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대구시

대구...신숭겸 장군 유적지

임병기(선과) 2020. 2. 1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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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지묘동에 위치한 신숭겸장군 순절지

"927년(태조 10) 태조와 신라를 도와 후백제를 공격하고자 이곳 대구 공산() 싸움에서 후백제군에 대패하였습니다. 이때 신숭겸은 왕으로 변장하여 김락()장군 등과 싸우다가 왕건을 대신하여 전사하였습니다.


훗날 태조는 신숭겸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시신은 광해주(, 지금의 춘천)에 묻고 대구 공산에 순절단()과 지묘사(, )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였습니다.


지묘사는 고려의 멸망과 함께 폐사되었으나 1607년(선조 40)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이 이 자리에 표충사·표충단·충렬비를 건립하여 공의 혼을 위로하고 충절을 추모하였습니다. 그 후 조정에서 1672년(현종 13) 표충사에 사액을 내려 관리하도록 하였으나 1871년(고종 8) 서원훼철령에 의해 표충사가 훼철된 뒤로 후손들이 재사()를 관리하였으며. 이후 1993년 복눤 하였습니다."(네이브 발췌 및 보충)


뒤쪽 산이 공산전투에서 왕건이 탈출한 왕산王山 입니다.


곡성 덕양서원(2002년)

http://cafe.daum.net/moonhawje/DjZP/70


춘천 신숭겸 묘역(2019년 6월)

http://cafe.daum.net/moonhawje/DjZP/4646


왕건과 대구지명유래

http://cafe.daum.net/moonhawje/DjZP/150



홍살문



표충단(表忠檀)



표충단과 비각

사당이 없을때 신숭겸장군의 가묘로 제사를 지낸 단소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지묘사에서  향사를 모셨으며, 1607년 후손 신흠과 외손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이 단소를 마련했습니다.



고려장절공신공순절지지高麗壯節申公殉節之地碑

1819년(순조19년)   신숭겸의 28대손 의직이 세웠으며,1856년(철종7)년에 순절비 보호각을 설치 하였습니다.

1872년(고종9)과 1928년 두번에 걸쳐  비각을 중수 하였다고 합니다.



경의문(景義門)

표충서원 (表忠書院) 외삼문



표충재(表忠齎)

강학공간 입니다.



표충재(表忠齎)

충익공 신정희의 글이라는 자료가 보입니다.

(동일신물로 추측되는 신정희(申正熙.1833~1895).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중원(中元), 호는 향농(香農). 판중추부사 신헌(申櫶)의 아들이다. 정약용(丁若鏞)의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은 초기적 개화론자에 속한다.조선후기 어영대장, 한성부윤, 독판내무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동재



서재



표충사 表忠祠



판관 신후청덕선진비 判官申候淸德善賑碑

병자 팔월 일 립  丙子 八月 日 立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이른바 피휘(避諱)법 때문일까요?

선진善賑이라는 명문으로 미루어 대흉년이 들었던 1876년 병자년 같습니다.


충렬비각 앞에 위치



도이장가(悼二將歌)...고려 예종(1105-1122)


主乙 完乎白乎
心聞 際天乙 及昆
魂是 去賜矣中
三烏賜敎 職麻 又欲
望彌 阿里刺
及彼可 二 功臣良
久乃 直隱
跡烏隱 現乎賜丁


님의 목숨을 온전하게 하신
마음은 하늘 가에 미치고
넋은 가셨지만
내려주신 벼슬은 또 대단하구나
바라보면 알리라
그 때의 두 공신이여
오래 되었으나
(거룩한) 자취는 나타나시도다

(출처.평산신씨 성보. 사개국장절공행장)

도이장가(悼二將歌), 1120년(예종 15년)에 고려 예종이 지은 향찰식 표기의 가요.

신숭겸(申崇謙)의 행적을 기록한 문헌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 그 제작 동기에 관한 소상한 기록과 함께 작품이 전한다. 창작 경위에 관해서는 그 밖에도 <고려사> 권 14, <명신행적(名臣行蹟)>,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등에 간략하게나마 보인다.

예종이 서경의 팔관회(八關會)에 참관했을 때 허수아비 둘이 관복을 갖추어 입고 말에 앉아 뜰을 뛰어다녔다. 이상히 여겨 물으니, 좌우에서 다음과 같이 그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 둘은 신숭겸과 김락으로, 태조 왕건이 견훤과 싸우다가 궁지에 몰렸을 때 왕건을 대신해서 죽은 공신이다. 그래서 그 공을 높이고자 태조 때부터 팔관회에서 추모하는 행사를 벌였다. 태조는 그 자리에 두 공신이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풀로 드 공신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랬더니 두 공신은 술을 받아 마시기도 하고 생시와 같이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듣고 예종이 감격해서 한시와 함께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다음에서 발췌)


2020.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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