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골마을 대구 동구 둔산동에 위치 1616년(광해 8년) 조선 중기의 학자 대암 최동집(崔東㠍, 1586~1661)이 입향조이며 경주최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배산임수, 남향.마을 숲 등의 전형적인 취락구조를 갖춘 마을로 옻나무가 많아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는 이야기가 구전됩니다. 현재는 백불고택을 중심으로 보본당(報本堂), 동계정(東溪亭), 가묘(家廟), 숭모각과 여러채의 일가의 가옥이 모여 있습니다. 최동집(崔東㠍, 1586~1661)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진중(鎭仲).호는 대암(臺巖).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에 의병으로 활동한 태동 최계(台洞 崔誡.1567∼1622)의 둘째 아들이며,한강(寒岡) 정구의 문하 입니다. 1616년(광해군 8) 병진(丙辰)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하고, 참봉에 제수되어 대군의 스승이 되었고, 명나라가 망한 뒤 팔공산 자락 용수동에 은거하며 명나라 마지막 연호인 숭정을 기리며 숭정처사로 살았다고 합니다. 대암(臺巖)의 삶은 5세손인 백불암 최흥원(百弗菴 崔興遠)에 의해 널리 알려졌습니다. 백불암은 효자로 유명했으며, 지금의 용수동 부인동 일대의 주민을 위해 부인동규(夫仁洞規)을 만들어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하였고 농연서당(聾淵書堂)을 지었으며, 숭정처사유허비(崇禎處士遺墟碑)를 세웠습니다. 숭정처사 유허비(崇禎處士遺墟碑) 대구 동구 용수동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1720~1799)이 찬하고 정시용(鄭始容) 글씨. 백불암 최흥원(白拂庵 崔興遠)이 채제공(蔡濟恭)에게 청해 비문을 받았지만 비는 최흥원의 증손자 지헌 최효술(止軒 崔孝述·1786~1870)선생이 세웠다고 합니다. 최효술(崔孝述)은 농연입석기사(聾淵立石記事)에서 계미년(癸未年· 1823년) 봄에 농연에서 이 돌을 발견하고 1824년 글을 새기고 세우려고 애를 썼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3년이 지난 병술년(1826년) 봄에 돌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숭정처사 유허비(崇禎處士遺墟碑) 비문 부인동 동약 공전비 夫仁洞洞約公田碑 농연서당(聾淵書堂) 대구 동구 용수동 까치발로 바라본 서당에는 농연서당聾淵書堂 현판과 미수 허목의 전서체로 쓴 계정유서 溪亭幽棲 현판만 보였습니다. 입향조 최동집(崔東㠍, 1586~1661)의 종택인 백불고택 제일 뒤쪽에 위치하며, 후손들의 집이 앞쪽으로 자리합니다. 대암(臺岩) 마을 뒤산 바위를 대암으로 칭하며, 입향조 최동집선생의 아호입니다. 또한 봉우리를 살아있는 거북이라 하여 생구암(生龜岩)이라 부르며 비보책으로 마을 숲에 조성한 저수지의 근원입니다. 동수洞藪 우리 전통 취락 배치의 전형으로 마을 숲입니다. 마을의 일차 수호신인 장승에 이어 마을 입구에 조성하여 마을의 안녕,풍농 을 기원하며 동제를 올리는 성황당이 위치하는 공간입니다.또한 마을의 수구막이로 마을의 기운과 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밖에서 유입되는는 사악한 기운을 차단하는 상징성과 더불어 방풍림의역활도 합니다. 군위 한밤마을를 비롯하여 여러 지방에는 마을 숲에 솟대를 조성하여 화재 예방을 염원합니다. 군위 한밤마을 마을숲의 솟대 연못 천원지방으로 조성한 비보 목적의 인위적인 못으로, 마을 뒤산 거북이 도망가지 않도록 조성한 상징성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청도 주구산의 위치한 덕사(떡절), 성주의 지형이 소가 않아있는 형국이어서 초전草田이라는 지명으로 소가 도망가지 못 하도록하는 등등의 우리나라 경향각지에는 비보책의 널리 분포되어 있습니다. 회화나무 마을 숲을 지나 마을 입구에 두 그루가 위치 입향조 최동집 선생이 심은 나무로 회화나무는 자손 번영과 마을 수호신 역활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습니다. 회화나무 "중국이 고향인 회화나무는 상서로운 나무로 생각하여 중국인들도 매우 귀하게 여겼다. 회화나무를 문 앞에 심어두면 잡귀신의 접근을 막아 그 집안이 내내 평안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학자수(學者樹)’가 있으며, 영어 이름도 같은 의미인 ‘스칼러 트리(scholar tree)’다. 나무의 가지 뻗은 모양이 멋대로 자라 ‘학자의 기개를 상징한다’라는 풀이도 있다. 반대로 아무 곳이나 이익이 있는 곳에는 가지를 뻗어대는 곡학아세(曲學阿世)를 대표하는 나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어쨌든 옛 선비들이 이사를 가면 마을 입구에 먼저 회화나무를 심어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선비가 사는 곳’임을 만천하에 천명했다. 더불어 뒷산에는 기름을 짤 수 있는 쉬나무를 심어 불을 밝히고 글을 읽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이렇게 회화나무는 여러 이유로 궁궐은 물론 서원, 문묘, 이름난 양반 마을의 지킴이 나무로 흔히 만난다."(다음 백과사전) 정려각旌閭閣 백불암百弗菴 선생의 효행을 기려 선생의 사후인 1789년 지었습니다. 내부에는 정조가 하사한 홍패가 걸려 있습니다. 백불암 최흥원(百弗菴 崔興遠.1705년~1786년) 자는 태초(太初), 여호(汝浩), 호는 수구암(數咎菴), 백불암(百弗菴), 칠계(漆溪) 백불암은 학문적으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과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 1713-1782)과 함께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알려져 있습니다. "묘지명을 순암 안정복(1712-1791)이 썼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불암은 성호 이익(1681-1763)이나 번암 채제공과 같은 근기 남인들과도 폭넓게 교류했다고 합니다. 44살 때(영조24) 유형원(1622-1673)의 저술인 腑雍値?磻溪隧錄, 26권 13책, 잘못된 국가 법제를 전면 개혁할 것을 내용으로 한 저술)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47세 때는 아들 최주진이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길에 경기도 안산으로 가 성호 이익 선생을 찾아보게 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자제들에게 반계수록을 정서하게 했다. 종손의 증언에 의하면 지금 종가의 보본당 왼쪽 방에서 백불암이 반계수록을 교정했다 한다. 실학(實學)을 처음으로 체계화했다는 평을 받는 유형원의 주요 저술인 반계수록을 백불암이 교정했다는 사실은 크게 주목되는 일이다. 이 책은 영조의 명으로 경상감영에서 1770년 간행했는데, 그 교정 본부가 종택 내 보본당(報本堂)에 차려졌고 선생의 총괄책임 하에 문인(門人)들의 참여로 완성되었다고 정리될 수 있다. 백불암의 학문은 향약에서도 본 바와 같이 그 실천에 초점이 두어져 있었다. 그는 민생(民生)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가 56년 동안 쓴 일기에서 끊임없이 농사 문제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나, 선산(先山)이 있는 지역의 백성들이 부채(扇) 공출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평생 부채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 등은 그의 실천적 학문 태도와 연관해 주목할 부분이다. "(다음에서 발췌) 효자 孝子 증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贈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 兼 ( )경연참찬관 행 어모장군 ( )經筵參贊官 行 禦侮將軍 ( )세자익위사익찬 ( )世子翊衛司 翊贊 최흥원지려 崔興遠之閭 상지 13년 上之十三年 동행한 대구시관광문화유산해설사 송은석님이 알려주신 편액 구성 贈이 문장 앞쪽에 올려 쓴 것은 임금님이 정려했다는 의미이며 行은 현직 직급 보다 낮은 직급이 맡는 자리에 보임을 뜻하고 한 칸 띄어쓰기는 임금, 왕자를 뜻하는 문장이 이어지는 경우라고 설명 했습니다. 上之는 임금을 뜻하며, 여기서는 정려한 정조 13년, 1789년 입니다. 옻골마을 담장 국가등록문화재 266호 "옻골마을 옛 담장은 흙다짐에 돌을 박은 형식인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며, 마을 안길의 돌담길이 대부분 직선으로 구성되어 있어 질서 정연한 느낌을 주는 점이 특징이다. 전통가옥들과 어우러져 자연스러운 동선을 만들어 내는 돌담길은 전형적인 반촌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채로우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잘 연출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세대를 이어가며 만들고 덧붙인 우리 민족의 미적 감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유산이다."(문화재청) 고샅 백불고택으로 이어지는 고샅입니다. 일반적으로 대문은 고샅에서 한 번 꺽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직선으로 대문이 있습니다. 2005년 답사기에 그런 의문이 실려 있습니다. http://cafe.daum.net/moonhawje/DjZP/309 백불고택 반가의 대문인 솟을문이 아니라 행랑채 중앙 평대문을 내었습니다. 행랑채 안쪽 방향 대구 백불암고택 국가민속문화재 261호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건물로 전하지만 자료마다 각각 조성시기를 달리하여 혼선을 가져 옵니다. 여기서는 문화재청 자료를 발췌하였으며 문화재지정명칭은 대구백불암 고택입니다. "대구 지방에 있는 조선시대 주택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살림채와 재실·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숙종 20년(1694)에 지은 안채와 광무 9년(1905)에 다시 지은 사랑채가 살림채를 구성한다. 사랑채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동천서원을 없앨 때 철거한 자재의 일부를 사용하여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살림채의 오른편에 있는 보본당은 영조 18년(1742)에 지은 사당으로, 제사 지내는 재실로 사용하고 있다. 그 뒤편에 있는 2동의 사당은 최동집과 조선 정조 때의 학자인 최흥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고택은 행랑채, 사랑채,안채, 가묘,별묘, 보본당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사랑채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는 일자로 배치되었으며,큰사랑채 지붕은 높고, 툇마루를 내고 두리기둥으로 마감하여, 쪽마루 위에 가섭지붕으로 마감한 작은 사랑채보다 격을 높였습니다. 큰사랑채 대청 옆으로 건물이 연결된 듯한 느낌도 들지만 그럴 경우 사당을 가로막을 것 같아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송은석 해설사 설명으로는 앞쪽 두리기둥은 天, 중앙 팔각기둥은 人, 뒤편 방형기둥은 地를 상징한다고 전합니다. 백불百弗 백부지 백불능(百弗知 百弗能)은 하나도 알지 못하고, 하나도 하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우민한 저는 어렵습니다. 현판은 8대 종손 백헌 최병찬(白軒 崔秉瓚.1922-1996)선생의 글씨라고 합니다. 선조의 아호에 낙관을 하지 않는 것도 피휘避諱의 방편 이겠지요 수구당(數咎堂) 최종응(崔鐘應.1873~1943)의 글씨 백불암 선생의 첫아호(數咎庵))에서 유래(?), 강학공간의 당호이며, 백불고택 대청위에 걸려 있습니다. 여러 자료에는 노당정사 현판이 걸린 건물을 수구당으로 기록하고 있어 혼선을 야기시킵니다. 수구당은 허물(咎)을 세는(數) 집(堂)이라는 뜻으로 자기자신을 낮춘다는 의미입니다. 즉, 백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당호 입니다. 백불고택 기단 단층 기단, 덤벙주초와 치석한 원형주초를 사용하였고 두리기둥을 올렸습니다. 치석된 주초는 동천서원의 부재로 추측됩니다. 기둥 퇴주는 원형, 안쪽은 팔각 입니다. 사랑채 창살은 띠살문이며 종측면 4칸 대청은 개방할 수 있도록 들어열개식 판문으로 가구 하였습니다. 마루측면 시렁(?)이 이채롭습니다. 대청 위는 연등천장이며 도리와 들보사이에는 대공이 보입니다. 측면 맞배지붕으로 개방 가능한 문을 걸었습니다. 안채 ㄷ자 형으로 사랑채와 튼 口자(字)를 이룹니다. 2개 중문으로 출입 가능합니다. 중문 중문 중앙 대청을 중심으로 양협실을 두었으며 좌우로 건물을 내었습니다. 양쪽 끝, 중문 쪽에는 좌우에 창고와 부엌이 자리합니다. 건물의 구성보다 편액과 글씨가 눈에 먼저 들어 옵니다. 글에서 진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었을텐데 폰카메라 오작동으로 모두 찍지 못하여 못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부엌 이초이급 而樵而汲 나무를 해오고 물을 길어 OOOO 촬영하지 못 한 반대편 정지문의 글이 궁금합니다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하자' 라는 글??? 백구제시 百具在是 모든 도구는 제자리에 이제이정 以齊以整 가지런하게 정리해라 부엌문인 줄 알았는데 문구로 보아 창고 같습니다. 세덕장상 世德長祥 덕으로 처세하면 오래동안 상서럽다 안방문의 상인방에 걸린 것 같습니다. 덕필유린 德必有隣 덕불고필유린 德不孤必有隣의 줄인 문구로 덕이 있으면 외롭지 않고 늘 이웃이 있다. 안채 마루 기둥에 걸려 있습니다. 40년 저편 여동생이 졸업 선물로 담임선생님에게서 받은 글 입니다. 오랫동안 우리집 거실에 걸려 있었지만 부끄럽게도 아직 덕을 베풀지 못하고 살아 갑니다. 숭조애손 崇祖愛孫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1862~1935)의 글씨 조상을 공경하고 후손을 사랑으로 베풀어라는 의미입니다. 예도전가 禮道傳家. 임진년 여름 이당 怡堂 예와 도를 후가 전해 내려오는 집 이당怡堂 서예가 조면호(1803~1887), 화가 이경승(1862~1927) 임진년은 1832년,1892년 이며, 조면호 작품(1832년)으로 추정됩니다. 경애화락 敬愛和樂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며 형제간에 화목하고 부부간에 즐거워라 보본당 報本堂 조상님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1742년(영조 18년)에 세운 재실이라고 합니다. 별묘 앞에 위치하며 입향조 대암 최흥원 선생의 불천위 제사를 올리는 재실 입니다. 일반적인 재실에 비해 규모가 크고 당堂이라는 전각에 비추어 평소에는 강학공간 기능도 겸했을 것으로 같습니다.
별묘 別廟 최흥원 선생의 불천위(不遷位)를 모신 사당 가묘 家廟 4대봉제사를 모시는 4대조 까지 신위와 백불당 최흥원선생의 불천위(不遷位)를 모시는 사당 수구당 數咎堂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최동집의 12세손이 되는 최명덕이 아들의 분가를 위해 건립한 살림집"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수구당 數咎堂 현판은 백불고택 대청에 걸려 있음) 노당정사 老堂精舍 노당老堂은 최영교의 아호입니다. 노당정사는 사랑채와 안채가 전 후 일(一)字 형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거북 빗장 둔테 동계정 東溪亭 백불암의 아들로 대산 이상정 (大山 李相靖.1711~1781))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계 최주진(東溪 崔周鎭.1724~1763)선생의 학문을 기려 옻골 동쪽 개울가 동산서원 터에 세운 정자이며, 자손들의 강학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전합니다. 출입문 동계정 東溪亭 미수 허목(許穆 許穆. 1595~1682))선생의 글씨. 백불암 선생이 한강 정구(寒岡 鄭逑.1543~1620) 선생의 문하이며,미수 선생 역시 한강을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참고로 한강을 제향하는 성주 회연서원에도 미수 선생의 전서체가 두 점 걸려 있어 옮겨 왔습니다. 성주 회연서원 망운암 望雲巖 성주 회연서원 옥설헌 玉雪軒 동계정 계곡 대구건축문화테마기행 15년 만에 다시 찾았지만, 단체 답사의 한계로 주마간산식 기행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송은석 해설사의 심도 깊은 해설로 유교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였으며, 백부지 백불행(百不知百不能)의 의미를 깨닫고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겠습니다. 2020.0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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