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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도동서원 한훤당 김굉필 신도비 쌍귀부. 묘소

임병기(선과) 2020. 2. 21.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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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후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 답사꾼들의 메카 입니다.


오늘은

한훤당 선생 신도비의 쌍귀부와 묘소를 둘러 보겠습니다.



신도비각

도동서원 향좌측에 위치합니다.



한훤당 김굉필 선생 신도비(金宏弼神道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찬

 

김굉필(1454∼1504년)는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서홍(瑞興)이며,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喧堂)이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고,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중종반정 뒤 성리학의 기반구축과 인재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되었다. 1517년(중종 12년)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1577년(선조 10년)에는 시호가 내려졌고, 1610년(광해군 2년)에는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 비석은 사우당 김대진이 후손과 사림 및 경남감사 이민구의 협력으로 세운 비석이다. 그 글은 여헌 정현광이 지었고, 사헌부 감찰인 배홍우가 썼다. 이 비는 현재 도동서원(道東書院) 좌측편에 있다. 『여헌선생문집』 제12권 비명(碑銘) 묘갈(墓碣) 묘지(墓誌)에 들어 있다.



비문의 찬자인 장현광(1554∼1637년)은 자가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전후 20여 차례에 걸쳐 대사헌 공조판서 우참찬 등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연구에만 전념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각 주·군에 격문을 보내어 군왕의 군사를 일으켰으나, 다음해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동해안의 입암산에 들어간 지 반 년 후에 타계하였다.

 

 

한훤당(寒暄堂) 김 선생(金先生)의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명(明) 나라가 문명(文明)의 운(運)을 열자, 우리 조선의 여러 성왕(聖王)들이 운을 따라 계속하여 나와서 덕을 쌓고 교화를 높였다. 이에 진유(眞儒)가 동방에서 나와 도학(道學)이 전해지니, 바로 선생이 그러한 분이다.

선생은 휘(諱)가 굉필(宏弼)이고 자(字)가 대유(大猷)이며 호(號)가 한훤당(寒暄堂)이다.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과 《경현록(景賢錄)》에 기재된 것을 삼가 살펴보면 김씨는 황해도(黃海道) 서흥부(瑞興府)가 본적(本籍)이니, 고려조(高麗朝)에 금오위 정용 중랑장(金吾衛精勇中郞將)을 지낸 휘 보(寶)가 9세조이다.


낭장의 손자인 휘 천록(天祿)은 벼슬이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에 이르고 서흥군(瑞興君)에 봉해졌는바, 공은 무략(武略)이 뛰어나 일본(日本) 정벌에 종군(從軍)하였다가 공을 세우니, 원(元) 나라 황제는 충현교위 관군총파(忠顯校尉管軍摠把)를 제수하였다. 그 후 3세조 휘 선보(善保)는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이니, 바로 선생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는 휘가 중곤(中坤)인데 본조(本朝 조선조를 가리킴) 초기에 급제하여 네 조정을 차례로 섬겨 명성이 있었고 관직이 통정대부(通政大夫)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이르렀으며, 현풍 곽씨(玄風郭氏)에게 장가드니, 이로부터 현풍이 거주하는 고을이 되었다. 조고(祖考)는 휘가 소형(小亨)인데 봉훈랑(奉訓郞) 의영고 사(義盈庫使)이며, 선고(先考)는 휘가 유(紐)인데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이 되었고, 선비(先妣)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인데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진 휘 승순(承舜)의 따님이다.


선생은 경태(景泰) 갑술년(1454,단종2) 5월 을해(乙亥)에 한양(漢陽)의 정릉동(貞陵洞) 집에서 탄생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호걸스럽고 뛰어나 얽매이지 않았고 차츰 자라자 분발하여 글을 배웠다. 《창려집(昌黎集)》을 즐겨 읽었는데, 장중승전 후서(張中丞傳後敍)에 “장순(張巡)이 남제운(南霽雲)을 부르며 이르기를, ‘남팔(南八)은 남아(男兒)이니 죽을 뿐이다. 불의(不義)에 굽혀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반복하여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을 찾아가 배울 것을 청하자, 점필재 선생은 《소학(小學)》을 주며 말씀하기를, “만일 학문에 뜻을 둔다면 마땅히 이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의 기상(氣像)이 모두 이 가운데에 있다.” 하니, 선생은 마침내 가슴에 새겨두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선생이 시(詩)를 지었는데 ‘《소학》 가운데에 어제의 잘못을 깨닫는다[小學書中悟昨非]’라는 글귀가 있으니, 점필재는 평론하기를, “이 말은 바로 성인(聖人)이 되는 근기(根基)이다. 노재(魯齋)의 뒤에 어찌 그러한 사람이 없겠는가.” 하였다. 사람들이 세상일을 묻는 자가 있으면 선생은 반드시 말씀하기를, “소학동자(小學童子)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는가.” 하였으며, 몸을 다스림에 한결같이 이 책을 승묵(繩墨 규칙)으로 삼고 뜻을 세움에 반드시 옛 성인으로 표준을 삼았다.


나이 30이 된 뒤에 비로소 다른 책을 읽어 육경(六經)을 탐구하였는데, 정(精)하게 통달함을 힘썼다. 한 방에 고요히 거처하여 밤이 깊도록 잠을 자지 않으니, 비록 집안 식구와 자제들이라도 그 하는 바를 엿보지 못하고 오직 연자(蓮子)의 갓끈이 책상에 닿아서 작게 소리가 들렸으므로 아직도 책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체험하고 확충하여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았으며, 아래로 인간(人間)의 일을 배우고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여 도가 이루어지고 덕이 확립되니, 이는 선생이 학문을 함에 있어 문로(門路)가 바르고 진수(進修)함이 치밀한 것이었다.


성화(成化) 경자년(1480,성종11)은 바로 성종조(成宗朝)였다. 선생이 상상(上庠 성균관)에 들어가니, 이때 간사한 중[僧]이 몰래 불상(佛像)을 돌려 놓아 사람들을 현혹하였다. 이에 선생은 수천 자(字)의 상소(上疏)를 올렸는바, 반복해서 자세히 논하여 명백하고 간절하니, 이단(異端)을 배척한 바름과 군주를 바로잡는 정성이 그러하였다.


정미년(1487,성종18)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홍치(弘治) 갑인년(1494,성종25)에 이르러 훌륭한 행실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었으며, 다음 해인 을묘년(1495,연산군1)은 연산군(燕山君) 때인데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으로 옮겼다. 병진년(1496,연산군2)에 특별히 6품직으로 서용(敍用)되어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에 제수되었다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옮겼으며, 정사년(1497,연산군3)에 형조 좌랑(刑曹佐郞)으로 전직하였다.


무오년(1498,연산군4) 사옥(史獄)이 일어나니, 선생은 점필재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하여 희천(熙川)으로 유배(流配)되었다가 경신년(1500,연산군6)에 순천(順天)으로 옮겨지고 갑자년(1504,연산군10) 겨울 사약(死藥)이 내려지니, 이때 나이가 51세였다. 현풍(玄風)의 오설리(烏舌里) 송림(松林) 보로동(甫老洞)으로 돌아가 장례하니, 바로 선영(先塋)의 곁이었다. 집이 적몰(籍沒)되고 여러 아들들이 나누어 유배되었다.


정덕(正德) 병인년(1506,중종1)에 중종(中宗)이 반정(反正)하고 선생의 죄를 씻을 것을 명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상서원정(都承旨兼經筵參贊官尙瑞院正)을 추증하였다.


정축년(1517,중종12)에 공론에 따라 의논을 올리기를, “준례에 따른 추증으로는 표창하여 특별히 대우함에 부족하오니, 청컨대 높은 품계(品階)를 더 추증하고 해마다 그 아내에게 녹봉을 내리며 자손들을 기록하여 등용하소서.” 하였다. 마침내 윤허(允許)를 받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에 추증되고 다시 매년 중춘(仲春)과 중추(仲秋)에 관청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으며, 만력(萬曆) 을해년(1575,선조8)에 선조(宣祖)는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광해군(光海君) 경술년(1610,광해군2)에 온 나라의 유생(儒生)들이 일제히 글을 올려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는데, 마침내 소청한 대로 윤허를 받아 선생이 첫번째 자리에 올랐으며 선생의 가르침이 남아 있는 지방과 국가의 유현(儒賢)을 높이고 숭상하는 지역에 각각 사당을 세우고 서원(書院)을 설치하였는바, 본현(本縣 현풍현을 가리킴)에는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고 사액(賜額)하여 지금 선영의 아래에 있으니, 이는 선생의 시말(始末)이다.


아! 그 아름다운 말씀과 훌륭한 행실을 어찌 다 들 수 있겠는가마는 불행히 나쁜 때를 만나 화(禍)가 망극하였으니, 그 전하는 것이 얼마 되지 않음은 당연하다. 이제 그 전하는 것을 대략 든다면 평소 닭이 울면 일어나서 어버이가 계신 곳에 문안하기를 의식대로 하고 저녁에 잠자리를 정하는 것도 이와 같이 하여 무릇 어버이를 섬김에 그 도리를 다하였다. 상(喪)을 당해서는 슬퍼하고 훼손하여 시종 예(禮)를 따랐으며 상복(喪服)을 벗은 뒤에는 반드시 새벽에 사당에 참배하고 그 다음에는 모부인(母夫人)에게 나아가 뵈었다.

모부인은 성품이 매우 엄하였는데 혹 뜻에 만족하지 못한 일이 있어 정색(正色)하고 말씀을 하지 않으면 선생은 감히 물러가지 못하고 반드시 공경과 효도를 더하여 모름지기 기뻐함을 얻고야 비로소 물러갔으니, 이는 효행이 백 가지 행실의 근원임을 볼 수 있다.


선생은 여러 아들들을 훈계하여 말씀하기를, “너희들은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 감히 게을리 하지 말며, 사람들이 혹 자신을 비판하거든 절대로 따지지 말라.”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남의 악을 말하면 마치 피를 입에 머금고 남에게 뿜는 것과 같아서 먼저 자기 입을 더럽히니, 마땅히 경계하라.” 하였다. 또한 여러 딸들을 가르치되 시부모에게 순종하고 제사를 정성껏 받들며 동서들을 존경하고 부인의 직책을 부지런히 하며 노비들을 구휼하고 말을 많이 하지 말며 재리(財利)를 삼가는 등의 조목으로 권하고 경계하였다.


선생은 또 말씀하기를, “우리 나라 사대부들은 가훈(家訓)을 세운 이가 적기 때문에 교화가 처자식에게 미치지 못하고 가르침과 은택이 노비들에게 내리지 못한다.” 하여 《내칙(內則)》을 따라 의절(儀節)을 만들었으며, 마침내 내외의 노비에 이르러서도 모두 남녀(男女)를 구분하고 장유(長幼)를 차례하였으며, 맡은 일을 게을리 하는가 부지런히 하는가를 살펴보아 올리고 내리며 권면하고 징계하는 규정을 분명히 하였다. 길흉사(吉凶事)에 비용이 있게 되면 풍족하게 하고 검약하게 하는 것을 적절히 가감하여 조절하였으며, 매양 초하루와 보름에는 가법(家法)을 읽어 정돈하였으니, 이는 그 집안에서 행한 법도였다.


증조비(曾祖妣) 곽씨(郭氏)의 선대 분묘가 현풍(玄風)에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 되어 무너졌으며 나무꾼과 목동(牧童)들을 금하지 않았다. 선생은 곽씨 문중의 여러 종족(宗族)들에게 이르기를, “이는 자손이 된 자가 차마 볼 수 없으니 철저히 금하고 보호하라.” 하였고, 또 “명절에 철에 따른 음식을 올려 경건히 고유하고 인하여 서로 화목을 다지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곽씨 문중들은 모두 기꺼이 따라 떳떳한 법식으로 삼았으니, 이는 효도와 화목을 미루어 넓힌 것이었다.


관청에서 사무에 수응하고 세속에 대처함에 있어서는 일반인과 심히 다르게 하려고 하지 않고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였다. 형조(刑曹)의 낭관(郞官)이 되어서는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어 오르고 내리는 즈음에 둥글게 돌고 네모지게 꺾어 돌아 반드시 법도에 맞아서 일찍이 조금도 어기지 않았으며, 옥사(獄事)와 송사를 분명히 처리하되 너그럽게 용서하여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복종하였다. 또 비록 관청의 사무가 급박하더라도 강학(講學)과 전수함을 폐하지 않았으니, 이는 바로 영달하여도 도를 떠나지 않은 것이다.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과 뜻이 같고 도가 합하여 서로 만날 때마다 도의를 연마하고 고금의 일을 상의하여 혹 밤을 새우기도 하였으며, 희천(熙川)에 있을 때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를 얻어 마침내 원대한 데로 나아가는 기축(機軸)을 전수하였다. 무릇 거주하고 머무는 곳에는 원근의 선비들이 선생의 풍도(風度)를 듣고 사모하여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리하여 학도들이 이웃 마을에까지 가득하고 사람들의 집에 꽉 차서 경서(經書)를 잡고 당(堂)에 오르는 자들이 다 앉을 수도 없었는데, 선생은 가르치고 인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강론하기를 간곡히 하였다. 비록 비방이 일어난다 하여 중지할 것을 청하는 자가 있었으나 마침내 이치로 타일러 꺾이지 않고 재주에 따라 성취시켰으며 뒤에 유명한 사람이 많았으니, 이는 스승의 도로 자임(自任)하여 영재를 교육함을 낙(樂)으로 삼은 것이다.


점필재(佔畢齋)가 이부(吏部 이조(吏曹))에 있으면서 임금께 건의하여 밝히는 일이 없자 선생은 시(詩)를 올려 풍자하였으니, 이는 스승을 섬김에 숨김이 없는 것이다.


일두(一蠹)가 고을의 원이 되어 금잔(金盞) 하나를 장만하자, 선생은 “공(公)이 이처럼 무익(無益)한 것을 만들 줄 몰랐으니 뒤에 반드시 사람을 그르칠 것이다.” 하였으며, 일찍이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상을 치를 적에 평소에 빠진 이빨과 머리털을 찾았으나 집안 사람들이 없다고 말하니, 선생은 말씀하기를, “오랫동안 태허(太虛 조위의 자(字)임)와 종유(從遊)하였는데 그 엉성함이 이와 같을 줄을 몰랐다.” 하였으니, 이는 붕우간에 사귀는 도를 반드시 성실히 한 것이다.


유배지에 있을 적에 비록 화(禍)의 기미를 측량할 수 없었으나 선생은 태연히 대처하여 떳떳한 행동을 고치지 않았으며, 화가 이르던 날에 목욕한 다음 관(冠)을 쓰고 띠를 매고 나왔으며, 신이 벗겨지자 다시 신고 정신과 안색을 바꾸지 않으며 천천히 수염을 쓰다듬고 입을 다물며 말씀하기를, “신체와 머리털과 피부는 부모에게 받았으니 이것까지 상함을 받아서는 안 된다.” 하고 마침내 조용히 죽음에 나아갔으니, 이는 흉함에 임하여 어지럽지 않은 것이다. 이 한두 가지 일을 든다면 나머지는 미루어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강유(剛柔)의 자질을 겸하고 건순(健順)의 덕(德)을 겸비하여 몸 갖기를 경(敬)으로써 하고 마음 두기를 성(誠)으로써 하였다. 그리하여 도의를 강구(講究)함이 이미 정하고 함양(涵養)함이 또한 후(厚)하여 확고하면서도 막히지 않고 통하면서도 흐르지 않았으니, 이는 과연 우리 유학(儒學)의 의리(義理)의 학문이요 중정(中正)한 도(道)인바, 송(宋) 나라 염락(濂洛)의 여러 현자(賢者)가 수사(洙泗)를 거슬러 올라가 이은 것이었다.


우리 동방(東方)은 문헌이 있은 이래로 유학(儒學)으로 이름난 자가 어찌 적겠는가마는 숭상하는 바가 사조(詞藻 문장)이고 사모하는 바가 공명(功名)이었다. 간혹 이른바 우뚝하게 선 자가 있었으나 또한 한 절개와 한 행실의 선비가 됨에 불과하였으니, 그 누가 용맹하게 벗어나고 독실하게 실천하여 지엽을 가볍게 여기고 근본과 열매에 나아가며 구이(口耳)의 학문을 외면하고 심신(心身)으로 돌아왔는가.


고려 말기에 포은(圃隱) 정 선생(鄭先生)이 이 도를 알고 이 도를 행하여 해동(海東)의 첫번째 유자(儒者)가 되었으며, 우리 조선조에 이르러는 선생이 실로 그 관건(關鍵)을 창도하여 개발하였다. 비록 지위를 얻어 도를 행하지 못하였고 또 미처 저술하여 가르침을 남기지 못했으나 오히려 한 세상의 유림(儒林)의 종주(宗主)가 되고 사문(斯文)의 적치(赤幟)를 세웠다.


같은 때에 인(仁)을 도운 자로는 일두공(一蠹公)이 있었고 몸소 가르침을 받든 자로는 정암공(靜菴公)이 있었으며, 그 뒤에 발걸음을 이어 일어난 자로는 평실(平實)함이 이회재(李晦齋) 같은 분이 있었고 정순(精純)함이 이퇴계(李退溪) 같은 분이 있었으니, 이는 모두 우리 동방의 진유(眞儒)가 되고 백세(百世)의 사범(師範)이 되는바, 또한 선생의 정맥(正脈) 가운데에서 사숙(私淑)한 자들이다. 지금에 이르러 후학들이 도학이 올바른 학문이 됨을 알아 높이고 숭상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는 진실로 선생의 공이다.


부인은 순천 박씨(順天朴氏)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는바,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천상(天祥)의 4대손이고 사맹(司猛)인 예손(禮孫)의 따님인데 거주한 곳이 합천군(陜川郡) 야로현(冶爐縣)에 있었다. 선생이 처음 장가들어 돌아오지 않았을 때에 별도로 우거하는 집을 마련하고 당호(堂號)를 지었었는데 뒤에 마침내 현풍의 옛날 거주하던 곳으로 돌아오니, 바로 현풍현의 서쪽대니산(戴尼山)의 남쪽에 있는 솔례촌(率禮村)이었다. 선생이 처음에는 사옹(簑翁)이라 호하였으니, 비록 비가 와서 밖은 젖으나 안은 젖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선생은 이윽고 말씀하기를, “이름을 지은 것이 너무 드러나니 세상에 처하는 도가 아니다.” 하고는 다시 고쳤다. 부인은 선생보다 36세 뒤에 별세하였다.


아들은 4명이니, 장자인 언숙(彦塾)은 전력부위(展力副尉)이고 차자인 언상(彦庠)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며, 다음은 언서(彦序)와 언학(彦學)이다. 여서(女壻)는 5명이니, 맏이는 남부 참봉(南部參奉) 하백(河珀)이고 다음은 훈련원 정(訓鍊院正) 이장배(李長培), 사헌부 감찰 정응상(鄭應祥), 사인(士人) 강문숙(姜文叔), 충의위(忠義衛) 정성린(鄭成璘)이다. 손자는 4명인데 동부참봉(東部參奉)인 대(岱), 부정(副正)인 입(立), 익(翊), 욱(昱)이다.


증손은 8명인데 수침(壽忱), 수열(壽悅), 수항(壽恒), 생원(生員)인 수개(壽愷), 찰방(察訪)인 수회(壽恢), 수념(壽恬), 수종(壽悰), 수이(壽怡)이다. 현손은 13명인데 창릉 참봉(昌陵參奉)인 응몽(應夢)과 응길(應吉), 사과(司果)인 응복(應福), 부사(府使)인 응성(應成), 응현(應賢), 응백(應白), 응철(應哲), 응신(應信), 응헌(應憲), 응선(應先), 정(定), 심(審), 사과인 탕(宕)이다. 제 5대손인 전 찰방(前察訪) 대진(大振)이 현재 종손(宗孫)이며 이제 내외손으로 6, 7대에 이른 자가 모두 남녀노소를 합하여 총 2백 40여 명에 이르니, 어찌 선(善)을 쌓은 남은 복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외증손에 한강(寒岡) 정공 구(鄭公逑)가 있으니, 실로 선생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여 아름다움을 계승하고 광채를 더한 것이 많다. 일찍이 선생을 위하여 《경현속록(景賢續錄)》을 모은 것이 매우 구비되었으나 불행히 화재로 불타서 전하지 못하니, 어찌 영원한 한(恨)이 되지 않겠는가.


이 재주(再周)의 갑자년에 이르니, 바로 천계(天啓) 4년(1624)이었다. 종손인 대진이 함께 후손이 된 자와 지방의 선비들과 상의하기를, “묘도(墓道)에 아직까지 드러낸 신도비(神道碑)가 없으니 비단 후손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문(斯文)이 함께 그 책임을 맡아야 한다.” 하여 방백(方伯 감사(監司)를 가리킴)에게 아뢰니, 방백인 이공 민구(李公敏求)가 즉시 위하여 조처해서 그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다음 해인 을축년(1625,인조3)에 돌이 갖추어지자, 제공(諸公)들이 나에게 글을 지을 것을 명하였다.


아! 스스로 덕행을 잘 표현하는 자가 아니면 어찌 그 만분의 일인들 방불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유선록(儒先錄)》과 《경현록(景賢錄)》 두 책을 근거하여 서술하고 명(銘)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덮어줌은 오직 한 하늘이요 / 覆惟一天

실어줌은 오직 한 땅이 / 載惟一地

도가 이 사이에 있어 / 道在其間

없어지지 않고 변하지 않네 / 不亡不二

이미 고금에 차이가 없으니 / 旣無古今

어찌 중국과 오랑캐의 구분이 있겠는가 / 寧有夏夷

사람으로써 찾으면 / 求之以人

곧 스스로 알게 되네 / 便自覺知

도는 무슨 도인가 / 曰道何道

병이를 따르는 것이네 / 率其秉彛

선생은 이것을 아시고 / 先生是契

자임하여 의심하지 않았네 / 自任不疑

성현의 사업이 / 謂聖賢業

내 분수 안의 일이니 / 吾分內事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요 / 事無難事

나의 입지(立志)에 달려 있다 하였네 / 在我植志

먼 곳에 감은 가까움으로부터 시작하고 / 行遠自邇

높은 곳에 오름은 낮음으로부터 하니 / 登高自卑

회옹의 소학(小學)이 / 晦翁有書

성인이 되는 기본이네 / 作聖之基

광풍제월의 기상이 모두 이 책에 있다 하니 / 光風霽月

스승은 나를 속이지 않았네 / 師不我欺

가슴속에 새겨두고 몸소 실천하여 / 服膺身踐

어제의 잘못을 오늘에 깨달았네 / 今悟昨非

일상 생활에 벗어나지 않고 / 不出日用

하늘의 기틀을 묘하게 아니 / 妙會天機

뿌리가 깊음에 가지가 번창하고 / 根深枝暢

근원이 깊음에 샘물이 발달하네 / 源濬泉達

참험하여 꿰뚫고 / 參驗貫穿

연구하여 포괄하니 / 究極包括

학문의 차례와 계급 / 次第階級

규모와 절목이 / 規模節目

완성된 법이 있으므로 / 厥有成法

믿고 행하여 독실히 하였네 / 信行斯篤

잊지 않고 조장하지 않으며 / 勿忘勿助

과와 불급이 없었네 / 無過不及

참을 쌓고 힘쓰기를 오래 하여 / 眞積力久

이것을 이루고 이것을 세우니 / 是成是立

이루면 홀로 이루지 않고 / 成不獨成

서면 반드시 함께 섰네 / 立必俱立

미루어 붕우들과 강론하고 / 推爲麗澤

또한 후진의 교육을 즐거워하였네 / 亦樂敎育

이락을 거슬러 올라가 접하고 / 泝接伊洛

수사를 연원으로 하니 / 淵源洙泗

도가 과연 동방으로 와서 / 道果東矣

널리 베풀어졌네 / 庶普厥施

이미 용납 받지 못하여 / 旣不見容

도리어 화의 빌미가 되니 / 反爲禍祟

시운인가 천명인가 / 時耶命耶

도를 믿을 수 없었네 / 道不可恃

하늘이 정해지기를 기다리니 / 有待天定

이 이치를 속이기 어려워라 / 難誣此理

공로가 백세에 보존되고 / 功存百世

은택이 많은 선비들에게 남아 있으니 / 澤在多士

모두 올바른 학문을 우러러 / 咸仰正學

더욱 오랠수록 더욱 빛나네 / 愈久彌光

송림의 언덕은 / 松林之原

낙동강이 산을 감고 도네 / 洛流縈岡

유택이 이 곳에 있으니 / 幽宅在是

비석을 새겨 무궁한 후세에 남기네 / 鐫賁無疆

 

寒暄堂金先生神道碑銘 幷序

 

皇明啓文明之運。我朝鮮列聖。應運繼作。積德隆化。於是乎眞儒出於東方。道學爰有傳焉。卽先生是也。先生諱宏弼。字大猷。號寒暄堂。謹按國朝儒先錄及景賢錄所載。則金氏籍黃海道瑞興府。高麗朝金吾衛精勇中郞將諱寶。其九世祖也。郞將之孫諱天祿。官至匡靖大夫都僉議侍郞贊成事瑞興君。公有武略。從征日本有功。元帝宣授忠顯校尉管軍摠把。後三世諱善保。奉順大夫判書雲觀事。是先生高祖也。曾祖諱中坤。本朝初登第。歷事四朝。有聲稱。官至通政大夫禮曹參議。娶玄風郭氏。自是玄風仍爲鄕居矣。祖諱小亨。奉訓郞義盈庫使。考諱紐。登武科。禦侮將軍忠佐衛司勇。妣淸州韓氏。嘉善大夫中樞院副使贈兵曹判書淸城君諱承舜之女。先生景泰甲戌五月乙亥。生于漢陽貞陵洞之第。少豪逸不羈。稍長。發憤業文。喜讀昌黎集。每至張中丞傳後敍。廵呼雲曰。南八。男兒死耳。不可爲不義屈。未嘗不三復流涕焉。就佔畢齋金先生請學。佔畢先生授以小學曰。苟志於學。當從此始。光風霽月。都在此中。先生遂服膺焉。手不釋卷。作詩。有曰小學書中悟昨非。佔畢齋批曰。此言乃作聖根基。魯齋後豈無其人乎。人有問及時事者。必曰小學童子。何知大義。其律己一以是書爲繩墨。立志必以古聖爲準的。年三十後。始讀他書。探賾六經。務要精通。靜處一室。深夜不寐。雖家人子弟。莫窺其所爲。惟聞蓮子纓抵書案。輕輕有聲。因知其尙觀書也。體驗充廣。自强不息。下學上達。道成德立。此先生爲學門路之直。進修之密也。成化庚子。卽成廟朝。先生入上庠。時姦僧潛回佛像惑衆。先生疏陳數千言。反覆詳論。明白剴切。其闢異之正。格君之誠然也。丁未。丁外艱。廬墓三年。至弘治甲寅。以行義薦授南部參奉。乙卯。爲燕山時。移典牲署參奉。丙辰。特敍六品。拜軍資監主簿。遷司憲府監察。丁巳。轉刑曹佐郞。戊午。史獄起。以先生遊佔畢齋門。決配熙川。庚申。移配順天。甲子冬。終命加焉。年五十一。歸葬于玄風烏舌里松林甫老洞。卽先塋傍也。家被籍沒。諸子分配矣。正德丙寅。中廟靖國。命雪先生罪。贈通政大夫都承旨兼經筵參贊官尙瑞院正。丁丑。以公論獻議例贈未足表異。請加贈崇品。歲廩其妻。錄用子孫。夢允。復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又命每歲春秋仲月。官爲致祭。萬曆乙亥。宣廟賜諡文敬公。光海庚戌。擧國儒生咸上章。請以五賢從祀于文廟。遂得如請。而先生居首。又先生遺敎之鄕及宗尙國儒之地。各自立祠設院。本縣則額以道東。今在壠下。此先生始終也。嗚呼。其嘉言懿行。何可數也。而不幸遭時不淑。禍出罔極。其得傳者。宜無幾矣。今就其所傳而略擧焉。則平居雞鳴而起。省問親所如儀。昏定亦如之。凡所以事之者盡其道。丁憂哀毁。終始以禮。卽吉。必晨謁祠堂。次詣母夫人。母夫人性嚴。或有不愜意。正色不言。則惶恐不敢退。必起敬起孝。須得悅豫始退。此可以見其百行之原也。訓諸子曰。爾等心存敬畏。無敢懈惰。人或議己。切勿相較。又曰。言人之惡。如含血噴人。先汙其口。宜戒之。敎諸女。以順舅姑。謹祭祀。敬娣姒。勤婦職。恤奴婢。毋多言愼財利等目爲勸戒。又以爲我國士大夫鮮立家訓。故化導不及於妻孥。敎澤不下於臧獲。仍倣內則。制爲儀節。至於內外僕類。亦皆分男女。序長幼。視職勤惰。明升降勸懲之規。吉凶。有費節豐約紓縮之差。每以朔朢。讀法整頓。此其家範也。曾祖妣郭氏先世墳塋在玄風者。久遠圮壞。樵牧不禁。先生謂郭門諸族曰。此爲子孫者所不忍覩。切宜禁護。又以令節用時羞告虔。因相與講睦。不亦可乎。於是。莫不樂從以爲恒式。此孝睦之推也。若其應官處俗。不求甚異於人。一以至誠。其爲刑郞。擧止有法。升降之際。周旋折旋。必中規矩。未嘗少違。獄訟明恕。人皆稱服。又雖仕務迫遽。不廢講授。此乃達不離道也。與鄭一蠹汝昌。志同道合。每相見硏磨道義。商確古今。或至達曙。其在熙川。得趙靜庵光祖。遂傳其長進遠大之機軸。凡其住止之地。遠近士子之聞風慕從者。坌集隣閭。塡溢人家。執經升堂。坐不能容。先生誨誘不倦。講論諄諄。雖有以謗興請止。乃引喩以理。不抑不沮。隨才成就。後多名人。此師道自任。敎育爲樂也。佔畢公居吏部。事無建明。則先生上詩諷之。此事師無隱也。一蠹宰縣。置一金盞。先生曰。不意公作此無益。後必誤人。嘗治曹梅溪偉之喪。索平日齒髮。其家人告無。則曰久從太虛。不意其疎如此。此交道必信也。方在謫所。雖禍機叵測。先生處之夷然。不改常操。禍及之日。沐浴冠帶而出。屨脫還著。神色不變。徐以鬚含口曰。身體髮膚。受之父母。不可幷此受傷。乃從容而就焉。此臨凶不亂也。擧此一二事。餘可以推想矣。蓋先生剛柔兼質。健順備德。持己以敬。存心以誠。講究已精。涵養旣厚。確而不滯。通而不流。此果吾儒義理之學。中正之道。而濂洛諸賢之所以泝紹洙泗者也。我東方自有文獻以來。以儒名者。亦豈少哉。而所尙詞藻。所慕功名。間有所謂特立者。亦不過爲一節一行之士耳。孰有能撥脫勇健。篤實踐履。輕枝葉而就本實。外口耳而反心身者乎。麗氏之末。惟有鄭先生圃隱。知行此道。爲海東首儒。而至我朝。先生實唱發其關鍵焉。雖其旣不果得位行道。又未及著書垂敎。而猶能宗一世儒林。立斯文赤幟。同時輔仁。則有一蠹公。躳承旨訣。則有靜庵公。厥後接武而起者。平實有如李晦齋。精純有如李退溪。皆作我東之眞儒。爲百世之師範。亦先生正脈中私淑者也。至今後學。得知夫道學之爲正學。而莫不宗尙之。此固先生爲功也。夫人順天朴氏。贈貞敬平陽府院君天祥之四世孫司猛禮孫之女。居在陜川郡冶爐縣。先生初受室未歸時。別設所寓之堂而號之。後乃歸玄風舊居。卽縣西戴尼山之陽率禮村。先生始號爲簑翁。謂雖雨外濕而內不濡。旣而曰爲名以露。非渾然處世之道。卽改之。夫人後先生三十六歲而卒。子男四人。長彦塾。展力副尉。次彦庠。司憲府監察。次彦序。次彦學。女壻五人。長南部參奉河珀。次訓鍊院正李長培。次司憲府監察鄭應祥。次士人姜文叔。次忠義衛鄭成璘。孫男四人。曰岱。東部參奉。曰立。副正。曰翊。曰昱。曾孫男八人。壽忱,壽悅,壽恒,壽愷生員,壽恢察訪,壽恬,壽悰,壽怡。玄孫男十三人。應夢昌陵參奉。應吉,應福司果。應成府使。應賢,應白,應哲,應信,應憲,應先。曰定,曰審,曰宕司果。第五代孫前察訪大振。方爲宗嗣。今內外裔。至有爲六七代者。凡男女老幼幷二百四十餘人。豈非積餘之蔓祉哉。先生之外曾孫。有曰寒岡鄭公逑。實有以繼述先生之志業。趾美增光者多矣。嘗爲先生集景賢續錄甚備。而不幸灾於火莫傳。豈不爲永恨哉。至是再周之甲子。卽天啓四年。宗子大振。與其同爲後者及鄕之士類相議曰。墓道迨無顯刻。不獨爲後裔之羞。亦斯文共當其責。以告于方伯。則方伯李公敏求。卽爲之施措。盡其誠。明年乙丑。石旣具。諸公命顯光以其文。嗚呼。白非善言德行者。安能說出可彷彿其萬一哉。只據兩冊。敍以銘焉。銘曰。

覆惟一天。載惟一地。道在其間。不亡不二。旣無古今。寧有夏夷。求之以人。便自覺知。曰道何道。率其秉彝。先生是契。自任不疑。謂聖賢業。吾分內事。事無難事。在我植志。行遠自邇。登高自卑。晦翁有書。作聖之基。光風霽月。師不我欺。服膺身踐。今悟昨非。不出日用。妙會天機。根深枝暢。源濬泉達。參驗貫穿。究極包括。次第階級。規模節目。厥有成法。信行斯篤。勿忘勿助。無過不及。眞積力久。是成是立。成不獨成。立必俱立。推爲麗澤。亦樂敎育。泝接伊洛。淵源洙泗。道果東矣。庶普厥施。旣不見容。反爲禍祟。時耶命耶。道不可恃。有待天定。難誣此理。功存百世。澤在多士。咸仰正學。愈久彌光。松林之原。洛流縈岡。幽宅在是。鐫賁無疆。

            

 (출처...장달수의 한국학카페)


비문에 의하면 신도비문은 1504년 돌아가신 후 1625년에 썼습니다.

                    


이수



귀부

우리가 주목하는 쌍귀부 입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쌍귀부는 통일신라시대 왕실 원당사찰, 또는 왕실과 깊은 관련이 있는 절집에 세워지며 9세기를 끝으로 사라지게 됩니다.그리고 1,000년 세월을 훌쩍 지나 한훤당 선생의 귀부에 환생하게 됩니다.



측면에서 보면 정겨운 부부의 모습입니다.

귀갑에는 연잎이 바람에 날리듯 살짝 들어 올려지게 표현하였습니다.



흔히

귀부는 명나라 호승지가 쓴 진주선(眞珠船)에 실린 용구자설 중 비희로 칭합니다.


일반사람에게는 영락없이 부부로 보이겠지만, 초등 학생들의 눈에는 어떤 모습일지 무척 궁금합니다.

천진무구한 아이들의 시각이 귀부를 장식한 장인의 뜻 아닐까요?


익살스런 표정?

힘든 표정?


그나저나

용의 아들 비희인데

왜 용부 龍趺가 아니고 귀부龜趺 일까요?


위에서 언급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쌍귀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늘사랑님 사진)


숭복사는 원성왕의 원당 사찰 입니다.

유존 하는 쌍귀부중 가장 훼손이 덜 되어 원형을 살펴 볼수 있습니다.

숭복사비崇福寺碑는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大朗慧和尙白月 光塔碑).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와 함께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 입니다.


원성왕릉,숭복사지

http://cafe.daum.net/moonhawje/DjZP/4367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숭복사비崇福寺碑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大朗慧和尙白月 光塔碑).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법광사는 진평왕 때 세워진 그의 원당사찰(願堂寺刹)입니다. 

창림사 일대는 신라 최초의 궁궐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쌍귀부가 있는 절은 신라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통일신라 쌍귀부 입니다.



무장사지 쌍귀부

무장사는 태종무열왕이 삼국 통일 후 평화를 염원하며 무기를 숨겼다는 전설이 전합니다.


무장사지

http://cafe.daum.net/moonhawje/DjZP/4362





(하늘사랑님 사진)


창림사지 쌍귀부


창림사는 박혁거세 탄생지인 나정과 신라 6촌의 촌장을 모시는 사당인 양산재'가 있어 일대를 신라 건국 초창기의 궁궐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창림사지

http://cafe.daum.net/moonhawje/DjZP/3449




포항 법광사지 쌍귀부


법광사는 신라 진평왕의 원찰로  사지에는 신위(神位)를 모신 숭안전(崇安殿)이 있습니다.


법광사지

http://cafe.daum.net/moonhawje/DjZP/4056





다시 한훤당 신도비 쌍귀부를 살펴보겠습니다.


통일신라 쌍귀부의 목을 빼고 머리를 치켜든 당당한 모습과 달리 목도 제대로 빼지 못 한 위축된 모습으로 디테일이 떨어집니다.


쌍귀부를 조성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신도비문을 기대했지만 실려있지 않았고,

귀부가 옛절집에서 옮겨 왔다는 가정하에 가까운 비슬산 부근 폐사지에서 단서를 찾았지만 문화재청 발간 한국의 사지에서는 발견하지 못 했습니다.


도동서원이 으뜸서원이라는 상징?

역시 근거가 부족 합니다.


풍수형국 비보책

낙동강물의 범람을 예방하려는 비보책으로 쌍귀부를 조성?

풍수에 문외한이지만 개인적으로 비중을 두고 있는 설입니다,

물론 에비던스가 없습니다


한편 소설을 탈고 하고 싶지만, 훗날 답사꾼들의 몫으로 돌리겠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는 힘든 표정이 역력한데, 할머니는 여유가 넘칩니다.

요즈음의 나의 자화상 같습니다.


- 영감 힘들어?

- ...

- 그런게 젊었을 때 술 끊고 몸관리 잘하지!!!

- 조용히 못 해!!!!!



알콩달콩 살아온 노부부의 정담이 들릴 듯 말 듯...



다양한 볼거리를 지닌

도동서원의 또하나 답사포인터지만 여기까지 찾는 사람은 드뭅니다.



한훤당 선생 가족묘

도동서원 옆 담장을 따라 10여분 발품을 팔면 됩니다.


맨위 한훤당선생 부인 순천박씨 묘

한훤당 선생 묘

손자 묘


즉, 배위 정경부인 순천박씨 묘가 선생 묘 위에 자리 합니다.


그아래

이례적으로 출가한 선생의 딸의 묘,

넷째 아들 부부 묘가 좌향을 달리하여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훤당 김굉필 묘



망주석

도동서원 기단 세호와 방향을 같이 하였습니다.




석등

글쎄요?

쌩뚱맞게 통일신라 쌍사자 석등을 조성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장명등을 따르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지.



문인석.향좌측




석양 石羊.향좌측

사악한 기운을 방지하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쪽 부재는 햇볓 차단 및 우천시 천막을 치고 고정하는 석재로 묘 좌우를 비롯해 4개가 있습니다.



문인석.향우측




석양.향우측



동자석.향우측



동자석.향우측



묘, 상석



옛상석이 있건만...



묘비

증우의정문경공한훤당김선생지묘 贈右議政文敬公寒暄堂金先生之墓



묘비

원래 세웠던 묘지석


새로 조성한 비문의  "숭정 13년 2월 립(崇禎 13年 2月 立)" 명문으로 미루어 1640년, 즉 사후 35년 후에 묘지석을 세운 듯 합니다.

비문은 통정대부이조참의겸지제교김세렴通政大夫吏曹參議 兼 知製敎 金世濂이 찬撰하였습니다.


김세렴(金世濂.1593~1646)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도원(道源), 호는 동명(東溟). 김홍우(金弘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흥부사(永興府使) 김효원(金孝元)이고, 아버지는 통천군수 김극건(金克鍵)이며, 어머니는 양천 허씨로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 허봉(許篈)의 딸이다.

22세에 생원·진사시에 합격, 1616년(광해군 8) 증광 문과에서 장원 급제해 예조좌랑이 되었으며,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를 겸임하였다. 이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고 전적(典籍)을 거쳐, 1617년에는 정언(正言)이 되었다.이 해 폐모론을 주장하는 자들을 탄핵하다가 곽산으로 유배, 1년 만에 강릉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년 뒤 귀양에서 풀려났지만 벼슬은 하지 못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어, 수찬·헌납(獻納)·교리(校理)를 거쳐, 이듬해 수의어사(繡衣御史)로 충청도를 살폈으며, 지평(持平)·교리·부응교(副應敎)를 역임하였다.


집의(執義)로 있을 때 공신 이귀(李貴)가 이조판서로 자천(自薦)하는 방자함을 왕에게 아뢰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1634년 현풍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636년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할 때 부사로 선발되어 다녀온 뒤, 사간을 거쳐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638년 동부승지를 거쳐 병조참지와 병조·형조·이조참의,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641년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원해 안변도호부사·황해도관찰사를 지내면서, 『근사(近思)』·『소학(小學)』·『성리자의(性理字義)』·『독서록(讀書錄)』 등을 간행하고 향약을 실시하는 등 도민의 교화에 힘썼다. 1644년 평안도관찰사로 옮겼다가 대사헌으로 조정에 들어가 홍문관제학을 겸임했고, 바로 도승지를 거쳐 호조판서로 군현 방납(郡縣防納)의 폐단을 시정하였다.


만년에는 경서 연구에 전력했고, 문장이 아름다웠으며 특히 시문에 능하였다. 김세렴을 가리켜 김류(金鎏)는 ‘진학사(眞學士)’로, 정경세(鄭經世)는 ‘당대 제일의 인물’이라고 칭송하였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저서로는 『동명집(東溟集)』·『해사록(海槎錄)』 등이 있다."(다음백과사전)



비수 전면 연꽃 문양



비수 후면.



비수 측면




가족묘

맨위 정경부인 순천박씨묘.

중앙 한훤당 선생 묘

아래 손자 묘



정경부인 순천박씨지묘 貞敬夫人順天朴氏之墓


신도비 글

"부인은 순천 박씨(順天朴氏)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는바,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천상(天祥)의 4대손이고 사맹(司猛)인 예손(禮孫)의 따님인데 거주한 곳이 합천군(陜川郡) 야로현(冶爐縣)에 있었다. 선생이 처음 장가들어 돌아오지 않았을 때에 별도로 우거하는 집을 마련하고 당호(堂號)를 지었었는데 뒤에 마침내 현풍의 옛날 거주하던 곳으로 돌아오니, 바로 현풍현의 서쪽대니산(戴尼山)의 남쪽에 있는 솔례촌(率禮村)이었다. 선생이 처음에는 사옹(簑翁)이라 호하였으니, 비록 비가 와서 밖은 젖으나 안은 젖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선생은 이윽고 말씀하기를, “이름을 지은 것이 너무 드러나니 세상에 처하는 도가 아니다.” 하고는 다시 고쳤다. 부인은 선생보다 36세 뒤에 별세하였다."



옛상석



묘비



망주석과 세호.향좌측



망주석과 세호. 향우측



향사를 지낼때에

햇볕 차단. 빗물 차단 용 천막 지지대.




손자 동부참봉東部參奉 대(岱)의 묘


신도비 글로 미루어 한훤당선생의 맏손자 같습니다.

"손자는 4명인데 동부참봉(東部參奉)인 대(岱), 부정(副正)인 입(立), 익(翊), 욱(昱)이다."



묘비

맨아래 글만 눈에 들어 옵니다

...공 대지묘(公 岱之墓)



현장 안내문에는 한문을 잘 못 표기하였습니다.

대(垈) 아니라 대(岱)가 맞습니다.


참고로

파주 율곡 가족묘역에도 맨뒤에 부인, 율곡.형님부부.부모 순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파주.율곡 가족묘(2010년)

http://cafe.daum.net/moonhawje/DjZP/1596



한훤당 묘를 내려 오면  세째 딸과 네째아들 부부묘가 있습니다.




네째아들

동부참봉서흥김공지묘 宣務郞東部參奉瑞興金公之墓


신도비 글

"아들은 4명이니, 장자인 언숙(彦塾)은 전력부위(展力副尉)이고 차자인 언상(彦庠)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며, 다음은 언서(彦序)와 언학(彦學)이다."






선생의 네째 아들 언학(彦學)과 배위 공인(恭人) 고령박씨(高靈朴氏) 묘



한훤당 선생 셋째딸 숙부인(淑夫人) 묘

사헌부 감찰 정응상의 부인입니다.

정응상은 도동서원의 기획자인 한강 정구선생의 조부 입니다.


신도비 글

"여서(女壻)는 5명이니, 맏이는 남부 참봉(南部參奉) 하백(河珀)이고 다음은 훈련원 정(訓鍊院正) 이장배(李長培), 사헌부 감찰 정응상(鄭應祥), 사인(士人) 강문숙(姜文叔), 충의위(忠義衛) 정성린(鄭成璘)이다."



출가한 딸이 친정 부모 묘역에 묻힌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현장 안내문에 그 내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경부인이 병환중일 때 숙부인이 시댁인 성주 지촌에서 수차례 미음을 끓여 내왕하였는데 백여리 길을 걸어와도 미음이 식지 않고 먹기에 편할 정도 한결 같았다고 한다. 비록 정씨 집안으로 시집 갔지만 부모를 모시는 정이 지극하여 정경부인이 사후 사까이 두고싶다 하여 묘소를 이곳에 정하였다고 한다"



묘비



숙부인. 넷째아들 묘역 전경



내려오는 길

낙동강을 사진에 담고 싶었는데.


쌍귀부 조성에 대한 진실은 묻어 두고 싶습니다.

답사는

폐사지 처럼 개개인의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2020.02.15(묘역은 21일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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