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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예산군

예산...가야사지 석조부재

by 임병기(선과) 2019.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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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 묘 앞, 상가리 미륵불 앞쪼게 가야사지와 암자터(?)에서 발굴된 여러점 석조 부재가 있습니다.

 

가야사伽倻寺

"伽倻寺는 문헌과 비문, 발굴 출토유물에서 ‘伽倻寺’, ‘伽耶寺’, ‘迦耶岬寺’, ‘加良甲寺’, ‘伽倻岬(寺)’ 등의 명칭으로 확인된다.
가야사의 운영시기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자료는 이 1735년 10월 9일부터 1754년 1월 29일까지 가야산을 유람한 이후에 작성한 『象山三昧』이다.➊ 이 문집에 의하면 가야사는 당나라 永明 연간에 梵王國師에 의해 창건되었고, 이후 신라의 心地師가 重建, 고려 弘眞國師가 三建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도청봉으로 불렸던 가야산 아래에 위치한 가야사는 전성기 때 전각이 크고 화려하며, 많은 招提➋와 토지를 소유하였으나 전쟁으로 소실되어 자취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가야사의 초제였던 妙巖寺는 가야사가 훼멸되자 본래 호칭을 버리고 가야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선당과 승당, 서상실, 누각 등이 있으며, 누각 바깥으로 金塔으로 불리는 석탑과 석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밖에 고려시대에 간행된 자료에는 『三國史記』와 『高麗史』, 「廣照寺眞澈大師碑文」이 있다.➌ 『三國史記』에 ‘加倻岬岳’이라는 명칭은 가야산의 옛 명칭으로 추정된다. 『高麗史』에는 1177년 2월 10일에 반란을 일으킨 亡伊가 伽耶寺를 노략질한 기록이 있다. 또한 「廣照寺眞澈大師碑文」에는 眞澈大師(870~936)가 12세 때 迦耶岬寺에서 출가하였으며, 886년에 迦耶岬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왕실기록과 지리지를 비롯해 개인문집 등에서 伽倻寺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➍ 조선시대 자료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간행된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伽倻寺는 ‘가야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709년 7월 2일에 작성된 『承政院日記』에는 伽倻寺의 位田을 折給하기를 청하는 내용이 있다.

 

이후 18세기에 간행된 지리지인 『輿地圖書』, 『梵宇攷』에도 가야사가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梵宇攷』에는 가야사의 鐵尖石塔에 대해 각 면의 감실에 불상이 안치되어 있고 金塔으로 불린다고 하였다. 18~19세기의 고지도인 《海東地圖》, 《廣輿圖》, 《地乘》에는 가야산 아래 가야사가 표시되어 있다. 이후 金允植의 「沔陽行遣日記」에 의하면 김윤식은 1893년 5월초에 남연군묘에 도착하였으며, 이곳이 가야사의 유허지라고 하였다. 또한 황현의 『梅泉野錄』에는 가야사에 남연군묘가 조성된 이유와 과정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대원군이 가야사를 소각한 것은 1844년이다. 따라서 그 이후에 간행된 『湖西邑誌』(1871)와 『湖西邑誌』(1895)에 가야사가 유지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오류로 판단된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보아 가야사는 다양한 사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운영시기 동안 寺名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음이 비슷한 한자의 오기일 가능성도 있다. 가야사 창건은 5세기로 전하며, 늦어도 9세기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가야사는 초제와 토지를 소유하며 대규모 가람을 형성하였으나 전쟁에 의해 소실되었다고 전하는데, 임진왜란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실된 가야사지는 폐사되고, 초제의 하나였던 묘암사가 가야사로 개칭되어 불려진다. 따라서 현재 가야사지는 묘암사 일원이며, 18세기까지 다수의 전각과 석탑, 석등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남연군묘가 조성되는 과정에서 원래 묘암사였던 가야사가 폐사된 것으로 판단된다.

가야사지의 간략한 현황과 소재문화재에 대한 조사내용은 1963년 이은창에 의해 학계에 보고된다.➎ 사지는 남연군묘를 중심으로 상가리 일대에 광범위하게 위치하며, 석축과 초석 등의 건물지 일부와 석조유물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석조유물은 기존에 석불, 석등, 승탑, 탑비 등이 있었으나 파손 및 매립, 반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77년 자료에는 남연군묘 입구에 탑지가 보고되어 있는데, 석탑지 기단에 장대석이 있고, 그 주변에서 석탑재 2매를 확인하였다고 한다.➏

 

그러나 1987년의 『예산지역 불적조사』에는 탑지에 대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으며, 가야사의 광범위한 가람에 경작활동이 이루어지고, 곳곳에 대형 치석재와 기와편, 자기편 등이 산재하였다고 한다.(문화재청.한국의 사지)

 

 

 

 

 

 

 

 

 

 

 

 

 

2019.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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