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나주시

나주...나주 향교

임병기(선과) 2019. 12. 20.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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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향교 외삼문


나주향교

2005년 3월 22일 답사기에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 했던가?
늦은 점심을 먹고 나주향교로 향했지만 외삼문 입구의 하마비에서 바라본 큰 규모에 놀랄틈도 없이 문이 잠긴 향교의 돌담길 만 무심히 바라보았다. 밖에서 바라보아도 평지향교의 전형인 전묘후학의 배치양식에 충실한 것을 알 수 있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향교중 나주 향교가 가장 크다.

조선의 건국이 1392년인데,나주향교가 1407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니 조선 초기 건국이념에 충실한 배치임은 분명할 것인데, 나주향교가 그렇게 빨리 건립된 까닭이 뭘까?   "천년 목사 고을 나주"라는 나주민의 자긍심이 담긴 구절처럼 나주는 고려 983년(고려의 건국은 918년) 이래 조선말까지 호남의 중심 고을이었으며,이는 후삼국 궁예의 졸개였던 왕건의 위상과 고려 건국의 중심에 나주호족 오다련의 딸과 퍽이나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온다.

완사천은 전설을 담은 샘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시대 견훤을 공략하고자 나주에 진출해 있을 때 이 샘가에서 한 처녀를 만나 인연을 맺었다. 고려사에는 왕건이 목포(지금의 송월동 나주역사 부근 둥구나루)에 정박했을 때 상류쪽에 오색구름이 자욱하여 이를 보고 찾아가니 이 완사천에서 한 처녀를 만나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처녀는 나주지방의 호족인 오씨 집안의 딸로 후에 태조의 제2비인 장화왕후가 되며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고려 2대왕 혜종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때부터 혜종이 태어난 마을을 흥룡동(興龍洞)이라 불렀고, 이 샘은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남아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샘옆에는 나주오씨문중에서 세운 장화왕후기념비가 서 있다.


 

하마비


 중문


나주향교

서울 성균관과 동일한 구조를 갖추었고, 우리나라 향교 배치에서 흔치 않은 전묘후학의 배치이며, 또한 경주 향교와 더불어 가장 큰 향교 입니다. 동무,서무를 갖춘 대성전은 까치발로 바라보는데 만족해야 했고, 심향사에서 옮겨왔다는 연화대좌 등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서울 성균관

http://cafe.daum.net/moonhawje/DjZP/4245


 

대성전 은행나무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달빛에 젖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고 합니다.


 

대성전大成殿

지금까지 단지 평지에 조성된 향교이어서 전묘후학의 배치인 것으로 이해하였는데, 여저 자료에 " 나주향교는 공자의 아버지를 모시는 계성사가 있어 명륜당과 대성전의 자리가 바뀌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서무西廡


 

동무東廡


 

외삼문은 폐쇄되어 명륜당으로 출입 가능한 문을 내었습니다.

서울 성균관과 비슷한 구조입니다.


 

영란문 迎欄門

(출입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문

 


명륜당

성균관과  버금가는 구조 입니다.

월대 뒤쪽에 명륜당 현판이 걸린 정청(?) 좌우 대칭으로 3칸 익사을 달았습니다.

 

 


좌익사左翼舍

 


우익사右翼舍

 


동재東齋

서울 성균관 동재와 버금 가는 규모와 구조 입니다.

명륜당 쪽으로는 회랑과 창을 내었으며 마루와 출입문은 반대로 배치하였습니다.

 


서재西齋

동재한 동일한 구조 입니다.

 


충효관 외 부속건물

동재 뒤편에 위치

 

 

비자나무

수령 500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나주향교.나주 객사 금성관

나주 답사시에 꼭 동선에 포함시키면 좋을 듯 합니다.

곰탕 골목도 지근 입니다.

 

2019.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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