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 묘 앞, 상가리 미륵불 앞쪼게 가야사지와 암자터(?)에서 발굴된 여러점 석조 부재가 있습니다.
가야사伽倻寺 "伽倻寺는 문헌과 비문, 발굴 출토유물에서 ‘伽倻寺’, ‘伽耶寺’, ‘迦耶岬寺’, ‘加良甲寺’, ‘伽倻岬(寺)’ 등의 명칭으로 확인된다.
이곳에는 선당과 승당, 서상실, 누각 등이 있으며, 누각 바깥으로 金塔으로 불리는 석탑과 석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밖에 고려시대에 간행된 자료에는 『三國史記』와 『高麗史』, 「廣照寺眞澈大師碑文」이 있다.➌ 『三國史記』에 ‘加倻岬岳’이라는 명칭은 가야산의 옛 명칭으로 추정된다. 『高麗史』에는 1177년 2월 10일에 반란을 일으킨 亡伊가 伽耶寺를 노략질한 기록이 있다. 또한 「廣照寺眞澈大師碑文」에는 眞澈大師(870~936)가 12세 때 迦耶岬寺에서 출가하였으며, 886년에 迦耶岬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18세기에 간행된 지리지인 『輿地圖書』, 『梵宇攷』에도 가야사가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梵宇攷』에는 가야사의 鐵尖石塔에 대해 각 면의 감실에 불상이 안치되어 있고 金塔으로 불린다고 하였다. 18~19세기의 고지도인 《海東地圖》, 《廣輿圖》, 《地乘》에는 가야산 아래 가야사가 표시되어 있다. 이후 金允植의 「沔陽行遣日記」에 의하면 김윤식은 1893년 5월초에 남연군묘에 도착하였으며, 이곳이 가야사의 유허지라고 하였다. 또한 황현의 『梅泉野錄』에는 가야사에 남연군묘가 조성된 이유와 과정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대원군이 가야사를 소각한 것은 1844년이다. 따라서 그 이후에 간행된 『湖西邑誌』(1871)와 『湖西邑誌』(1895)에 가야사가 유지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오류로 판단된다.
가야사지의 간략한 현황과 소재문화재에 대한 조사내용은 1963년 이은창에 의해 학계에 보고된다.➎ 사지는 남연군묘를 중심으로 상가리 일대에 광범위하게 위치하며, 석축과 초석 등의 건물지 일부와 석조유물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석조유물은 기존에 석불, 석등, 승탑, 탑비 등이 있었으나 파손 및 매립, 반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77년 자료에는 남연군묘 입구에 탑지가 보고되어 있는데, 석탑지 기단에 장대석이 있고, 그 주변에서 석탑재 2매를 확인하였다고 한다.➏
그러나 1987년의 『예산지역 불적조사』에는 탑지에 대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으며, 가야사의 광범위한 가람에 경작활동이 이루어지고, 곳곳에 대형 치석재와 기와편, 자기편 등이 산재하였다고 한다.(문화재청.한국의 사지)
2019.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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