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정처사 유허비(崇禎處士遺墟碑) 대구시 동구 용수동 팔공산기독연수원 옆 용수천변에 위치 숭정처사 유허비(崇禎處士遺墟碑) 숭정(崇禎)은 명나라 마지막 연호로 명나라 폐망 후 둔산동 옻골마을 입향조인 대암 최동집((臺巖 崔東㠍)이 용수동 팔공산자락에 자락에 은거하여 말년을 보낸 곳으로 그를 숭정처사崇禎處士)로 부릅니다. 대암 최동집의 삶은 5세손인 백불암 최흥원(百弗菴 崔興遠)에 의해 널리 알려졌으며, 유허비문은 백불선생이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1720~1799)에게 부탁하여 받은 행장 입니다. 그러나, 유허비(遺墟碑)는 백불 최흥원의 증손자 지헌 최효술(止軒 崔孝述·1786~1870)선생이 1824년에 글을 새기고 1826년에 세웠습니다. 정면 숭정처사 유허(崇禎處士遺墟), 통판 정시용 서(通判 鄭始容 書) 배면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이 찬撰한 ,숭정처사대암선생최공유허비명병서(崇禎處士臺巖先生崔公遺墟碑銘竝序). 측면 박락이 심하여 거의 명문 판독이 어려운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옻골마을. 대암 최동집.백불 최흥원은 아래 링크 글 침조 http://cafe.daum.net/moonhawje/DjZP/4933 숭정처사 유허비(崇禎處士遺墟), 통판 정시용 서(通判 鄭始容 書) 배면의 비문과 동시대에 새겼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비문보다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을 전면에 크게 새긴 경우는 기억에 없기 때문 입니다. 즉, 주객이 전도된 느낌입니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 등재된 정시용과 유허비문 글을 쓴 인물이 동일 인물이라는 가정하에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전면 암각 문을 새긴 년도를 추정해보겠습니다. 정시용鄭始容(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1786년(정조 10)~졸년 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유지(有之)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출신지는 서울이다. 정시용鄭始容(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 30권, 순조 29년 11월 30일 경신 3번째기사 / 공충도 암행 어사 홍원모가 서계와 별단을 올리다 ...황간 현감(黃澗縣監) 정시용(鄭始容)..." 순조 29년은 1829년, 황간 현감은 종6품 "-.철종실록 6권, 철종 5년 6월 25일 임진 1번째기사 / 도정을 행하여 홍종응·정시용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시용(鄭始容)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철종 5년은 1852년, 대사간은 정3품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는 1854년 대사간으로 등재) 유허비에 새겨진 통판(通判)은 종5품 관직 입니다. 따라서 정시용의 관직 품계 기준으로 하면 유허비 전면 암각문(崇禎處士遺墟, 通判 鄭始容 書)은 1830년~1851년간에 새겼습니다. 그런데, 유허비 배면 채제공이 찬한 글은 최효술의 농연입석기사聾淵立石記事(甲申三月。而先祖遯世之用甲。此事之始於此年。亦非偶然也。招鄭姓石手。先爲磨面。而刻字旣了)에 의하면 갑신(1824년)년에 새겼으므로 전면 암각문은 후대에 새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론적으로 비문은 채제공(1720~1799)이 찬하였으며, 배면의 각자(遺墟碑銘竝序)는 정시용이 1824년에 글을 쓰고, 유허비 전면의 각자(崇禎處士遺墟. 通判 鄭始容 書)는 1830년~1851년 사이에 새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개인적인 견해이며,한문 해석, 관직 품계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측면 명문 박락이 심하여 육안 구분이 어렵습니다. 맨 좌측 상단 행(行)은 직급보다 낮은 관직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숭정처사 십일(崇禎處士 十一...)" 대암 최동집선생의 11대손을 뜻하는 각자? 11대손은 최시교(崔峕敎, 崔時敎, 1844~1918) 선생 입니다. 유허비 배면 깊히 감실을 파고 명문을 새겼으며, 육안으로 구분 되지 않습니다. 다행히 네이브 지식백과에 전문이 실려 있습니다. 崇禎處士臺巖先生崔公遺墟碑銘竝序 八公之頂, 日月高臨. 公心在玆, 聾淵之石. 水續千古, 公名與之. 彼短者碣, 豈曰重輕. 維後孫誠, 茫茫浩刦. 鬼護神持, 潛德之輝. 그러나 아쉽게도 이 자료에는 행장을 부탁한 백불 최흥원과 번암 체제공이 찬撰한 내용만 기록되어 있고 글을 쓴 년대는 없습니다. 백불암 최흥원 百弗庵 崔興遠(1705~1786)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1720~1799년) 두 사람의 생몰년대를 비교하면 1,786년 이전이며, 번암이 서울 근교에서 은거했던 1780년~1788년 년간으로 추정합니다. 개인적 견해 입니다. 번암 채제공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55646 해석문도 네이버 지식백과에 실려 있습니다. 숭정처사대암선생최공유허비명병서(崇禎處士臺巖先生崔公遺墟碑銘竝序) 공의 마음 여기에 있어 용연의 돌처럼 굳건하시네. 물은 천고토록 이어지니 공의 이름도 이와 더불어 가리라. 저 짧은 비갈에 어찌 경중을 모두 말하리오. 오직 후손들의 정성이 한없이 넓고 크니, 귀신들이 보호 유지하여 숨은 은덕 빛나게 하리라. 그리고 유허비를 조성한 배경은 최효술의 농연입석기사(聾淵立石記事)에 실려 있습니다.. 필요한 부분은 해석하였지만 전문 해석은 언감생심 저의 능력 밖 입니다. 최효술(崔孝述)은 농연입석기사(聾淵立石記事)에서 계미년(癸未年· 1823년) 봄에 농연에서 돌을 발견하고 갑신년(甲申年.1824년)에 글을 새기고 세우려고 애를 썼으나 번번이 실패하여 중지하고((乙酉年.1825년),병술년(1826년)봄에 길씨 성을 가진 목수 주관으로 돌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처음부터 서 있는 바위가 아니라 누워 있던 자연석에 글을 쓴 후 세웠습니다. 뿐만아니라, 세운 방법을 묘사한 글도 보여 해석하면 건축,토목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세워 놓고 보니 지주중류석상(於是碑石屹然有中流砥柱之象)으로 보인다는 문장도 있습니다. 지주중류석(砥柱中流石)은 익히 아실 테고... 농연입석기사(聾淵立石記事)...최효술(崔孝述) (출처.한국고전종합 DB) 聾淵。卽先祖臺巖先生崇禎甲申後遯世所也。歷歲久遺躅蕩然。祇有亭址在焉。在昔曾王考就其地。重建亭榭。又嘗營立一碑。乞文於樊巖蔡相公。而顧力有所未遑。以迄于今矣。癸未春。余避痘在山亭。與宗智族老興岐。日遊聾淵上。見一大石橫臥亭前。長數十尺。頭圓身直。上薄下厚。余曰傳後者貴於久存。古人有磨崖之 농연서당聾淵書堂. 부인동동약공전답비 夫仁洞洞約公田碑 숭정처사 유허비에서 신무동마애여래좌상 방향 500여 미터 좌측에 위치 농연서당기聾淵書堂記. 대산 이상정(1,802년) (출처.한국고전종합DB) 公山之一支南走八九里,陡絶爲巖壁,面皆粉白,高十數丈。水出龍門,循山而下,至巖之陰而爲聾淵,兩旁巨石橫臥如籠几然。水瀉其中,潔淸紺寒,在一壑最爲奇處。水聲喧聒,咫尺不辨人語,淵之得名以此。東行十數武,又南折爲鼓淵,巨石橫峙,飛瀑駕空,噴洩泡沫,白日霧雷交騰。水上下數百步之間,科而成淵者凡九曲,聾淵正當其中,足以管領上下,而淵之北,寬衍深奧,可亭而俯焉。 往在崇禎庚辰,臺巖 崔公以孝廟潛邸師傅,陪質于瀋館,旣在途而不及,則築室於此而隱約以終其身。顧今百年之後,遺蹟蕩然無復存者矣。甲戌春,來孫興源 汝浩甫慨然思有以修之,與諸族人,拓舊址、營小屋。屋凡三間,東二間爲齋曰洗心,西一間爲軒曰濯淸,後爲僧寮若干楹,合而扁曰聾淵書堂。鑿沼種蓮,築壇蒔菊,列以梅、竹、牧丹、海棠諸異卉。汝浩甫奉老多病,不能常處其中,使子弟讀書攻業,屬其友象靖,俾爲之記。余惟異時嘗與汝浩甫一過其地,勸其早爲經營,旣與聞乎始矣,其何說之辭? 夫以先先生早遊寒岡之門,得聞君子之道而以存心克己爲學,其媺言懿行必有可傳於後者,而今不可幸而得,則惟有從事於古昔聖賢之訓,以泝尋其門路耳。夫 “明誠兩進,敬義偕立”,朱先生之賦白鹿也。“存養於未發,省察於已發”,又所以記岳麓也。汝浩甫旣用力於此學,盍以是益加晩暮之工?又推而敎其子弟與其來學者,專意於此而不雜以他歧,則明誠盡而知行兩進,存省至而動靜互養。積眞之多、用力之專,從容而勿迫,悠久而無間,俛焉以盡其力,則俯仰顧眄之際,無非此理之流行。仁智動靜之機、天淵飛躍之妙,源源呈露於造次之頃而直與造物者遊。所謂洗心、濯淸者,至是而可得以充其實而不流爲偸閒虛樂之歸矣。汝浩甫有子曰周鎭,有從子曰恒鎭,皆有志於學,亦嘗以是記爲託,而不幸病且死矣。感念存沒,不忍無一言,余亦有聞而無成者,亦因以自警焉 팔공산(八公山)의 한 자락이 남으로 8, 9리를 달려 내려오다가 가파르게 끊어져서 암벽이 되었는데, 벽면이 모두 분을 바른 듯 희고 높이가 10여 길이나 된다. 시냇물이 용문(龍門)에서 나와 산을 돌아 내려오다가 암벽의 북쪽에 이르러 농연(聾淵)을 이루니, 양쪽에 큰 바위가 마치 삼태기처럼 옆으로 누워 있고 물이 그 가운데로 쏟아져 내리는데 짙푸른 물이 깨끗하고 차가워서 계곡 전체 중에서 가장 멋진 곳이다. 물소리가 시끄러워서 바로 옆 사람 말도 알아듣지 못하니 귀머거리 못〔聾淵〕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서 동쪽으로 수십 걸음을 내려가다가 또 남쪽으로 꺾이어 고연(鼓淵)을 이루는데, 큰 바위가 가로질러 솟아 있고 허공을 타고 내리치는 폭포가 뿜어내는 물보라로 한낮에도 물안개와 우렛소리가 등등하다. 물줄기가 흐르는 위아래로 수백 보 사이에 웅덩이가 되어 못을 이룬 것이 모두 구곡(九曲)이나 되는데 농연은 그 한가운데 위치하여 위아래를 모두 살펴볼 수 있다. 농연의 북쪽은 지세가 너르고 평탄하면서 깊고 그윽하여 정자를 지어서 굽어볼 만한 곳이다. 예전 숭정 경진년(1640, 인조18)에, 효묘(孝廟)의 대군 시절 사부인 대암(臺巖) 최공(崔公)이 인질이 된 대군을 심양관(瀋陽館)으로 배종(陪從)하기로 하였는데, 이미 길에 올랐지만 미처 따르지 못하게 되자, 이곳에 집을 짓고 은거하여 일생을 마쳤다. 돌아보건대 이제 백 년이 지난 후이니 유적이 씻은 듯이 없어져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갑술년(1754, 영조30)에 5대손인 최흥원 여호(崔興遠汝浩) 씨가 탄식하여 그를 중건할 생각을 가지고 여러 족인과 더불어 옛터를 닦아서 작은 집을 지었다. 집은 모두 세 칸으로 동쪽의 두 칸은 재로 만들어서 ‘세심재(洗心齋)’라 하고, 서쪽의 한 칸은 마루를 만들어 ‘탁청헌(濯淸軒)’이라 하였으며, 뒤에 몇 개의 기둥을 세워 승방처럼 만들고 합하여 ‘농연서당(聾淵書堂)’이라고 편액을 걸었다.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단을 쌓아서 국화를 옮겨 심었으며, 매화ㆍ대ㆍ모란ㆍ해당화와 여러 기이한 화초를 줄지어 심었다. 여호 씨는 늙은 어버이를 봉양해야 하고 병이 많아서 항상 그 가운데 처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 자제들로 하여금 여기서 글을 읽고 학업에 전념하게 하고, 벗인 나에게 그 기문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내가 생각해 보니, 예전에 여호 씨와 그 지역을 한번 들러 보고는 그에게 빨리 일을 경영하도록 권하였으니, 이미 처음부터 참여하였는데 무슨 말로 사양하겠는가? 돌아가신 선생은 일찍이 한강(寒岡)의 문하에 종유하여 군자의 도를 듣고 존심(存心)과 극기(克己) 공부에 종사하였으니, 반드시 후세에 전할 만한 좋은 말씀과 아름다운 행실이 있었을 텐데 이제는 요행으로도 얻을 수가 없은즉, 오직 옛날 성현의 가르침에 종사하여 그 문로를 거슬러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무릇 명성(明誠)의 공부를 병행하고 경의(敬義)를 함께 세우라는 것은 주 선생(朱先生)이 〈백록동부(白鹿洞賦)〉에서 읊은 글이요, 정이 발하기 전에는 존양(存養)하는 공부를 하고 이미 발한 뒤에는 성찰(省察)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또 〈악록서원기(岳麓書院記)〉의 내용이다. 여호 씨가 이미 이러한 공부에 힘써 왔으니, 어찌 만년의 공부에서 이에 더욱 힘쓰지 않겠는가. 또 이 마음을 미루어 그 자제들과 후학들로 하여금 여기에만 뜻을 전일하게 하고 다른 길이 섞이지 않게 하면, 명성 공부가 극진하여 지행(知行) 공부가 둘 다 진보하고, 존양과 성찰 공부가 지극하여 동정(動靜) 간에 서로 함양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참된 공부를 많이 축적하고 힘쓰기를 전일하게 하되, 여유롭게 하여 촉박하게 하지 않으며 오래도록 간단없이 하여서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에도 어디든 이 이치의 유행이 아님이 없어서, 산수에서 인지(仁智)의 동정(動靜)을 깨닫는 기미나 연비어약에서 볼 수 있는 조화의 묘리가 잠깐 사이에도 끊임없이 드러나서 곧장 조물자와 더불어 노닐게 될 것이다. 이른바 세심재나 탁청헌이라는 이름도 이에 이르러서야 그 실질을 채울 수 있고, 한가한 틈을 타서 헛되어 즐기는 데로 빠지지 않을 것이다. 여호 씨의 아들 최주진(崔周鎭)과 조카 최항진(崔恒鎭)이 모두 학문에 뜻을 두고 또 나에게 이 기문을 부탁했었는데 불행하게도 병들어 죽었으니, 생사에 대한 유감으로 차마 한마디 없을 수가 없다. 나 또한 도를 듣기는 했으나 성취하지는 못한 자이기에 역시 이 글로 인하여 스스로를 경계하는 바이다.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부인동동약공전답비 夫仁洞洞約公田碑 백불암 최흥원이 1765년(영조 41) 61세 때 동약(마을 단위로 이루어진 자치규약)을 실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전비문을 새긴 비. 일제강점기 대홍수로 공전비가 유실 된 후 2000년 7월에 재건. 夫仁洞洞約公田碑(출처.한국고전종합 DB) 此洞最深僻。居民朴愚無詐。我先祖臺巖先生。甲申以後。隱居聾淵上。糾檢民俗遺風。至今不衰。不肖孫興遠。又爲洞民齊懇。復修舊約。參以時宜。立約聞官。歲一會講。以明人皆有愛親忠君之秉彛。然顧無自修之實。又無先富之制。變
대암 최동집 공이 농연(聾淵)에 은거하시면서 민속을 규검하여 남은 풍속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쇠퇴하지 않았다. 동민들의 간절한 바람을 위하여 옛 규약을 닦고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규약을 세워서 관부(官府)에 알리고 해마다 한 번씩 모여서 강론하여 사람들이 모두 애친(愛親)하고 충군(忠君)하는 병이(秉彝)가 있는 것을 밝혔으나, 돌아보건대 스스로 닦은 실적이 없고 먼저 부유하게 할 제도가 없으니 민속을 변화시키는 것을 대개 쉽게 논의 할 수 없었다. 더욱이 달성지방은 목화재배에 알맞은 땅이라 간주하여 세역을 모두 목화로 내게 하였는데, 부인동은 수전(水田)으로 땅이 목화에 알맞지 않아 풍년이 들어도 최곤(催困)함을 면하지 못하여 기한(飢寒)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용수동. 부인동 우리 답사객에게 익숙한 용수동 당산.신무동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곳 입니다. 비석, 기문, 불화 화기. 발원문. 부도 등등... 명나라 마지막 연호인 숭정 년호가 폐망 이후에도 오랫동안 우리 문화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역사의 흐름을 모화사상, 사대사상의 발로로 치부하는 시각도 없지 않으나, 부끄럽게도 우리의 외교 현실은 당시 보다 오히려 더 자유롭지 못 합니다. 아울러, 이글을 준비하면서 용수동 부근에 최효술 선생이 노래한 농연구곡(聾淵九曲)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지하였으며, 기회가 되면 답사해보리라 다짐 합니다. 2020.0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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