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우리나라의 부도 사진을 집계하는 과정에서 원진국사부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오래전 답사에서 친절하셨던 스님과의 대화도 또렷하게 기억나건만...
젊은 날 장승과 기싸움도 하면서 의기양양, 보무 당당(?)하게 걸어갔건만
이제는 파수꾼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잽싸게 달구지에 채찍을 가하는 꼰대가 되었어니.
원진국사 부도
불회사 사적비 사적비 옆 등산로
등산로를 100미터 오르면 나무 계단이 보이고, 부도는 반대편 대나무 숲속 길 10여미터에 있다.
원진국사(圓眞國師) 부도 많은 사람들이 원진국사(圓眞國師) 부도를 1403년 불회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한 원진국사(元稹 國師) 부도로 혼동하고 있다. 또한 불회사 부도는 포항 보경사 부도비 조성(1224년)후 후대(1317년)에 분사리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 분사리 하였을까?
원진국사(圓眞國師. 1171~1221) 포항 내연산 보경사에 부도와 부도비가 전한다.
부도비문 해석본을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에 옮겨왔다.
원진국사(圓眞國師)비명(碑銘) [제액(題額)]
스님의 휘는 승형(承逈)이요, 자는 영회(永廻)이며, 속성은 신씨(申氏), 상락(上洛)의 산양(山陽)출신이다. 선대(先代)는 대대로 유가(儒家)이었다.아버지의 이름은 통한(通漢)이니, 이(以) (결락) 내급사(內給事)로 있다가 금성(錦城)군수(郡守)로 부임(赴任)하여 재임(在任) 중에 순직하였고,어머니도 또한 일찍 돌아가셨다. 그리하여 스님은 3살 때 고아(孤兒)가 되어 숙부(叔父)인 시어사(侍御史) 광한(光漢)에 의해서 국양(鞠養)되었다. 총명하고 영특하여 해포(孩抱)로부터 전혀 희완(戲翫)하는 일이 없었으며, 7살 때 운문사(雲門寺) 연실선사(淵實禪師)를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모든 언행(言行)과 거지(擧止)가 모두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희세(希世)의 신동(神童)이라고 입을 모았다.
13살 적에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면 원북리(院北里)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嵓寺) 동순(洞純)스님을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다음 해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金山寺) 계단(戒壇)에서 비구계(比丘戒)를 받았다.이로부터 청정하고 엄격하게 계주(戒珠)를 지켜 법기(法器)를 크게 키웠다. 그리하여 동순(洞純)스님이 매우 애중(愛重)히 여겼다. 그러나 스님은 명교(名敎)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교종(敎宗)을 벗어나 뜻을 고상(高尙)한 데 두어 운종(雲蹤)과 학태(鶴態)처럼 초연 자약(超然 自若)하여, (결락) 깊은 숲속에서 정진(精進)하려 하였으나, 그러나 늙은 동순(洞純)스님을 두고 훌쩍 떠날 수가 없었다. 정사년(丁巳年)봄 해마다 연례적(年例的)으로 개최하는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고 있는 중, 순공(純公)이 입적하였다는 부고를 받고,장례식에 떠나기 전 시어사(侍御史)인 숙부(叔父)를 찾아가서 여쭙되, 인생은 마치 아침 이슬과 같고, 부귀는 또한 뜬 구름과 같아서, 저는 세상 살이가 마치 밀을 씹는 것과 같나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스님께서 입적(入寂)하였으므로 곧 떠나서 나의 초지(初志)를 성취하리라 하고는, 석장(錫杖)을 짚고 곧바로 떠났다.
이때 명종(明宗)임금이 조회(朝會) 때 신하들로부터 스님의 도행(道行)이 고매하다는 보고를 듣고, 유사(有司)에게 조칙(詔勅)을 내려 스님의 도행을 초록(抄錄)하였으니, 이는 상례(常例)를 벗어난 조치인 것이다. 이 해 가을 종문(宗門)의 기숙(耆宿) 대덕(大德)스님들이 모두 강하게 권하므로, 광명사(廣明寺)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서 어려운 질문에 대답하니, 마치 공허(空虛)에 전하는 소리와 같으며, 유창하여 날아가는 듯한 변재(辯才)는 층암절벽(層岩絶壁)에서 떨어지는 물과 같아서 듣는 사람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그리하여 선불장에 참석한 중사(中使)와 증관(證官)과 석덕(碩德)들이 모두 상(床)에서 내려 공손히 서서 경청하였으므로, 상상품(上上品) 승과(僧科)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스님은 이미 명리(名利)에 대하여 전혀 마음에 개체(芥滯)함이 없고, 다만 두루 명산승지(名山勝地)를 순유(巡遊)코자 할 뿐이었다.
드디어 조계산(曹溪山)으로 가서 보조국사(普照國師)를 참방하고 법요(法要)를 물은 다음,강원도 강릉군 오대산(五臺山)으로 가서 문수보살님 앞에서 예배기도(禮拜 祈禱)를 하고 명감(冥感)을 받았다. 이어 춘천(春川) 청평산(淸平山)으로 진락공(眞樂公)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김부철(金富轍)이 지은문수사기(文殊寺記)를 살펴보니, 공(公)이 문인(門人)들에게 이르기를, 수능엄경(首楞嚴經)은 심종(心宗)을 증인(證印)한 것이므로, 불교의 진리를 발명(發明)함에 있어 중요한 내객(內客)이다라는 말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태화(泰和) 8년 무진(戊辰)에 왕명으로 개골산(皆骨山) 유점사(楡岾寺)에 주지(住持)토록 하였다.경오년(庚午年) 가을 당시 귀척(貴戚)들이 경기의 연법사(演法寺)에서 법회를 개설하고, 왕에게 주청(奏請)하여 스님을 법사(法師)로 모시기로 하고, 편지를 보내어 고청(固請)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경사(京師)로 나아갔다. 지금의 상국(相國)인 청하공(淸河公)이 문하(門下)의 잠리(簪履)수천 명을 데리고 나와 도성의 동쪽에 있는 곽주사(郭注寺)로 영접하되, 기꺼이 경개(傾盖)로 환대하고 구의(摳衣)의 예를 다하였으니, 마치 돌로써 물에 던짐에 문연(脗然)히 상합(相合)함과 같았다. 청하공(淸河公)은 이때부터 더욱 선풍(禪風)을 중(重)히 여겨 조계종의 법유(法乳)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진작(振作)하는데 진력(盡力)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숙연(宿緣)의 소감(所感)이 아니겠는가?
계유년(癸酉年)에 이르러 지금의 고종(高宗) 임금께서 천조(踐祚)하고 선왕(先王)인 강종의 뜻을 계승하여 2년 갑술(甲戌)에 곽주사(郭注寺)를 중수하여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열어 선지(禪旨)를 크게 천양(闡揚)하고 선사(禪師)의 법계를 비수(批授)하였다.그리고 이 해 봄에 또 고종 임금이 스님을 비전(秘殿)으로 초청하여 상의직장(尙衣直長)동정(同正) 서치(徐稚)의 아들로써 자기 대신 삭발하여 스님이 되게 하였다. 다음 해 가을에 또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비가(批加)하고, 조칙(詔勅)을 내려 동경(東京) 이내(理內)인 청하현(淸河縣) 보경사(寶鏡寺)에 주지(住持)토록 하였다. 이보다 앞서 청평산(淸平山) 문수사(文殊寺)와 설악산(雪嶽山) 한계사(寒溪寺)에 주지(住持)토록 명하였으나, 모두 고사(固辭)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보경사 원진국사부도
지금 보경사의 주지를 맡은 것은 강권(强勸)에 의한 것이지, 결코 스님의 뜻은 아니었다. 운문산(雲門山)에 복안사(伏安寺)란 절이 있었는데, 항적(降賊)의 주장(主長)들이 연수(淵藪)에 모여 있던 구염(舊染)의 좋지 못한 형태가 아직까지 말끔히 정돈(整頓)되지 않아서, 당두(堂頭)와 노숙(老宿)스님들이 크게 염려하고 있었다. 이들을 새로운 생활의 길로 개도(開導)코자 하여 스님을 초청해서 특별히 법회(法會)를 열고, 육조단경(六祖壇經)을 강설하였더니, 군적(群賊)들이 모두 크게 감화를 받아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는 흉폭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로부터 그 지방 일대(一帶)가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는 태평세상(太平世上)이 되었다.
이때에도 날이 크게 가물었다. 스님께서 이르기를 지금 비는 내리지 않고, 불볕 더위가 계속함은 재기(災氣)가 덮인 까닭이니, 말라가는 못자리가 타고 있는 농작물(農作物)을 어찌 그대로 보고만 있겠는가? 하고, 한 잔의 차(茶)를 바위 위에 올려 놓고 아라한(阿羅漢)님께 기도하되, 선월화상예참문(禪月和尙禮懺文)으로써 예식 도중 아직 범창(梵唱)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단 비가 내려 전답(田畓)이 완전히 해갈(解渴)되었다.
마지막으로 원정(元正)과 청림(靑林)등 두 선로(禪老)와 함께 종용(從容)히 도담(道談)을 나누었다. 8월 28일에 이르러 삭발하고, 목욕하였다. 9월 2일 시자(侍者)를 불러 옷을 갈아 입고, 단정히 승상(繩床)에 앉아 범패(梵唄)를 읊게 하였다. 이때 시자(侍者)가 스님께 임종게(臨終偈)를 청(請)하니, 스님은 눈을 뜨고 한참동안 노려 보고 이르시기를, 이 어리석은 놈아! 내가 평생동안 한 게송(偈頌)도 지은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무슨 게송을 지어달라는 말인가? 하시고, 승상(繩床)을 세 번 내리친 다음, 곧 적요(寂寥)하므로, 가까이 가서 보니 이미 입적하시었다. 그러나 안색(顔色)은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여 온 몸이 마치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
다음 날 영골(靈骨)을 수습(收拾)하여 신구산(神龜山)으로 이장(移葬)하고 탑(塔)을 세웠다. 세수는 51이요, 법랍은 37(비문에 24는 오치(誤植)이다)세였다. 고종(高宗) 임금께서 부고를 듣고 크게 진도(震悼)하시면서 국사(國師)로 추증(追贈)하고, 시호를 원진(圓眞)이라 증정(贈呈)하였다. 문인(門人)들이 스님의 탑비(塔碑)를 세우고자 조정(朝廷)에 건의(建議)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신(臣) 공로(公老)에게 비문(碑文)을 지으라고 하명하였으나, 신(臣)은 그 동안 문직(文職)으로써 막중한 추근(樞近)의 위치에 있으면서 폐하(陛下)를 욕되게 하고 있을 뿐아니라, 학식(學識)이 천박(淺薄)하여 도저히 비문을 지을 수 없다고 굳게 사양하였으나, 하는 수 없이 문도(門徒)들이 기록한 행장(行狀) 자료에 의거하여 억지로 서술(序述)하고 명(銘)하여 가로되,
그 많은 종파들이 천하(天下)에 유통(流通) ①
보경사 원진국사부도를 모본으로 조성한 팔각원당형이나 아주 간략화 된 모습이다. 하대석,중대석,상대석을 갖추었으나 복련,앙련을 선각으로 새기고 팔각중대석도 형태를 찾기 어렵다. 팔각 탑신석도 줄어들었으며 탑신에 주인공의 당호와 조성시기를 새겼다. 팔각 옥개석 위 상륜은 망실되었다.
기단부
원진국사통조지탑(圓眞國師通照之塔) 延祐四年丁巳五月日立(1317년)
옥개석
옥개석 하부
사적비 옆 부도재.석등재..
일주문 밖 부도
도암당(道巖堂) 부도 나주 운흥사.화순 개천사.해남 대흥사에도 부도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행장을 추적하고픈 스님이다.
장승님예 다시 뵙겠다는 인사를 하지 못했군요
하지만 인연의 끈은 놓지 않겠습니다.
2018.1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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