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예산군

예산...화전리 석조사면불상

임병기(선과) 2019. 12. 3.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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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너 차례 답사한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의 오류인듯, 2004년에 기록한 짧은 두 줄 문장만 남아 있습니다. 그마져도 엉터리인...

 

"보원사지를 거쳐 수덕사로 향하다 길 위에서 화전리 사면불 입간판을 만나 농로길로 들어서서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촌로에게 길을 물어 산길을 더듬어 올라서니 사모지붕 전각아래서 형체조차 구분하기 힘든 사면불이 지친 표정으로 반긴다. 흔치 않은 백제의 사면불로 이 곳 사람에게도 역시 그냥 미륵불로 알려졌지만 아마 경주의 불상처럼 남쪽 석가, 북쪽 미륵(?), 동쪽 약사여래, 서쪽 아미타 불로 추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며, 자연암석의 재질로 인해 마모가 심해 맘이 서글프진다."

(사방불,사면불 구분은 아래에 백유선님의 글을 옮겨 오겠습니다)

 

화전리 사면불상

너무나 알려진 옛님인 까닭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건택님의 보호각 출입 허가 덕분에 안으로 들어가 가까이서 사면불을 뵙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더불어, 백유선님의 설명으로 사면불상에 새겨진 보살상을 알았으며, 암반위  탑이 조성되었던 사실도 배웠습니다.

 

 

암반위에 새겨진 석탑은 대부분 고려초기 산천비보책으로 단독으로 조성된 사례가 대부분 입니다.

화전리 사면불앞 석탑은 불상 앞에 조성되어 비보탑 가능성은 낮아 보이며, 비슷한 대표적인 작례는 공주 주미사지 석탑입니다.

 

공주 주미사지 답사기

http://cafe.daum.net/moonhawje/DjZP/3394

 

 

자연 암반위.

기단부가 눈에 들어 옵니다.

 

아래 사진 3장은 공주박물관에 전시중인 화전리에서 출토된 석탑 부재로 문화재청 한국의 사지에서 옮겨 왔습니다.

 

 

상륜부 수연

 

 

수연 찰주공

 

 

옥개석. 층급받침

 

3층 석탑의 삼층 옥개석이며 고려 석탑임을 암시 합니다.

 

 

석탑

사면석불 이후 조성된 소형 삼층석탑으로 조성시기는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됩니다.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사면불과 사방불에 대한 설명을 동호회 백유선님 답사기에서 옮겨 왔습니다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불, 최초의 사면불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큰 바위의 사면에 불상을 새긴 사면불입니다.


흔히 사방불이란 명칭으로 부르는 불상도 많이 있는데요.
사방불은 사면불과 형식은 같으나, 동서남북 네 방향에 경전에 의거하여 불상을 조성하는 석불을 말합니다.
사방불에 대한 내용은 주로 밀교 경전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오방불이라고도 하는데요.
중앙의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동쪽의 아촉여래, 서쪽의 아미타여래, 남쪽의 보생여래, 북쪽의 불공성취여래를 말합니다.
바위에 사면불로 조성할 경우 중앙의 대일여래는 생략하고 동서남북 네 방향에 각각의 불상을 조성합니다.
이를 사방불이라고 합니다.
대체로 사방불이란 개념이 수용된 것은 통일신라 이후의 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석탑 1층 탑신에 사방불이 조성된 경우가 많은데요.
대체로 경전의 내용과는 약간 다르게 당시 많이 신앙되던 불상을 조성했습니다.
동쪽에는 약사불, 서쪽에는 아미타불, 남쪽에는 석가모니불, 북쪽에는 미륵불을 조성하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물론 이는 일반적인 내용이고, 실제로는 탑마다 다르게 조성한 경우가 많습니다.
또 존명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은데,
대체로 동쪽의 약사여래와 서쪽의 아미타여래는 수인을 통해 확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 사면불은 어떻게 다를까요?
대체로 경전에 의거하지 않고(즉, 밀교적인 세계관에 구애받지 않고, 방위 개념이 없이)
사면에 임의로 불상을 조성할 경우 이를 사면불이라고 부릅니다.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은 아직 밀교적인 세계관이 정립되기 전이어서 사방불보다는 사면불로 부르는 것입니다.
문경 대승사의 사면석불도 기록에 의하면('삼국유사' 기록에 문제가 있기는 하나) 6세기말의 작품이므로 사면불로 부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면불은 네 면에 불상을 새겼다는 단순한 의미로 이해하면 됩니다.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의 안내판에는 사면불은 사방불이라고 한다면서 잘못 설명하고 있습니다.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은 명문이라든지 뚜렷한 근거가 없어 제작연대를 확신하기는 어려우나,
학자들은 양식상의 특징을 고려하여 6세기의 중엽의 작품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상이나 서산 용현리 마애삼존불보다 앞선 백제 최초의 석불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글에 앞서

공주박물관에 전시중인 화전리에서 발굴된 불두와 보살두 사진을 문화재청 발간 한국의 사지에서 옮겨왔습니다.

불두는 소발에 육계가 높은 편입니다


보살두는 사면불에서 떨어져 나온 불두인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고 합니다.

 

 

 

 

 

보살두

 


남면.동면

 

 

남면 여래좌상

사면불의 주존으로 생각됩니다.
결실된 불두는 환조, 통견의 법의이며 오른쪽 어깨에 대의자락이 걸쳐져 있습니다. 대좌까지 흘러 내린 대의자락은  상현좌입니다.
승각기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y’자형으로 복부에  띠매듭이 있습니다.  손은 결실된 상태이나 결구공이 남아 있어 별도로 끼웠음을 보여 줍니다. 수인은 시무외인, 여원인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표현했으며 외연에는 화염문이 가득 합니다.

두광 연화문의 두원광 외연에 선문을 가득채운 광연대를 두르고 있으며, 주변을 덩굴문을 새겼습니다.

정상부에는 화염과 덩굴문으로 둘러싸인 보주가 있습니다.  신광은 덩굴문으로 둘러싸인 외연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동면 여래입상

남면처럼 불두는 환조로 조성하였으며 목 상부에 홈이 있어 별도로 끼웠음을 보여 줍니다.
법의는 통견이며, 승기지는 남면과 동일하개  ‘y’자형이며 띠매듭이 확인 됩니다. 옷자락을 왼쪽 팔에 걸치고 있으며 복부에 드리워진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흐르고 있습니다. 하반신에는 군의를 착용하고 있고 손목에는 결구공이 남아 있어 별조로 조성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발은 오른발만 남아 있습니다.


광배는 두광만 있으며, 9엽 단판연화문 외연에 문양이 새겨지지 않은 광연대를 두고 외곽에 양각선을 둘렀습니다.두광 외연에는 장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불두를 별도로 조성하였음을 보여주는 홈

 


여래상 우측 하단 보살상 

 

 

화전리 사면불에서 발굴된 보살두와 비교해보세요.

 

 

 

 

 

북면.서면

 

 

북면 여래입상

동면 여래상과 거의 흡사합니다.

 

 

 

 

 

 

 

서면 여래입상

화전리 사면리 불상이 발굴되기전 지면에 노출된 여래상이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훼손이 가장 심합니다.

 

 

두광

일견 동면, 북면 여래상과 같아 보입니다.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과 더불어 백제를 대표하는 마애불입니다.

화강암에서 온기를 느꼈으며, 금방이라도 성큼 다가올 것 같은 착각이 든 님이었습니다.

답사 일정이 아니었다면...

 

2019.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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