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달성군

대구...도동서원 톺아보기

임병기(선과) 2020. 2. 22.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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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도동서원 톺아보기, 그 숨은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스토리의 많은 디테일은 대구건축문화테마기행에 동행한 송은석님의 해설을 요약 했습니다.

또한, 저의 짧은 상식에 보태어 대구시 문화관광해설사 송은석님이 운영하는 카페(마의태자의 풍경산방.http://cafe.daum.net 3169179)의 글을 참고 및 발췌( 본 글에서 " "로 표기한 문장)하였습니다. 아울러, 도동서원을 간결하고 쉽게 설명해준 유교문화에 해박한 송은석님께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도동서원

최초의 자리는 이곳이 아니며 서원의 이름도 쌍계서원 이었습니다.

도동서원은 현풍읍 쌍계(雙溪)리 었으며 지명으로 미루어 두 물이 합류하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쌍계서원은 1568년(선조 1)에 초창하였으며, 1573년(선조 6)에 쌍계서원으로 사액을 받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병화를 입었습니다.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문집인 『경현록』은 쌍계서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무진년(1568)에 현풍의 선비들이 선생을 위하여 읍내에서 동쪽으로 2리쯤 되는 곳에 서원을 세우고 사당을 세웠으니, 정당은 중정이요, 좌실은 동익이요, 우실은 서익이요, 동재는 거인이라 하고, 서재는 거의라 하였다. 또 구용료·구사료·사물료·삼성료가 있고 또 양정재가 있어 어린 학생들을 가르쳤고, 문은 환주라 하였다. 시내 위에다 장차 정자를 지어 명칭을 조한이라 하려고 하였으니 선생의 ‘지호명월조고한’이란 시에서 따온 것이다. 앞에 두 시내가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흐른 까닭에 명칭을 쌍계서원이라 하고…

과거 쌍계서원이 있었던 자리에는 현재 민가가 들어서 있는데 그 입구에 ‘쌍계서원터’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쌍계서원이 사라진지 4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쌍계리 주민들은 쌍계서원 터 아래 도랑을 ‘서재(書齋)도랑’이라 부르고 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된 쌍계서원은 7년 뒤인 1604년(선조 37) 현풍현 오설리 송림 보로동으로 옮겨 중건되었으니 바로 지금의 도동서원 자리다. 중건 당시 서원명은 ‘보로동서원’이었는데 이는 서원이 들어선 동네의 이름인 보로동(甫老洞)에 근거한 것이다. 처음에는 먼저 사우[사당]만 세우고 나중에 강당과 부속건물들을 세웠다. 서원을 기존의 쌍계리가 아닌 보로동으로 옮겨 중건한 까닭에 대해 『경현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옛터는 인가들이 곁에 가까이 있고 장터가 있어서 시끄러운 까닭에 공부하는데 적합하지 않았으며, 또 선생이 평소에 발자취가 미치지 않았던 곳이니 거기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또한 연고가 되지 못하므로 마침내 이곳에 옮겨지었다. 지금 먼저 사우만 세우고 재당과 주방과 창고 등은 미처 세우지 못하였다…

이처럼 서원을 보로동으로 옮겨 중건한 이유에 대해 한 가지 더 첨언을 하자면 보로동서원 뒤편에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묘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쌍계서원의 뒤를 이어 1604년 중건된 보로동서원은 3년 뒤인 1607년(선조 40), 도동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재사액을 받았다. 재사액이라 한 것은 이 서원이 ‘쌍계’에 이어 ‘도동’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사액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름과 관련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처음에는 서원의 이름을 동명에 근거해 보로동서원이라 했다. 하지만 3년 뒤 도동서원으로 사액되자 이번에는 반대로 동명이 서원명을 따라 보로동에서 도동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도동리는 이렇게 하여 생겨난 것이다."(마의태자의 풍경산방)


도동서원은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9개 서원은 소수서원(1543년 건립), 남계서원(1552년 건립), 옥산서원(1573년 건립), 도산서원(1574년 건립), 필암서원(1590년 건립), 도동서원(1605년 건립), 병산서원(1613년 건립), 무성서원(1615년 건립), 돈암서원(1634년 건립) 입니다.

(도동서원 중건이 1604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나 유네스코 등재에는 1605년으로 기재 되어 있습니다)


쌍계(雙溪)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사찰, 폐사되고 이름만 남아 있는 절집 가운데 가장 많은 지명의 한 곳이 쌍계(雙溪)이며, 첩첩산중 깊은 산속에 위치한 폐사지 거의 대부분은 두 계곡(雙溪)이 합쳐지는 평탄한 남향터에 자리합니다. 현풍 쌍계리도 쌍계서원 이전부터  사찰이 유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용화사(쌍계리사지)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사찰 중정의 용두는 현 도동서원 용두와 묘하게 오버랩됩니다.


현풍 용화사(현재는 테크노파크 조성으로 근처로 이건하였습니다)

http://cafe.daum.net/moonhawje/DjZP/1753



은행나무

서원, 향교의 은행나무는 행단, 서원목, 향교목으로 불려지며 서원 건축 구성의 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행단(杏壇)은 독특한 향 때문에 벌레가 모이지 않아, 공자가 그 아래에서 마루를 놓고 제자들을 가려쳤다는 것에 유래되었다고 전하며,문화유산해설사들은 은행알 만큼 많은 제자를 배출하라는 상징을 함축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도동서원의 은행나무는 서원의 기획자이며, 외증손자이고, 도동서원에 함께 모셔진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선생이 심은 나무로 전합니다. 다른 곳의 나무와 다르게 아래로 처져 있으며 11월 중순에 단풍이 절정이라고 합니다.


도동서원 사적비

사진 우측의 비석으로 도동서원의 내력을 쉽게 풀이하여 1978년 세웠습니다.



한월당 신도비각

수월루 향좌측에 위치



한훤당 신도비 쌍귀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유일한 쌍귀부 입니다.

현존하는 쌍귀부는 통일신라시대 후기 경주와 포항 옛절터(경주 무장사지. 창림사지. 숭복사지. 포항 법광사지)에 남아있으며, 왕실과 밀접한 사찰이었습니다.


쌍귀부에 관한 아래글을 참조 바랍니다.


도동서원 한훤당 신도비 쌍귀부

http://cafe.daum.net/moonhawje/DjZP/4937



쌍귀부 측면



화계花階

외삼문인 수월루와 환주문 사이의 공간 입니다.

층단을 이루어 나무와 꽃을 심었으며, 보물로 지정된 담장이 강학공간인 중정당과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도동서원 담장

중정당.사우와 함께 보물 350호 입니다.


담장의 수막새기와와 암기와를 음양의 조화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환주문(喚主門)

도동서원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은 작은 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환주(喚主)

자기자신을 불러보라! 즉, 자기의 본성을 먼저 되찾아라는 경구로 배우기 앞서 예부터 갖추어라(선례후학 先禮後學)는 뜻입니다.


환주문 글씨는 누구의 작품?

혹 피휘법(避諱法) 때문에 낙관을 못 한 한강 선생이 주인공이 아닐른지요?



소맷돌 화문

계단 맨아래 소맷돌의 연꽃문양과 태극문양도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절병통(節甁桶)

우리 전통건축의 사모정. 육모정.팔모정 지붕위를 장식하는 기와 입니다.



환주문

출입하는 사람은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전통 복장을 갖춘, 갓을 쓴 선비라면 더더욱 자기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정지석

환주문 바닥에 설치

그래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건방을 떠는 출입객에게 한강 정구선생은  마지막으로 피니쉬 블로를 가할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내려보지 않고는스스로 돌부리에 발이 걸려 꼬부라지게 마련 입니다.

그렇다고 개화한 꽃을 보며 화 낼 수도 없고...



중정당中正堂

전학후묘 서원배치에서 강학공간으로 전면에 위치합니다.

3칸 대청, 좌우에는1칸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으며,온돌방의 전면에는 퇴주를 세우고, 온돌방 툇마루 아래에는 아궁이를 설치하였습니다.


중정당 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의 숙소인 동서재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동재와 서재는 선후배를 구분한 기숙사로 대칭 건물입니다.

그런데

송은석 해설사는 대칭성 보다 위계성을 말씀하면서 다른 점을 찾아 보라고 했습니다.

(저도 여러번 도동서원을 답사하였지만 간과하였습니다)


우선. 동재에는 방문 앞에 쪽마루를 설치하여 유생들이 걸터 앉을 자리가 있으나, 서재에는 없습니다

둘째. 동재 마루 벽면이 판벽이며 창문을 내어 개방적이나, 서재는 흙벽으며 창문을 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로, 동재는 두리 기둥, 서재는 방형기둥으로 위계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동재 거인재(居仁齋), 서재 거의재(居義齋)

건물 명칭은 유교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방위(동仁,서義,남 禮,,북智. 중앙信)을 취하였습니다.



동재 거인재(居仁齋)



서재 거의재(居義齋)



중정당 기단

막돌 허튼층 쌓기 같지만 바늘 하나 들어갈 틈새 없이 조밀하고 정치한 기단 입니다.


서원 중건시에 위대한 유학자 이전에 건축대가인 한강 정구선생이 조선 팔도 지인들에게 요청하여  그들이 보내온 돌을 가공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돌의 모양도 색깔도 각양각색입니다.


한강 선생의 숨은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물론,한훤당 선생을 중심으로 유교 철학을 강화하자는 목적이었겠지만, 전국에서 몰려온 젊은 학생들이 고향이 그리우면 각자 고향에서 보내온 돌을 어루만지며 향수를 달래라는 의미도 있지 않았을까요?


경우는 다르지만

70년대 우리 경제가 뻗어나갈 시절 경남 마산의 한일합섬 운동장에는 팔도 잔듸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려운 집안 살림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여학생들이 고향을 떠나 한일합섬으로 취업하여 주경야독을 하였지만 지독한 향수병는 어쩔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치유책으로 고향을 다녀올 때 마을 뒷산의 잔듸를 한웅큼 가져와서 운동장에 심기 시작하여 팔도 잔듸구장을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오래전(2003년) 답사기에 엉뚱한 생각을 올린 적이 있지만, 아직도 유효한 썰(說)이라고 믿습니다.


"중정당의 압권은 기단이다.

미술학도 눈에는 몬들리안의 추상화(?)로 보이고, 민속학자 눈에는 헝겊을 짜집기한 보자기로 보인다지만 궁궐을 제외한 건물들의 기단 장대석은 2 벌대 이상으로 하지 못하기에 장대석을 사용하지 않고 높이를 높이기 위해 변칙으로 조성했겠지만 장인의 정성이 가득 스며 나온다.  어째든 몬들리안은 우리에게 한푼의 로얄티도 내지 않고 우리 보자기를 도용하여 그의 그림을 그렸다고 나는 확실히 주장한다..


이런 예는 또 있다. 

나이키의 로고를 생각해 보라?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 현무를 도용한 것이 분명하고,

코카콜라 병은 여인의 몸매를 모방했다지만 천만에 그건 참외문양 고려청자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고,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은 미륵반가유상을 리모델링 한 것이 분명하다?"




거북

기단과 마당이 접한 부분에 위치


어느해에 해설사분이 "사나운 모습은 뜨락 가운데에 깔린 스승이 드나드는 길을 학동들이 장난을 치다가 무심코 올라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사족을 보태자면 역시 풍수형국의 비보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동서원 기단.

송은석 해설사는 12각 돌을 찾아 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12각의 부재 3개가 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헛 답사를 한 것이지요.



12각을 찾으셨나요?



기단부에는 3개의 용두가 있습니다.

도난당한 후 다시 찾아 한 개만 본래의 용두 입니다.



본래의 용두 입니다.

송은석님은 용을 조성한 명확한 근거는 없으며 각자의 몫이라고 하였습니다.

혹, 용이 물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의주는 아니고 잉어라면...



기단부 좌우 계단

계단옆에는 세호가 오르내립니다.

조성 배경으로 여러가지 가설이 있지만, 오르고 내려오는 표식만은 분명합니다.

더불어 세호 옆 화문도 상징성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세호

향우측 계단 옆



세호

향좌측 계단 옆


그리고

좌우 계단에는 사찰의 석탑부재로 추정되는 치석재가 놓여 있습니다.


향우측 계단의 2개 부재

본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어 부재 명칭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우측 계단



치석재

계단 아래에서 2번 째 층계



계단 맨위 층계



향좌측 계단



우주를 모각한 석탑 중석 입니다.



측면에서 보면 더욱 뚜렷 합니다.



향우측 계단 부재와 동일부재로 추정됩니다.


도동서원에 폐사지에서 옮겨온 부재가 활용되었다는 자료는 없습니다.

다만, 쌍계서원 개원시에는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우리나라 향교 건물에서 가장 많은 사찰 건물 부재를 활용한 향교가 현풍향교 입니다. 또한 비슬산 폐사지에서 반출되어 현풍초교 교정에 있던 부재를 최근에 동화사 현풍포교당 동서삼층탑으로 복원하였습니다.


현풍 향교

http://cafe.daum.net/moonhawje/DjZP/1565


동화사 현풍포교당

http://cafe.daum.net/moonhawje/DjZP/2720



정료대庭燎臺

야간 행사에 관솔불 등을 밝혔던 장치입니다.

그런데, 뜰이 아니고 기단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상지上紙

중정당 기둥 상부의 흰색 종이.

오현 중의 으뜸인 한훤당 선생을 모셨다는 표식이라고 합니다.

그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송은석님의 유려하고 분명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우리나라 향교에 모셔진 인물중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사람을 제외하면 18분 입니다.

신라의 설총,최치원, 고려의 안향과 정몽주,나머지 14분은 조선시대 인물로 한훤당 선생의 신위가 가장 높은 자리에 모셔지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퇴계는 5번째 율곡은 7번째 모셔 집니다."


그리고

"도동서원에 하마비가 처음부터 설치되지 않은 까닭도 상지上紙가 그 기능을 대신 했을 것으로 설명합니다.

즉,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선상에서도 낮에는 햇볕, 밤에는 햇불 때문에 상지上紙가 눈에 들어 오며, 서원을 향해 예를 표했을 거라고 추정 합니다"


조선시대 1777년 이호윤의 유산기에  멀리 강 건너에서 서원을 향해 절하였다는 글이 실려 있어 해설사의 추정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유가야산록 (遊伽倻山錄) - 이호윤 (李顥潤.1777~1830 )

"저녁에 현풍(玄風)의 복안현(卜鞍峴)에 도착하였다. 이 날은 60리를 걸었다.
임진일 아침에 일찍 이선겸(李善兼)의 집에 들어갔다. 이 사람은 나의 친척으로 본래부터 친밀한 관계였는데 흉년 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다. 그 집은 비록 편안하였으나 시간이 급하였으므로 이 또한 돌아갈 때 들르기로 약속하였다. 곧바로 출발하여 백산진(栢山津)을 건넜다. 중류에서 내가 중서를 돌아보며,


“강을 건너면 지나가는 모든 산은 모두 가야산의 지맥이다. 어찌 반드시 조종이 되는 봉우리에 올라간 뒤라야 이 산을 유람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자, 중서가,
“나 또한 이런 맛을 압니다.”
라고 하였다. 뱃사공의 집에 들어가 ‘추하(秋霞)’란 술을 한 잔 마셨다. 드디어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강을 사이에 두고 도동 서원(道東書院) 에 절하였다. 다섯 고을의 소금을 운반하는 곳인 개상포(開上浦)에 도달하였다. 가게가 줄지어선 것은 물론 닻을 내린 배들도 큰 길 옆에 있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 서쪽으로 작은 한 고개를 넘어 내려갔다."



도동서원 (道東書院)

중정당 위에 걸려 있습니다.



만력 35년 2월 일 사액(萬曆35年2月 日 宣賜).1607년

선조가 하사한  모정 배대유(慕亭 裵大維.1563~1632)의 글씨



또 하나의 현판이 있습니다.

도동서원(道東書院)

이퇴계의 글씨를 집자하여 모각



이퇴계의 글씨를 모각한 사유를 새긴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한강정선생수서(寒岡鄭先生手書)... 한강 정구


해석문

이 선생(퇴계)께서 항상 김선생(한훤당)의 서원을 세우는 일에 간절한 뜻을 두고 계시다가, 아깝게도 선생의 생존시에 미처 서원 10개소의 수를 채우지 못하였다. (퇴계 문집 가운데에 십개소의 서원을 읊은 시가 있는데, 다만 아홉 서원만 있고 열 서원은 갖추지 못하였다) 만일 그 때에 계셨더라면 친히 현판을 쓰시기를 무엇보다도 먼저 하셨을 것이다. (여러 서원의 현판 가운데 선생이 쓴 것이 많다) 이제 서원이 거듭 새로워지고, 道東이라는 훌륭한 명칭이 궁중에서 내렸으며, 현판을 나라에서 내려 보내실 때에, 마침 또 선생께서 쓴 액자 중에서 道東書院 넉자의 큰 글씨를 얻어서 모하여 새겨서 서원에 보냈다.


先師의 옛 글씨와 임금께서 은총으로 주신 것이 장차 안팎으로 서로 빛날 것이니, 행여 학자들이 존숭하며 본받을 바를 알게 할 것이며, 또한 이 선생의 남긴 뜻을 성취하는 것이 될 것이다.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랴? 무릇 서원에 들어오는 우리 선비들은 서로 함께 瞻仰하고 사모하여 깊이 道東의 뜻을 잘 알아서, 부지런히 쉬지 않고, 그 뜻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을 어찌 생각하지 아니하랴?


만력정미추칠월 선조 사십년정미 후학서원 정구근서(萬曆丁未秋七月 宣祖四十年丁未(1607) 後學西原鄭逑謹書)



제집사분정기(諸執事分定記)

향사 때에 소임을 기록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분정기는 그대로 두고 향사시에 소임을 새로 기록하면 됩니다.



맨끝의 원(原)은 무슨 의미일까요?


송은석 님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인원물제(人原物際)  조선시대에는 문서(文書)의 사람의 명단이 끝나는 위치에 원(原) 자를, 물건의 목록이 끝나는 위치에는 제(際) 자를 쓰는 원칙이 있었으나, 안동 지방에는 피휘법 때문에 물건 목록 끝에도 원原을 씁니다"



대청 좌우 방, 툇마루쪽 창에는 문종이를 안에서 붙혔으나, 대청쪽은 밖에서 발라 창살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송은석님의 카페 "마의태자의 풍경산방"에서 발췌 정리하였습니다.

"도동서원의 서실은 원장실, 동실은 선생님의 방입니다. 그런데 툇마루쪽의 창호지는 문안쪽에 발려져 있다. 그러나 대청쪽은 바깥에 발려 있다. 이것은 방과 대청 중에 어느 곳을 더 중요한 공간으로 보느냐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원장과 선생이 기거하는 방이 중요한 공간이 맞다. 하지만 대청은 사제가 함께 자리하며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이어서 스승의 방보다 중요한 공간으로 판단 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사당 내삼문과 화계

중정당 문을 열고 바라 본 전경



이상한 점이 없나요?


답은 아래에서...


(사진.동호회 틈새님)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돌로 만든 쪽마루 입니다.



성생단(省牲壇)

향사에 바칠 희생을 올려 놓고 검사하는 단

참고로 서원,향교의 향사(享祀)  에는 익힌 음식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내삼문 앞 계단과 화계

계단에도 사악한 기운을 예방하기 위한 이중 삼중의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그에 앞서 내삼문 앞의 비밀을 찾았는지요?

바로 서쪽 계단이 없다는 것 입니다.



신문, 오른쪽 계단만 있습니다.

향교, 서원의 동입서출 원칙과 배치되는 구조 입니다.


처음 부터 서쪽 계단은 없었으며,

즉, 도가 동쪽에서 왔다는 도동道東을 충실히 따른 결과라고 합니다.



내삼문 계단 하단

좌우 만(卍)자와 태극문

길상을 상징하며, 벽사의 의미도 가집니다.



만(卍)



태극문



계단 중앙지점

동쪽 계단과 분기되는 기둥 좌우 연꽃 봉우리



이분은 누구실까?

용. 양...

신도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추정됩니다.



신도의 화문

왜 새겼는지 정확한 까닭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문 닫힌 신문 밖에서 사당을 향해 참배하는 배례석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지금부터는 사당 중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향사享祀(동호회.不狂不及님 사진)



석등石燈(2007.02.20일 사진)

사당 단청공사 때문에 신위를 옮기는 날 내부 벽화를 뵌 날입니다.



감(坎)

사당 담장에 위치하며 축문 등을 태우는 공간

많은 문화유산 답사기에 차(次)로 잘 못 표기되어 있습니다.



수막새기와

사당 담장을 장식하고 있는 기와 입니다.



만력 33 萬曆 卅三 .1605년

서원 보로동 와조 書院  甫老洞 瓦造

1605년 도동서원의 전신인 보로동 서원  중수시에 사용하였던 기와 입니다.



2007년

사당 단청을 위한 고유제를 올리는 날

사당 안을 들어가 벽화 2점을 처음 뵈었습니다.

아쉽게도 그린 사람과 년대가 전하지 않습니다.



화제畵題. 강심월일주 江心月一舟

한훤당의 오언절구 선상船上을 그린 그림으로 송은석님은 선상의 두노인은 한훤당 선생과 함양에 거주하는 일두 정여창 선생이 낙동강에서 유희하는 장면으로 추정합니다.


船上(선상)

  

선여천상좌 船如天上坐  배는 하늘 위에 앉은 듯

어사경중유 漁似鏡中游  물고기는 거울속에 노는 듯

음파휴금거 飮罷携琴去 술마신 후에 거문고 끼고 돌아가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  강 폭판 달 빛이 배에 가득 찼네



화제畵題. 설로장송雪路長松.

한훤당 선생의 칠언절구 노방송을 그린 그림



노방송(路傍松)

 

일로창염임노진 一老蒼髥任路塵  한 그루 늙은 소나무 길가에 서 있어  

노노영송왕래빈 勞勞迎送往來賓  괴로이도 오가는 길손 맞고 보내네

세한여여동심사 歲寒與汝同心事  찬 겨울에도 너와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

경과인중견기인 經過人中見幾人   지나가는 사람중에 몇이나 보았을고


한훤당 묘


도동서원 답사 후 여유가 있으면 한훤당 선생의 가족묘 답사를 권합니다

묘역은 서원 향좌측 등산로를 따라 10여분 발품 팔면 됩니다.


묘역에는 선생의 묘를 중심으로, 정경부인 순천박씨. 손자 이대, 세째 딸 숙부인, 네째 아들 부부 묘가 있습니다.


가족 묘역

세세히 살폈는데도

사적비.수월루.장판각.전사청 이야기는 누락되었습니다.


글 자체도 불만족스러워 단풍이 고운 날 다시 들려 마무리해야겠습니다.

그 역시도 장님 코끼리 더듬기에 불과 하겠지만...


2020.02,15

( 아주 여러번 오류, 오타를 수정했지만 분명 또 있겠지요.댓글로 주시면 수정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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