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나주시

나주...금성관 철비.금성토평비.사마교비

임병기(선과) 2019. 12. 19.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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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관

나주 객사 입니다.

 

 

비림

금성관 외삼문인 망화루를 지나 향좌측에 위치

선정비는 바이패스하고 철비와 몇몇 비를 살펴보앗습니다.

 

 

목사 윤 후 치용 청덕휼민 영세불망비 牧使 尹 侯 致容 淸德恤民 永世不忘碑

1861년

 

 

 

신유 이월 일 辛酉 二月 日

1861년 2월

 

 

윤치용尹致容(1798~)

본관은 해평

1856년 나주 목사 부임. 1857년 여주 목사. 이후 승정원 일기에 1865년 승지로 낙점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광주읍지(1879년). 호남지(1935년)에 의하면 광주 객사를 건립한 인물 입니다.

 

 

 

금성토평비錦城討平碑

"금성토평비는 고종 31년(1894)의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과 싸워 나주성을 수성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95년 세웠다. 본래는 나주목 내의 정수루(正綏樓) 앞에 세워졌으나 1930년 금성관 앞으로 옮겼고, 1976년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먼저 갑오농민항쟁이 일어나면서 나주에까지 농민군이 들어오게 되는 과정을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 유학을 장려하고 충효를 강조해왔던 민종열 목사가 여러 장수들을 지휘, 치밀한 방어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끝으로 관군과 동학군이 나주목 내에서 직접 접전하는 과정을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한편 이 토평비의 건립과정은 관련자료가 없고 비문 속에서도 이를 명쾌하게 언급하지 않아서 자세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이 비문을 지은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이 한말 이 지방에서 이름난 유림인 것을 감안할 때 농민군과 상반된 세력인 유림들의 발의로 이루어졌음은 충분히 예견된다

 

현재 이 비는 다른 선정비들과 함께 위치하고 있으며, 비명은 「금성토평비」, 비문은 기우만이 찬(撰)하고 송재회가 글을 썼던 것으로 동학군의 항쟁에 대응하여 국가에 충절을 보인 나주목 내의 관군이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의 유교가치관이 남아 있던 당시만 해도 그 의미는 컸을 것이다. 그러나 동학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재조명되는 현재의 상황에서 그 의미나 가치는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동학항쟁 당시 나주를 중심으로한 호남지방에서의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한 사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나주신문.2006.11.03)

 

 

사마교비 駟馬橋碑

고려 현종 2년(1011) 거란이 쳐들어오자 왕은 수도 개경을 떠나 남쪽으로 피신하게 되었고, 이곳 나주에서도 10여일 동안 머무르는 일이 있었다. 왕이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다리를 지나갔는데, 그 때부터 이 다리를 ‘사마교’라 불렀으며, 조선시대에 와서 고을 현감이 이 다리를 수리한 후 그 기념으로 비를 세워 놓았다.

 

비는 낮은 사각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받침돌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둘렀고, 머릿돌에는 구름무늬를 가득 새겼다. 비몸 앞면 위쪽에는 ‘사마교비’라는 비의 명칭을 가로로 새겼고, 앞뒷면에 걸쳐 비문을 새겨 놓았는데, 훼손이 심하여 알아보기가 힘들다.  비문에 의해 조선 효종 4년(1653)에 비를 세웠음을 알게 되었는데, 지금은 이곳으로 물이 흐르지 않아 다리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문화재청 발췌)

 

 

금성토평비

비신 하부가 훼손된 연유가 미루어 짐작되며, 비석이 남아 있는게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19.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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