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대구건축문화테마기행 일원으로 들렸습니다. 집과 지근에 위치하여 여러 차례 다녀왔고, 안내하였으며, 글도 몇 번 올렸으므로, 현판 이야기를 중심으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님들 답사에 참고 바랍니다.
2003년 글.건방진 논조지만 그냥 옮겨왔습니다 http://cafe.daum.net/moonhawje/DjZP/69
동수 洞藪 인흥마을에도 마을 숲이 있습니다.
인흥마을 마치 계획된 도시 처럼 느껴집니다.
수봉정사 수봉 문영박(1880~1930) 선생을 추앙하기 위해 수봉의 아들 5형제가 세운 집입니다.
우물 인흥사 우물로 전합니다.
석가산 石假山 수봉정사 마당에 조성되었으며, 일반적으로 봉래산, 영주산,방장산을 상징하는 삼신산을 화감암으로 꾸밉니다.
석가산石假山
문수봉선생영박송덕비(文壽峰先生永樸頌德碑) 여러번 방문했어도 보지 못 했던 수봉선생 송덕비와 해설 안내문이 함께 있습니다.
수봉정사를 답사했던 분이라면 수백당 마루 아래 문인석 옆에 있었던 송덕비를 기억할 것입니다. 위 설명문 처럼 우리님들이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당시 인흥마을에에 출입하던 사람들이 돌아가시던 해에 세운 비석입니다. 그러나 병석에 있던 수봉선생이 이 사실을 알고 철거하게 했다고 전합니다. 몇년전 문중에서 송덕비만 석가산 옆에 세웠으나, 문인석은 어르신의 유지를 따르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의모이자비진의(以義謀利者非眞義) 의로써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참된 의가 아니오 이인요예자비진인(以仁要譽者非眞仁) 인으로써 명예를 구하는 것은 참된 인이 아니다. 불모불요이위인의(不謀不要而爲仁義) 도모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으면서 인의를 행하였으니 시만권당주인야 (是萬卷堂主人耶) 이분이 바로 만권당 주인이 아니겠는가
문인석 마루 아래에 누워 있어도 많은 메세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수 미처 확인하지 못했지만, 문인석과 함께 조성하려던 비석 이수로 추정됩니다.
이광원 彛光園 떳떳이 변하지 않고 빛나는 정원이란 뜻
시단 詩壇 수봉선생께서 시를 지었던 곳(?)
녹음정 綠陰亭 실제로 정자가 있었는지, 석가산에 녹음이 우거져 정자로 표현 한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 햇습니다.
거북 장수와 화재 예방의 비보 목적으로 추정 합니다.
거북빗장둔테 등에는 새긴 건(乾)괘와 곤(坤)괘를 새겼습니다. 건(乾.三)은 南,火.陽이며, 곤(坤.三+三)은 北,水.陰을 상징합니다. 즉, 거북은 장수,화재 비보 외에도 음양의 조화를 갖춘 집이며,기자(祈子)의 의미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현판 글씨 소개에 앞서 인수문고 보관중인 귀한 자료를 소개합니다
인수문고 소장, 추조문. 특발문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00224010004224 (글 하단 사진 참조요...시스템문제인지 사진 업로드가 프레임 안에 첨부가 안 됩니다)
본래 주제로 들어가 현판을 살펴 보겠습니다.
수백당守白堂 우당 유창환(愚堂 兪昌煥.1870~1930) 청렴 결백을 지키는 의미 입니다.
우당 유창환(愚堂 兪昌煥.) "본관은 기계(杞溪). 초명은 명환(明煥). 자는 주백(周伯) 또는 준백(準伯), 호는 우당(愚堂)·육일거사(六一居士)·홍엽산방주인(紅葉山房主人)·성동초자(城東樵者). 경사(經史)와 백가(百家)의 책을 익혀 문장에 통하였으며, 금석(金石)에도 조예가 있었다 한다.
글씨는 각체를 두루 하였는데, 특히 초서가 돋보여 호건유창(豪健流暢)하였고,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에 여러번 입선하였다. 필적으로 경상남도 사천의 「침산정기덕비(枕山亭紀德碑)」, 서울의 「이종석송덕비(李鍾奭頌德碑)」·「한규설묘표 韓圭卨墓表)」 등이 있다."(다음 백과)
2003년에는 수봉정사壽峰精舍 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이청각履淸閣 명나라 서예가 문징명(文徵明.1470~1559)의 글씨 청렴을 밟는다는 의미입니다.
"본명은 문벽. 스승인 심주(沈周)와 함께 중국에서 존경받는 문인화가들의 유파인 오파의 중심인물로 여겨진다. 강한 유교적 가풍을 지닌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을 많이 만났다. 천성적으로 민감하고 내성적이어서 53세 때인 1523년에야 비로소 학구적인 은둔생활을 버리고 세상에 나와, 조정의 인정을 받고 한림원 대조로 임명되었다. 한림원에서 3년을 지낸 뒤 은퇴하여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4가지 주요서체인 전서·해서·예서·초서에 모두 능했다. 또한 미술품, 특히 서예작품 수집가·감정가로도 유명했다. 송대(960~1279)와 오대에 활동했던 옛날 화가들뿐 아니라 원대의 위대한 문인화가들도 존경했다. 하나의 화풍을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그림에는 전반적으로 고인들의 화풍연구와 심사숙고의 정신이 담겨 있다. 그의 그림은 기법이 다양하여 세부를 꼼꼼히 묘사한 것이 있는가 하면 자유롭게 채색한 것도 있다.
제자로는 아들인 문가(文嘉:1501~83)와 조카인 문백인(文伯仁:1502~75) 등이 있으며, 대표작으로 〈춘심고수도 春深高樹圖〉·〈산우도 山雨圖〉·〈진상재도 眞賞齋圖〉 등이 꼽힌다."(다음 백과)
사백루思白樓 명나라 서예가 문징명(文徵明.1470~1559)의 글씨를 집자 사백思白은 결백을 생각한다(문명박선생을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선생의 아호인 수백당守白堂의 백白을 취한것으로 추정 합니다
경유당敬遺堂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1880~1930) 경유敬遺는 선현의 업적을 공경한다는 의미. 위창과 수봉정사에 관해서는 맨위 2003년에 겁없이 개인적인 견해를 밝헜습니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명(仲銘), 호는 위창(葦滄·韙傖). 서울 출생. 조선 말기 중국어 역관이며 서화가·수집가였던 오경석(吳慶錫)의 장남이다.
20세에 역관이 되었다가, 1886년 박문국 주사로서 『한성순보』 기자를 겸하였다. 1894년에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이 되었고, 이어 농상공부 참서관, 통신원 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897년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교사로 1년간 체류하였다. 1902년 개화당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던 중에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06년 귀국 후 『만세보』·『대한민보』 사장을 역임하였고,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8년에 근대적 미술가 단체의 효시인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13인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였으며, 민족서화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광복 후 서울신문사명예사장·민주의원·대한민국촉성국민회장·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6·25전쟁 중 피난지 대구에서 사망하여 사회장(社會葬)이 거행되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한묵생활(翰墨生活)로 은거하며 오경석과 자신이 수집한 풍부한 문헌과 고서화를 토대로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을 편술하였다.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서화가에 관한 기록을 총정리한 사전이다.
그 밖에도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문인학자들의 날인(捺印)된 인장자료를 모아 『근역인수(槿域印藪)』를 집성하였으며, 수집한 소품 고서화들을 화첩으로 묶은 『근역서휘(槿域書彙)』·『근역화휘(槿域畫彙)』 등 한국서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글씨는 전서와 예서를 고격(高格:옛 격식)하게 즐겨 썼다.
특히 전서와 예서를 혼합한 글씨나 와당(瓦當), 고전(古錢), 갑골문형태의 구성적인 작품도 시도하여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또한 고서화의 감식과 전각(篆刻)에 있어서도 당대의 일인자였다. 합천 해인사의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비(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碑)」의 두전(頭篆: 빗몸의 머리에 돌려가며 쓴 전자)을 비롯한 기념비 글씨도 전국 곳곳에 많이 남겼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다음 백과)
쾌활快活 노완老阮은 추사 김정희(1786~1856) 말년의 호로 알고 있습니다. 명랑하고 홥발하다 또는 시원하게 탁 트이어 넓다라는의미로 남평문씨 문중의 성품과 세거지의 취락배치를 표현한 것 입니다.
추사 김정희 간단히 생애만 옮깁니다
"예산 출신.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노(果老)·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다.
조선조의 훈척 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 앞으로 출계(出系: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던 말)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다음 백과)
혁채가 赫采家
광창(?) 인흥마을에서 귀한 들꽃이 많은 집입니다. 예. 맞습니다 능소화 필 쯤이면 인산인해를 이루는 그 고택 입니다.
창살
합각의 지네철 지네철을 박쥐로 장식한 까닭은 박쥐의 한문이 편복蝙蝠으로 박쥐 복蝠이 복 복(福)과 발음이 같아 집안에 복을 가져온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광거당廣居堂 맹자의 천하의 넓은 곳에서 거처한다(居天下之廣居)에서 취하였다고 합니다.
세거지가 뿌리를 내리고 대외적으로 알려지자 後隱(후은) 文鳳成(문봉성) 부자가 기존의 용호재를 헐고 1910년에 세운 재실입니다. 이곳에는 인수문고의 전신인 만권당이 있었으며, 전국의 문인 학자들이 모여 들었다고 합니다.
헛담
헛담 꽃문양 포커스를 강하게하려는 의도겠지요.
구시
수석노태지관壽石老苔池館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글씨
광거당廣居堂 석촌 윤용구(石村 尹用求.1853~1939)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주빈(周賓), 호는 석촌(石村)·해관(海觀)·수간(睡幹)·장위산인(獐位山人). 남녕위 의선(宜善)의 아들이다. 1871년(고종 8) 직장(直長)으로서 문과에 등제하여 벼슬이 예조·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로 법부·탁지부·내무부 등 대신에 십수회 배명(拜命)받았지만 취임하지 않고 서울 근교의 장위산에 은거하면서 ‘장위산인’이라 자호하였다.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에서 남작을 수여하였으나 거절하고 서화와 거문고, 바둑으로 자오(自娛)하며 두문불출, 세상을 멀리하였다.
글씨는 해서·행서를 많이 썼으며 그림은 난과 대를 잘 그렸다. 금석문으로 과천의 「문간공한장석신도비(文簡公韓章錫神道碑)」와 광주(廣州)의 「선성군무생이공신도비(宣城君茂生李公神道碑)」가 있으며, 전라남도 순천 선암사 입구의 강선루(降仙樓) 현판 등을 남겼다. 한편, 그림으로는 「죽도(竹圖)」(개인소장)와 「묵죽(墨竹)」(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한국서예백년전에 출품된 행서 작품을 보면 특징있는 자기의 필치는 이루었으나, 강약의 변화를 구하는 데 있어서는 무리가 있어 부자연스럽고 행의(行意)의 수필처(收筆處)의 획들에도 군더더기가 생긴 곳이 많아 격이 높지는 못하다."(다음백과)
고산경행루 高山景行樓 중국 개화기의 학자 장건張謇 글씨,
시경(詩經).높은 산을 우러르고 큰길을 따라가네(高山仰止 景行行之). 즉, 옛사람 중에 높은 덕이 있는 자 사모하고, 밝은 행실이 있는 자를 본받겠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김란집구 시판 金蘭集句詩板 그냥 찍었는데...
김란이 1918년 쓴 집구시集句詩 편액 입니다.
아회 雅懷 수봉선생의 글씨입니다. 바르고 아름다운 생각 광거당이 그 당시 국내의 학자들이 모여 토론의 장이 었기에 아회 편액을 건 듯 합니다.
뒤에는 이퇴계의 서복書福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광거당廣居堂 고산경행루 高山景行樓를 쓴 중국 개화기의 학자 장건張謇 글씨,
이친료 而親寮 심재 조긍섭(深齋 曺兢燮.1873~1933) 군자는 어진이를 어질게 여기고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긴다라는 의미로 대학에서 취했습니다
조긍섭(深齋 曺兢燮) "조긍섭은 11세 때에 『근사록(近思錄)』을 10일 만에 베껴 쓰는 놀라운 글재주를 보였다. 17세 때에는 당시 영남의 큰 선비였던 곽종석(郭鍾錫)을 찾아가 태극·성리 등에 관하여 토론을 벌였다. 1901년(광무 5) 19세 때에는 대구에서 열린 향시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이종기(李鍾杞)를 방문했다.
조긍섭은 20세를 전후로 장복추(張福樞)·김흥락(金興洛) 등을 찾아가 학문에 대해 문답을 했다. 1905년(광무 9) 23세 때에는 『남명집(南冥集)』을 중간하는 사업에 참가해 여러 선배 문인들과 사귀었다. 1908년(융희 2) 26세 때에 사서(四書)에 대해 의문이 나는 점을 묻기 위하여 다시 김흥락을 만났다.
1910년 합병소식을 듣고서는 두문불출하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동서의 학설을 비교 궁리하여 『곤언(困言)』을 저술하였다. 다음해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러나 학문에 대한 열의가 식지 않아 「거빈해(居貧解)」·「성존심비변(性尊心卑辨)」 등의 논문을 써냈다.
부친상이 끝나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다스리며 선비의 길을 걷고자 정산(鼎山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으로 숨어 버렸다. 그 뒤에 문박(文樸)의 서재(書齋)인 광거당(廣居堂)을 오가며 학문에 몰두했다. 그리고 정산서당을 지어 후학을 가르쳤다.
1919년 3월 「일본총독과 동포대중에게 보내는 글」의 초안을 잡다가 발각돼 17일간 구속을 당했다. 1928년 겨울에 문인들의 요청으로 정산에서 비슬산 서쪽인 쌍계(雙溪)로 거처를 옮겨 구계서당(龜溪書堂)을 짓고 후학을 계속 양성했다. 1933년 61세로 사망했다.
조긍섭의 『곤언』은 정통 유학자로서 주체적 사고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글이다. 서양의 문화와 제도를 비판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성리학적 저술로는 20세 때에 이진상(李震相)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17조목으로 분석하고 비판한 「독심즉리설(讀心卽理說)」,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인정하면서도 ‘심’은 곧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심문(心問)」, 그리고 전우(田愚)의 견해를 비판한 「성존심비변(性尊心卑辨)」·「성존심비적거변(性尊心卑的據辨)」 등이 있다.
조긍섭은 일정한 스승은 없었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매우 영특하여 일가의 학문을 이루었다. 시문에도 법도가 있어 당시 영남 사림에서 거목으로 지목되었다. 한말 지식인 가운데에 황현(黃玹)·김택영(金澤榮)·이건창(李建昌) 등과 교유했다. 그들을 뛰어난 인물로 칭찬했던 점으로 보아 유학자로서의 보수적 경향만을 고집하지 않는 학자였다.
저서로는 『암서집(巖棲集)』·『심재집(深齋集)』41권 20책·『조명록(措明錄)』 등이 있다."(다음 백과사전)
광거당 실내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어서 디카를 마구 눌렀더니 불행히도 쓸만한 사진이 없어, 선물받은 위 책에 수록된 사진을 찍었습니다. 훗날 누군가의 답사길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겟습니다.
용호재龍湖齋 말년에 팔공산 아래에 살면서 호를 팔하(八下)라고 하였던 서석지의 글씨.
팔하 서석지(八下 徐錫止.1826~1906) 시(詩)·서(書)·화(畵)·금(琴)·기(棋)·박(博)·의(醫)·변(辯)에 능해 ‘팔능거사(八能居士)’로 불립니다.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萬)의 제자이며,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1862~1936.)의 스승. 서병오의 제자가 竹農 徐東均(1902~1978)입니다. 대구에서 주로 활동한 듯 선생의 작품이 대구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서석지가 유명세를 탄 것은 경삼도 관찰사해장 신석우(海藏 申錫愚.1805~1865)가 1856년 임기를 마치고 이임 할 때 쓰게한 아래의 현판 글씨라고 합니다.
이봉이록爾捧爾祿 민고민지民膏民脂 그대의 벼슬과 녹봉은 백성의 살과 백성의 기름이요 하민이학下民易虐 상천난기上天難欺 백성들을 학대하기 쉬워도 하늘은 속이기 어렵다
(저와 친분이 있는 이영규선생님의 의역)
호남에서 주로 활동한 창암에게 11살(1839) 때 이삼만에게 배웠다는 내용이 필감(筆鑑) 서문에 실려있다고 합니다. 필감(筆鑑)은 고전 서론(書論)에 자신의 창작 경험을 응집한 서예 이론서이며 비평서로 그가 집안에 남긴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과 함께 아들 중산(中山) 서경순(1850~)에 의해 1917년 대구 재전당 서포(在田堂 書鋪)에서 필감부초천자筆鑑附草千字)로 출판되었다 고합니다.서경순은 남산동 문우관의 진덕문(進德門))을 썼으며 서예가로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창암과 추사 "1840년 가을, 추사 55세, 창암 71세, 귀양 길의 추사는 전주 한벽루에서 창암과 마주한다. 창암에 대한 소문을 들은 추사가 정중히 하필을 청하니, ‘붓을 잡은지 30년이 되었으나 자획을 알지 못한다’고 겸손하게 사양했으나 다시 간곡히 청해오자, ‘강물이 푸르니 새 더욱 희고/ 산이 푸르니 꽃은 더욱 붉어라/ 이 봄 또 객지에서 보내니/ 어느 날에나 고향에 돌아가리(江碧鳥逾白/ 山靑花欲然/ 今春看又過/ 何日是歸年)이라고 썼다. 이에 추사는 ’명불허전‘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9년 뒤 추사가 다시 전주에 왔을 때에는 이미 창암은 고인이 되었다. 이에 추사는 ’명필 창암 완산이공지묘‘라는 묘비문을 썼다고 한다."(전북일보)
이렇게 장황하게 설을 푼 까닭은 추사와 창암의 제자 서석지가 이곳 인흥마을에서 글씨로 해후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기 때문 입니다.
인수문고仁壽文庫 효람 박병규( 曉嵐 朴秉圭 .1925~1994) 하빈 묘골 출신. 박팽년의 후손 입니다.
"아호는 효람(曉嵐), 서예가로 부인은 청주 정씨로 한강 정구의 후손이다. 충청공의 18세 손 황(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예가의 길로 들어가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3회에 걸쳐 특선했다.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전작가, 초대작가와 한국서예협회 부회장, 국제서도협회 한국본부 이사, 청구묵림회 회장, 국전심사위원을 지냈다.
영주 부석사의 ‘해동화엄종찰’, ‘태백산 부석사’, 인흥마을의 ‘인수문고’ 청도 ‘운강고택’ 송효찬 장군의 ‘묘비’ 등이 그의 작품이며 유작(遺作) 40여 점은성균관대학교에 기증되었다. 행초서로 일가를 이루었다,"(나무이야기.이정웅님)
중곡서고中谷書庫 중국인. 이탁(李鐸)의 글씨 중곡 문희응 선생이 모은 20세기에 간행된 한국학 중심의 책 5,000여권이 있으며,1993년 인수문고 옆에 지었습니다
거경서사居敬書舍 혜사 노재봉(惠史 盧在鳳.1936~). 전 국무총리 거경居敬은 궁리窮理와 함께 주자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뜻이라고 합니다
인수문고에 소장된 서책을 열람閱覽 및 훈고訓詁를 위한 목적으로 1982년에 세웠습니다
수봉정사(壽峯精舍) 위창의 글씨. 2003년에는 수백당 편액 자리에 걸려 있었습니다.
만권당萬卷堂 인수문고 전신으로 광거당 내부에 있었다고 합니다. 글씨의 주인공은 전하지 않고 현재는 인수문고에 걸려 있었습니다
정수헌(靜壽軒) 우향 정대유(又香 丁大有.1852~1927) 광거당 동북쪽에 있는 방으로 수봉선생이 한가롭게 거쳐할 목적으로 했다고 합니다. 정수靜壽는 조용히 수를 누린다는 뜻 입니다.
정대유 "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우향(又香)·금성(錦城). 괴석(怪石)과 난죽(蘭竹) 그림으로 유명하였던 학교(學敎)의 아들이며, 작은아버지 학수(學秀)도 화가였다. 우향이라는 호는 아버지의 호인 향수(香壽)에서 ‘향’을 취하여 ‘또 향’이라는 뜻을 지닌다. 관직으로는 외부주사(外部主事)와 통상국장을 거쳐 1906년에 농상공부 상무국장을 역임하였다.
1911년에 서화미술회(書畫美術會) 강습소가 개설되자 조석진(趙錫晉)·안중식(安中植) 등과 함께 교수진으로 가담하여 글씨와 문인화법을 가르쳤다. 1918년에 서화협회(書畫協會)가 창립될 때 13명의 발기인 중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21년에는 3대회장에 추대되어 첫 서화협회전람회를 개최하였다. 1922년 조선총독부 주관의 제1회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서(書)와 사군자(四君子)’부 심사위원을 지냈다. 그의 글씨는 예서(隷書)와 행서(行書)가 고격(古格)하고, 그림에서는 간결한 필치에 맑은 담채가 곁들여지는 매화와 괴석을 즐겨 그렸다." (다음 백과)
불권재(不倦齋) 심재 조긍섭(深齋 曺兢燮.1873~1933) 논어 술이편 述而篇. 학이불염 회인불권(學而不厭 誨人不倦) '배움에 싫증내지 않으며, 남을 가르치는데 게으르지 않다'에서 가져 왔습니다
코로라19가 엄습한 달구벌
밤을 꼬빡 세웠습니다. 밤새 무엇을 썼는지도 모르겠으며, 리뷰할 여력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평생을 새벽형 인간으로 살아 왔는데, 오를은 잠시 눈을 붙혀야겠습니다
2020.02.15 / (2020.02.21 씀) |
특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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