民夫)의 세역에 충당하기로 하였으니, 이것은 거의 정전제(井田制) 중에서 백 묘를 취하여 공전으로 삼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마침내 게을러지는 것이 걱정이 되고 아름다운 자취가 쉽게 사라질까 두려워서, 드디어 강사(講舍) 아래에다 큰 돌을 세우고 그 석면(石面)에 사실대로 새겨서 영구히 남기를 도모한다.



용수동. 부인동

우리 답사객에게 익숙한 용수동 당산.신무동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곳 입니다.


비석, 기문, 불화 화기. 발원문. 부도 등등...

명나라 마지막 연호인 숭정 년호가 폐망 이후에도 오랫동안 우리 문화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역사의 흐름을 모화사상, 사대사상의  발로로 치부하는 시각도  없지 않으나,  부끄럽게도 우리의 외교 현실은 당시 보다 오히려 더 자유롭지 못 합니다.


아울러, 이글을 준비하면서 용수동 부근에 최효술 선생이 노래한 농연구곡(聾淵九曲)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지하였으며, 기회가 되면 답사해보리라 다짐 합니다.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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