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너 차례 답사한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의 오류인듯, 2004년에 기록한 짧은 두 줄 문장만 남아 있습니다. 그마져도 엉터리인...
"보원사지를 거쳐 수덕사로 향하다 길 위에서 화전리 사면불 입간판을 만나 농로길로 들어서서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촌로에게 길을 물어 산길을 더듬어 올라서니 사모지붕 전각아래서 형체조차 구분하기 힘든 사면불이 지친 표정으로 반긴다. 흔치 않은 백제의 사면불로 이 곳 사람에게도 역시 그냥 미륵불로 알려졌지만 아마 경주의 불상처럼 남쪽 석가, 북쪽 미륵(?), 동쪽 약사여래, 서쪽 아미타 불로 추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며, 자연암석의 재질로 인해 마모가 심해 맘이 서글프진다." (사방불,사면불 구분은 아래에 백유선님의 글을 옮겨 오겠습니다)
화전리 사면불상 너무나 알려진 옛님인 까닭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건택님의 보호각 출입 허가 덕분에 안으로 들어가 가까이서 사면불을 뵙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더불어, 백유선님의 설명으로 사면불상에 새겨진 보살상을 알았으며, 암반위 탑이 조성되었던 사실도 배웠습니다.
암반위에 새겨진 석탑은 대부분 고려초기 산천비보책으로 단독으로 조성된 사례가 대부분 입니다. 화전리 사면불앞 석탑은 불상 앞에 조성되어 비보탑 가능성은 낮아 보이며, 비슷한 대표적인 작례는 공주 주미사지 석탑입니다.
공주 주미사지 답사기 http://cafe.daum.net/moonhawje/DjZP/3394
자연 암반위. 기단부가 눈에 들어 옵니다.
아래 사진 3장은 공주박물관에 전시중인 화전리에서 출토된 석탑 부재로 문화재청 한국의 사지에서 옮겨 왔습니다.
상륜부 수연
수연 찰주공
옥개석. 층급받침
3층 석탑의 삼층 옥개석이며 고려 석탑임을 암시 합니다.
석탑 사면석불 이후 조성된 소형 삼층석탑으로 조성시기는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됩니다.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사면불과 사방불에 대한 설명을 동호회 백유선님 답사기에서 옮겨 왔습니다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불, 최초의 사면불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글에 앞서 공주박물관에 전시중인 화전리에서 발굴된 불두와 보살두 사진을 문화재청 발간 한국의 사지에서 옮겨왔습니다.
불두는 소발에 육계가 높은 편입니다 보살두는 사면불에서 떨어져 나온 불두인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고 합니다.
보살두
남면.동면
남면 여래좌상 사면불의 주존으로 생각됩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표현했으며 외연에는 화염문이 가득 합니다. 두광 연화문의 두원광 외연에 선문을 가득채운 광연대를 두르고 있으며, 주변을 덩굴문을 새겼습니다. 정상부에는 화염과 덩굴문으로 둘러싸인 보주가 있습니다. 신광은 덩굴문으로 둘러싸인 외연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동면 여래입상 남면처럼 불두는 환조로 조성하였으며 목 상부에 홈이 있어 별도로 끼웠음을 보여 줍니다.
불두를 별도로 조성하였음을 보여주는 홈
여래상 우측 하단 보살상
화전리 사면불에서 발굴된 보살두와 비교해보세요.
북면.서면
북면 여래입상 동면 여래상과 거의 흡사합니다.
서면 여래입상 화전리 사면리 불상이 발굴되기전 지면에 노출된 여래상이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훼손이 가장 심합니다.
두광 일견 동면, 북면 여래상과 같아 보입니다.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과 더불어 백제를 대표하는 마애불입니다. 화강암에서 온기를 느꼈으며, 금방이라도 성큼 다가올 것 같은 착각이 든 님이었습니다. 답사 일정이 아니었다면...
2019.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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