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군산시

군산...취성산 불주사

임병기(선과) 2019. 9. 18.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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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대웅전 참배를 드리지 못하여...

사진만 올립니다.

 

 

 

 

삼층석탑

몇 개 석탑 부재로 복원

고마웁기 그지 없습니다.

 

 

 

 

 

 

 

 

대웅전

중수중에 숭정 3년 2월’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막기와를 발견되어 630년에도 유존하였던 전각임이 밝혀졌습니다. 이후,  덕령(德靈) 선사와 신초(愼初) 선사가 1716년(숙종 42)에 처음 지었고, 1911년에 승려 김종우가 중수하였디고 합니다.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로 3단의 높은 석축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민흘림 원기둥을 세운 후, 주심포 형식의 공포를 짜고 겹처마 팔작 지붕을 올렸습니다. 정면 어칸은 여닫이 삼분합 띠살문, 양쪽 협칸에는 두 짝의 여닫이  띠살문 입니다' 양모서리에는 활주를 세웟습니다.

 

 

 

활주

 

 

후면

 

 

목조여래좌상

1666년(현종 7)에 조성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금산사 박물관으로 옮겨 갔습니다.

 

 

 

 

 

부도

2008년 답사에서 먼발치로 뵈어 오늘은 가까이 다가 갔습니다.

 

 

복판의 앙련. 간엽

 

 

원구형 탑신

 

 

옥개석

두텁고, 물매가 급하며, 음각의 추녀. 서까래도 표현했습니다.

 

 

내림마루에는 용을 올렸습니다.

 

 

 

 

탑신은 작지만 공을 들인 조선후기 원구형 부도 입니다.

 

 

2019.08.17 

 

아래는

2007년 글

 

절이 언제 창건되었으며, 어떠한 내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그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사찰의 역사를 알려주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11년에 신종환에 의해 쓰여진 「대웅전주우시주기」이다. 이 중수기에 의하면 이 절은 인도승 마라난타가 384년(침류왕 원년) 백제에 들어왔을 때 지어졌는데, 그 이후 한 동안의 사적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날씨가 맑은 날 불지사에서 서면 서해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지사가 있는 산을 망해산(望海山)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망해산의 형세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시던 옛 인도 마갈타국의 왕사성 영취산(靈鷲山)과 흡사하여 축성산이라 개칭되었다. 아울러 이 사찰에 온 참배객들이 축성산에서 영산회상의 깨달음을 얻기를 서원하여 사찰의 이름도 부처에 대한 깨달음이란 의미의 “불지사(불지사(佛智寺)”라 했다.

 

그런데 근래 불지사의 이름은 덕운 주지스님의 노력으로 불주사로 바뀌어 있었다. 불주사라는 명칭은 이 사찰에서 출토된 1629년 기와에 “불주회승(佛住會僧)”이라 적혀 있었고, 근처의 은적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묘법연화경』에서도 ‘불주사’라 기록되어 있었으며, 『동문선』에 보면 군산 근처 함열이 고향인 해원(海圓, 1262-1340년) 스님이 출가한 사찰이 금산사이고 승과에 급제한 후 처음 주석한 사찰이 ‘불주사(佛住寺)’였다.

 

따라서 원래 불주사의 뒷산인 축성산이 ‘부처님이 거주하며 설법한 산인 영축산과 관련지어 부여된 산이름’인 것과 연관되어 불주사로 불렸을 것이다...전통사찰정보

 

 

멀리 보이는 범종각 그리고 완만히 흘러 내린  돌계단.

 

 아련히

 

박규리 님의 치자꽃 설화가 스쳐 지나간다.

 

데자뷰?

 

어느님이 그랬다.

 

유주현의 탈고 안 될 전설을 떠올리면  박규리의 치자꽃 설화, 김영숙의 치자꽃 설화에 부쳐가 생각난다고...

 

치자꽃 설화...박규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 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는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망초 흐드르진 해우소 주변

 

 

현재 내부에는 석가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원래 이 대웅전에 모셔져 있던 조선시대의 아미타불좌상은 현재 금산사 성보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아미타불상은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있으며 몸체에 비하여 얼굴이 약간 큰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본래 모악산 귀신사의 영산전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인데 언제인가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10년 전 개금 할 때 ‘전라도 태인지 운장산 운장사’라 쓰인 『법화경』활자본과 함께 기타의 복장 유물들이 나왔다고 한다.

 

스님, 보살님 두분. 너무도 엄숙하고 무거운 제향 분위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좁은 법당에 수만명 사람이 운집한 듯 이어지는 독경소리, 무슨 사연이길래 목탁소리마져 저리 애달픈 곡조로 심금을 울리나?

 

불주사에서 법당 내부도 다시 인연을 지어야 할 모양이다. 나의 기분을 눈치챈 듯 조용히 말을 건낸다. "커피 한잔 하실래요?" 산사의 커피 맛은 오래전 충남 홍성 고산사 노보살님이 새벽에 주신 커피가 최고였는데 불주사에서 사랑초님이 건내주신 커피 맛도 쥑인다(수박,떡,빵,사과도 넘 맛 났습니다). 아차! 봉정사 영산전 쪽마루에서 마신 어느님의 커피도 일품이었다. 어? 또 몇 분 더 계시는군. 휴~~~ 할 수 없군. 산사에서 님과 마시는 커피는 모두 베리 굿!!!!!!!!!!

 

 

근자에 조성 아니 복원한 탑. 하기단 갑석 1매, 상기단 면석 2매와 1층 몸돌은 본래 부재를 활용하였다.

 

다 버리고 새로 조성하면 시간도 경비도 줄일 수 있겠지만 공덕은 정성은 어찌 하리요?

 

 

전각 뒤로 가신 님이  신기한 듯 바라본다. 햇볕 가득한 곳으로 모시면 좋을텐데...

 

 

삼성각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비구니 절집 처럼 정갈한 장독대. 보살님의 정성이 단지에 가득하다.

 

우리 장모님의 어록이 생각난다.

 

-.임서방. 우리집에 처음 인사하러 왔을때 느낌이 어떻든가?

 

-.장독대가 반들반들 윤이나서 처녀(마누라)가 게으르지는 않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부지런한 부모 밑에는 절대 게으른 딸이 없거든요.

 

-.이사람아!! 아무리 바쁜 농번기에도 아침 저녁으로 장독대를 닦지 않으면 농사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어!!

예로부터 장독대를 보면 그집 살림살이를  알 수 있다고 했다네.

 

 

불주사.

 

참 이상하다.

 

자꾸만 치자꽃 설화가 생각나 떠나는 사람 고개를 돌리게 한다.

 

저 계단에서 스님과 여인은 헤어졌겠지?

 

 

*치자꽃 설화에 부쳐...김 영숙

사랑이 서럽기야 했겠습니까


다 영글지 못한 인연으로 만나져


내도록 눈썹 밑에 달라붙은 채


눈을 감으나 뜨나 발그림 그리고 섰는


미련이 그리움인 까닭입니다


내 전생에 어찌 살아


만나는 인연마다 골이 패이고


설익은 목탁소리에 속 울음을 묻는 것인지


아무런 답을 들려 보낼 수 없었던


업장이 서러웠던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번민은 아닙니다


안고 싶은 그 사랑을 밀어내며


힘 풀리어 매달리던 무거운 두 팔


승속을 흐르는 일주문 달빛에 젖어


좀체 떨어지지 않던 한 쪽 다리입니다


정작 서러운 것은, 법당을 서성이다


열린 법당문을 빠져나가던 경종소리 쫓아


인연하나 변변히 맺지도 못하면서


변변하지도 못한 인연하나 못 놓아


산문을 되돌리던 복 없는 영혼이었습니다

 

*박규리 시인의 '치자꽃 설화'에 부처

 

2008.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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