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나주시

나주...금성관

임병기(선과) 2019. 12. 19.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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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관 외삼문

2005년 3월 답사한 글이 보입니다.

당시에는 금성관 좌우 익랑은 없고 정랑만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망화루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망화루 望華樓 

왕을 바라본다는 의미 아닐까요?


 

내삼문



금성관錦城館

나주 객사 건물로 일반적으로는 좌우 크기가 동일하나 금성관은 좌익랑이 더 큽니다.

또한 정침 건물은 익랑과의 연결성 때문에 맞배지붕이 일반적이지만 금성관은 팔작지붕 입니다.

2005년 답사기에 정랑만 있었다는 글로 미루어 이후 복원한 것 같습니다.

객사에 대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조선 성종 6∼10년(1475∼1479) 사이에 나주목사 이유인이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 보물 제2037호. 이 건물은 조선 초기 목사 이유인(李有仁)이 건립한 것으로, 1603년(선조 36)에 크게 중수하였고, 1884년(고종 21)에 목사 박규동(朴奎東)이 또다시 중수하였다.1910년 이후 민족항일기에는 건물의 일부를 개조하여 군청 청사로 사용하다가 그 뒤 1963년과 1976년 두 차례에 걸쳐 완전 해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 선생이 이곳에서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고, 명성황후가 시해되었을 때 빈소가 마련되어 나주인 들의 항일정신을 고조시킨 곳도 금성관이다. 금성관은 일제 강점기에 창호·마루등 내부를 개조하여 나주군청 청사로 사용되면서 원형이 크게 변형되었다. 그래서 1976~1977년까지 금성관을 완전해체한 뒤 거의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하는 작업이 이뤄졌다."(다음에서 발췌 정리)


 

삼도


 

 

  

글씨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벽오헌碧梧軒

좌익랑 입니다.




碧梧軒

 

 


우익랑

 

 


행사시에

설치물을 지지하는 장치로 추정 됩니다. 

 


우물

 


금성관

왜 좌우익랑의 규모가 다를까요?


2019.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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